소설리스트

다시, 아이돌-87화 (87/125)

87화

정하연이 몇 장의 서류를 앞에 두고 펜을 꾹 쥔 채 실장의 눈치를 보았다. 그녀가 사인하기를 망설이고 있다는 걸 눈치챈 실장이 인상을 쓰며 그녀의 망설임을 건드렸다.

“기다려주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오늘 입금하지 않으면 노래 안 주겠다고 벼르고 있단 말이에요.”

“하루, 딱 하루만 더 기다려 주세요.”

정하연이 시끄럽게 떠들어 대고 있는 TV를 힐끔거렸다. 아직 재경의 무대를 보지 못했다. 벌써 방송도 끝나가고 있었고 재경이 나올지 안 나올지도 몰랐다. 정하연이 좀처럼 펜을 종이에 대지 못하고 있자 실장이 잔뜩 눈썹을 휘어댔다. 일부러 재경이 나오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틀어놨더니 그것만 보고 사인할 생각이 없는 것이다.

“내가 오죽하면 이 밤중에 하연 씨를 불렀겠어요. 작곡가 지금 단단히 성났어요.”

실장이 정하연의 앞에 있는 서류를 톡톡 두드렸다. 정하연의 이름 아래 꽤 큰 돈의 금액이 적혀서 이제 사인만 하면 모든 게 끝이었다. 한쪽에서는 직원이 정하연이 직접 사인했다는 증거를 위해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촬영 중이었다.

“어서 찍어야 내일 아침 일찍 서류가 들어가고 돈이 나옵니다. 그래야 앨범이 나오는 것도 속도가 붙어요.”

실장의 재촉에 정하연의 시선이 다시 TV를 힐끔거렸다. 자신도 이번 계약을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대출받아서 재경이 앨범이 잘 되고 나면 정하연, 그녀도 그녀만의 앨범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니 재경을 설득해서 여기까지 왔다. 재경도 이제 말리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 마지막 약속을 지키고 싶은데 실장의 눈치가 보였다. 이러다 재경의 앨범마저도 손 떼겠다고 할 것 같아서 중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엉덩이만 들썩였다.

“어?”

그때 정하연이 TV에 나오는 재경의 모습을 발견하며 아들을 가리켰다. 그에 실장이 마땅찮은 시선이 정하연의 손가락을 따라갔다.

“재경이만 보고 나서 도장 찍어도 될까요?”

“뭐, 그러든지요.”

제 아들이 무대에 올라가서 노래를 부르는 걸 봐야 이 계약도 놓치면 안 되는 걸 알겠지. 그래야 자기도 마음 편하게 대출을 받고 정하연을 떼어낼 수 있고 말이다.

속마음을 감춘 채 정하연에게 배려라도 하듯 TV를 보았다. 예전에 보았던 그 맹랑한 얼굴을 보자 실장이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정하연을 만난 건 우연이었다. 밤중에 무대를 올라가는 가수들을 대상으로 사기를 치다가 걸려서 몸을 숨기던 곳에서 정하연을 발견했으니.

손님이라고는 죄 노인들뿐인 망해 가는 나이트에서 노래를 부르는 정하연을 본 실장은 마지막으로 한몫 챙길 생각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지 그녀에게 연습생 아들이 있다며 알아서 불어오는 게 아닌가?

아들 팔아먹는데 정신이 팔린 여자를 발견해서 손쉽게 돈을 빼 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들이 걸림돌일 줄이야. 저놈이 내빼지만 않았어도 벌써 대출을 받고 날랐을 텐데 지지부진하게 끌고 오는 덕분에 애먼 사무실 임대료만 나가고 있었다.

정하연이 TV에 빠져들듯 집중하고 있는 동안 실장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숨기며 제 손톱을 매만졌다. 그래도 완전 수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알아서 간판을 보고 기어들어 온 애새끼 하나가 계약서에 사인하게 되면서 초조했던 마음에 약간의 너그러움이 생겨났다.

실장이 손톱에 낀 때를 빼가며 바람을 불어대는 동안 정하연은 재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저번 주에 제 노래를 하게 되었다는 걸 알고 많이 놀랐었는데 오늘은 잘하면 무대에 올라가는 것까지 볼 수 있었다.

