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생방송으로 가기 전 마지막 라운드 무대였다. 녹화로 진행되지만 시청자 투표와 더불어 얼마 남지 않은 생방송을 위해서 스태프의 움직임이 일사불란했다. 무대 뒤편 자재가 모여 있는 곳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재경이 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진동이 울리면서 상단에 어디냐고 물어오는 메시지를 가볍게 살핀 후 연락처로 들어간 재경이 고민에 찬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한번 감을 잡은 이후로 연습은 순풍을 단 듯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남들보다 늦어진 만큼 하준의 리드에 따라 더욱 연습에 박차를 가하면서 남은 시간을 쪼개다시피 살았다. 목을 혹사시키지 않는 한도 안에서 연습에 매진하고 리허설까지 끝내고 나니 마지막 본무대만 남았다.
그 과정에서 재경은 최대한 제 상황을 전부 잊으려 노력했다. 자신을 둘러싼 소문부터 시작해서 엄마의 계약, 빚 모든 것을 잊고 연습에 매달렸다.
그리고 지금 홀로 나온 재경은 몇 번이나 핸드폰을 엄지로 쓸어내리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자신이 생각한 대로 밀고 나간다면 어떤 결과가 있을지, 만약 그 결과가 최악으로 치닫는 건 아닌지.
한 번 회귀했다고 또 회귀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는 지금, 재경의 인생을 두고 마지막 도박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선뜻 머릿속에 있는 걸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그렇게 머뭇거리다가 또 다 망칠래.”
핸드폰의 검은 화면에 비친 자신을 보며 재경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이제 물러날 때가 없잖아.”
지금까지 재경은 할 만큼 했다. 이번 무대를 끝으로 오디션에서 떨어질 수도 있고 정우가 자신한 대로 다음 생방송으로 갈 수도 있다.
몇 번이나 자신을 다잡은 재경은 마지막 심호흡을 한 후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몇 번의 신호음 끝에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에 재경은 잠시 목이 멘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재경이 전화한 걸 알기에 엄마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더라고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 할 말이 뭔데 그래.
결국 엄마가 한마디를 더 던지고 난 후에야 재경이 긴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 계약.”
엄마는 계약을 하겠다고 했었으니 당장 도장을 찍었을 수도 있지만…….
“벌써 했어?”
-그거 물어보려고 전화한 거야?
“대답 먼저 해 줘. 계약했어? 대출… 받았어?”
재경의 재차 물어보는 말에 엄마는 잠깐 생각하는 듯 말이 없었다. 그녀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계약을 한 쪽으로 추가 기울어지면서 재경의 마음도 무거워지고 있었다.
- 아직. 곧 할 거야.
아직이라는 간단한 대답에 재경의 얼굴에 환해졌다. 곧 할 거라는 말보단 지금 당장 하지 않은 게 중요했다.
“그러면 잠깐만 기다려 줘.”
- 그게 무슨 소리니?
“하지 말라고 안 할게.”
지금껏 반대만 해오던 재경이 말을 바꿔오자 엄마의 놀란 숨소리가 전화기 너머 들려왔다.
“대신 지금 말고 나 이번 무대 한 거, 그거만 보고 해.”
- 이번 무대?
“응. 아직 방송에 안 나갔잖아.”
재경이 달력을 보며 시간을 가늠해보았다. 지금 각자 연습하는 모습이 나오고 있으니 지금 무대에 올라가는 건 다음 주나 다다음 주쯤에 나갈 것 같았다.
“그거 보고 나서 계약해.”
그땐 재경도 더 말리지 않겠다는 말에 엄마가 잠시 침묵했다. 이제 엄마가 원하는 대로 따르겠다는 뜻을 내비치자 머리끝까지 차오르려던 화도 어설프게 재경을 설득시켜 보려던 말도 전부 사라진 모양이었다.
- 그럴래?
대신 재경이 말을 잘 들을 때마다 들려주던 다정한 목소리로 제 마음을 표현했다. 재경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몇 번이나 당부했다. 그리고 엄마가 알겠다는 대답을 듣고 나서야 재경이 마음을 놓고 전화를 끊었다.
계약해도 된다는 말, 정말로 계약을 하겠다는 건 아니고 그저 엄마에게 이 무대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고도 계약을 하겠다면…….