모두에게 잊힌 제 노래가 몇 번이나 반복되어 나오니 정하연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별’이라는 제목을 따라 완전히 지워졌던 그녀의 이름마저 언급되고 있었다.

그건 실장도 비슷한 생각인지 원곡자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좋아하는 그녀를 보고 별말없이 있었다. 어차피 사인만 하면 내일 아침 자신들은 여기 없을 테니까.

“이제 하네요.”

무대에 올라가는 걸 본 실장이 지겹다는 티를 숨기지 못한 채 심드렁히 말을 뱉었다. 저거만 끝나면 정하연이 사인하고 모든 게 끝이 난다.

실장이 한 발 물러나고 정하연은 잔잔하게 반주가 깔려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재경이 나오는 걸 보려고 하다 보니 이제 제법 익숙해진 얼굴들이 보였다. 다섯 명이 주르륵 늘어선 뒤로 별을 배경으로 한 무대가 정하연의 마음을 둔중하게 울렸다.

처음 마이크를 입에 댄 건 이정우, 재경의 옆에 항상 붙어 있던 그 아이였다. 내심 반가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정우의 잔잔한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세상이 너를 비추던 날이 있었지

그 빛을 받아 네가 세상에 나왔을 때

한순간 어둠이 너를 감싼 거야

다음으로 마이크를 쥔 아이가 특유의 높고 맑은 목소리로 희망에 가까운 노래를 불렀다. 자기 혼자서 부르던 노래를 나눠 부르면서 한 곡 안에 다채로운 느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하연은 제 노래면서도 제 노래 같지 않은 느낌을 받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서서히 감정이 고조되어가는 노래에 맞춰 정하연의 속눈썹도 파르르 떨려왔다. 다른 목소리를 듣는 것에 집중하다보니 노래에 깔린 전반적인 감정이 이제야 느껴지고 있었다. 그리고 정하연이 살짝 감았던 눈을 뜨자마자 TV속 재경과 눈이 마주친 기분이 들었다.

완연한 고음으로 흘러들어가는 재경은 온 힘을 다해 노래를 불렀다.

네가 품은 그 별은 너만을 위한 별이야

너를 사랑해주고

너를 아낌없이 품어줄 거야

재경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 정하연은 숨도 쉴 수 없었다. 제게 눈을 마주친 듯 바라보며 노래를 부르는 아이의 목소리가 정하연의 심장을 따뜻하게 감싸주고 있었다. 자신을 위로하는 듯한 목소리. 모두가 외면한 자신을 끝까지 사랑해줄거라는 재경의 위로가 정하연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노래가 끝날 때 정하연의 얼굴은 온통 눈물에 흠뻑 젖어있었다. 제 노래를 다섯 아이가 불러주는 것도 감동이었지만 특히나 재경이 노래를 부를 땐 자신을 위로하는 것만 같았다. 가슴이 먹먹하고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손으로 닦아내도 얼굴이 다시 눈물로 젖어들자 정하연은 아예 고개를 푹 숙이고 흐느꼈다.

“감동한 건 알겠는데 이걸 마무리해야죠. 곧 있으면 날이 바뀌어요. 여기서 밤샐 겁니까?”

실장이 정하연의 어깨를 마지못한 듯 두드리며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 줬으니 이제 자기 차례였다. 빨리 사인을 하라는 말을 건네며 직원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직원이 아까보다 더 카메라를 들이밀어 정하연이 사인하는 것을 잘 찍으려 대비했다.

그러나 정하연은 좀처럼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다. 실장이 그녀의 어깨를 흔드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재경이 주는 여운에 빠져 있었다.

그동안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다. 잘 나갈 것만 같은 그녀의 인생에 구름이 드리우고부터 하루도 숨통이 트이는 날이 없었다. 고작 가수가 뭐라고 노래가 뭐라고. 그래도 재경이 제게 별이 되어 길을 비춰 줄 걸 믿고 또 여기까지 버텨 왔다.

‘재경이가 데뷔하면 그다음 내게도 기회가 생기겠지.’

그때가 되면 모든 게 다 괜찮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지금… 재경의 노래에 정하연의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던 자신을 지켜보고 위로하는 느낌을 받으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세상에 버려진 것만 같았던 정하연을 아주 어린 날 제 손을 잡아 오던 꼬물거리던 작은 손의 아이가, 이제 다 커져서도 자신의 손을 놓지 못하던 아이가 제 마음을 녹여 주었다.

“실장님…….”

한참의 시간을 들여 마음을 정리한 정하연이 서류를 앞으로 밀어냈다.

“저 사인 못 하겠어요.”

“이제와서 갑자기 왜 그럽니까?”

“재경이가 싫어했어요.”

실장이 이 무슨 개소리인가, 싶은 얼굴로 정하연을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실장님이랑 계약하는 거 재경이가 싫어했어요. 그런데 제 욕심에 이걸 하겠다고 했어요.”

“그거야 재경 군이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런 거죠. 요즘 나 아니면 누가 아무것도 없는 신인 솔로로 앨범을 내 준다고 합니까? 아이돌이 대세인 이 판에서요. 네? 그리고 잊었어요? 하연 씨 앨범도 걸려 있습니다.”

실장이 서류를 탕탕 내리치며 큰소리쳤다. 여기까지 기다리면서 쓴 돈이 얼만데, 정하연이 마지막에 제대로 똥을 뿌리고 있었다.

“제 욕심이었어요. 재경이는… 재경인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어 하는 아이인데.”

원하지도 않는 가수를 시키려 여기저기 소속사에 들이밀었다. 그때도 싫다 소리 한 번 하지 않은 아이가 이번에 처음으로 싫다고 했는데 그걸 엄마가 되어서 이해 못 하고 소리치고 화만 냈다.

“저 이제 재경이가 하라는 대로 할래요. 재경이가 가수 안 하겠다고 하면… 그러라고 할래요.”

“정하연 씨! 이 무슨…….”

실장이 기가 막혀서 정하연을 향해 막 손을 뻗을 때였다. 사무실 문이 쾅 열리며 체격 좋은 남자들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왔다.

“장대구 씨 맞습니까?”

“당신들 누구요. 누군데 이렇게 남의 사무실에 허락 없이…….”

들이닥친 남자 중 한 사람이 순식간에 실장에게로 다가와 팔을 붙잡아 제압했다.

“장대구 씨, 당신을 사기죄로 체포합니다.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고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지금부터 하는 모든 말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순순히 따라오는 게 좋을 겁니다. 이미 증거는 다 있고 당신을 고소한 사람도 있으니 빠져나갈 생각 마세요.”

“누가! 누가 날 고소해.”

“여기서 며칠 전에 사인했다고 하는데 기억 안 나나 봅니다.”

“뭐?”

실장이 벌컥 화를 내며 남자에게 붙잡힌 팔을 뿌리치려 온몸을 비틀었다. 그러다 남자의 비웃음 섞인 한마디에 반항하던 것도 멈추고 되묻고 말았다. 그사이 더욱 옴짝달싹 못 하게 잡혔지만.

그리고 직원은 얼떨결에 이 모든 과정을 핸드폰으로 찍고 있었다.

“자료 수집에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도 함께 서에 가 주셔야겠습니다.”

그 핸드폰을 압수한 다른 남자가 직원의 팔을 붙잡았다. 만약 반항할 시 수갑을 사용하겠다는 무언의 협박에 직원은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도 같이 서에 가 주셔야겠습니다.”

막 사인을 하려던 것까지 본 것인지, 함께 온 또 다른 남자가 정하연에게는 다소 부드럽게 말했다. 피해자가 될 뻔한 입구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다니 제법 운이 좋다는 눈빛을 보내면서.

“이번에 사기당한 아이가 아주머니를 살려 줬네요.”

“대체 누구신데…….”

남자는 씨익 웃으며 재킷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하연에게 보여 주었다.

“형사… 님?”

정하연의 시선이 남자에게 고정되었다.

“그 아이도 사기당했을 때 어쩔 줄 몰랐는데 다행히 큰 엔터에 들어가면서 고소할 용기를 얻었다고 하더군요. 엔터에서도 아이를 위해서 이것저것 많이 준비해 준 모양이고요.”

“사기…….”

“저자, 사기꾼입니다. 전과 4범이고요.”

정하연은 재경이 악을 지르며 했던 말을 그대로 떠올렸다. 사기꾼이라고, 제게 대출을 받아서 돈을 빼내려고 한다는……. 차마 인정할 수 없었던 그 말이 전부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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