재경이 숙였던 고개를 들자 누군가의 가슴이 보였다. 자기와 같은 옷을 입은 걸 확인하고 나니 이제 제법 익숙해진 향이 끼쳐왔다. 제 답답한 현실을 생각하다가도 이 향을 맡게 되면 자꾸 생각이 끊어졌다. 그런데 그게 찝찝함보다는 다른 곳으로 신경을 돌릴 수 있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너는 향수도 안 뿌려?”
정우에겐 늘 한결같은 냄새가 났었다. 섬유유연제 같기도 하고 아니면 옷에 향수를 뿌려서 은은하게 밴 거 같기도 했는데 언제부터인지 그 냄새가 익숙해져 있었다.
“향수 뿌려 봐야 카메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정우가 제 옷을 털어내며 독한 향이 싫다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긴, 머리를 매만진다고 쓰는 왁스나 스프레이만으로도 충분하다. 재경은 정우와 눈을 마주친 채로 핸드폰을 매만졌다. 엄마와 통화하는 걸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를 본 김에 할 말이 있었다.
“이거 끝나면 뭐 해?”
“너는?”
“나는… 별거 없지.”
오히려 오늘 엄마가 집에 있을까 봐 마주치기 곤란한 거 빼면 다른 일정은 없었다. 재경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 사이 정우의 입꼬리가 올라왔다 내려갔다.
“그럼 우리 집 가서 영화나 볼까?”
“영화?”
“응. 밤새 늘어지게 보다가 자자.”
정우의 제안에 재경은 기쁜 듯이 웃었다가 뒤늦게 표정을 수습했다. 그의 말을 기다렸던 것처럼 반응한 게 민망해서 재경은 괜히 제 목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는 척했다.
“계속 빌붙어있으면 네가 불편할 텐데…….”
“전혀 안 그러니까 오기나 해.”
정우가 재경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은 눈으로 바라보다 애먼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신경써서 만진 머리를 망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재경이 제 집에 오고 싶다는 표현에 기분이 좋은 정우는 연신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통화할 때만 해도 무겁기만 하던 재경이 이제 자신을 보면 편하게 말을 걸어오는 것도 좋았고 제게 기대는 것도 좋았다.
“대신 먼저 잠드는 사람이 내일 아침 차리기.”
“그 정도는 손님인 내가 해도 되는데.”
“그러면 재미없잖아.”
집주인이든 손님이든 벌칙처럼 아침을 차리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정우의 지론에 재경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있나 모르겠다. 어쨌든 난 승부욕이 강해서 지기는 싫다.”
어쩔 수 없이 아침을 얻어먹어야겠단 재경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정우가 눈을 마주치며 미소를 지었다.
“그거야 내일 아침에 보면 알겠지.”
승부욕이라면 만만치 않게 강한 정우가 웃으면서 재경의 도발을 받아들였다.
“곧 우리 차례네. 가자.”
멀리서 자신들을 찾는게 분명한 하준을 발견하고 정우가 재경의 팔을 잡아당겼다. 재경이 순순히 따라와 옆에 섰다.
“그러네, 가자.”
* * *
무대에 올라가기 전 동그랗게 모여들면서 재경은 천천히 팀원을 돌아보았다. 리더인 하준을 시작으로 건후, 태연, 정우까지.
회귀하기 전엔 매일 함께하던 멤버들과 다시 모이게 되어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다시 23살, 24살의 자신이 된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때와 달라진 분위기가 지금 재경이 19살이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서로를 향한 신뢰의 눈빛, 그리고 같이 잘해 보자는 응원의 느낌이 재경을 생소하게 감싸왔다.
“나 지금 떠오르는 생각 그대로 말해도 돼?”
재경처럼 팀원을 둘러보던 하준이 대뜸 말을 꺼냈다. 주변에 있는 카메라도 신경 쓰지 않고 더욱 양옆에 있는 건후와 태연을 끌어안았다. 옆에 있다는 이유로 갇힌 건후가 왜 그러냔 불편한 시선을 보내는데도 하준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이대로 데뷔하고 싶다. 오늘이 우리가 함께 서는 첫 무대가 되었으면 좋겠어.”
재경은 순간 하준이 자신처럼 미래에서 왔나 싶은 엉뚱한 생각에 미소 지었다.
‘아니다. 그러면 굳이 저런 말을 하지도 않겠네.’
미래에 다섯 명이 한 그룹이었다는 걸 알았을 테니. 그래도 하준의 바람이 너무 뜬금없고 또 아예 생뚱맞은 말이 아니라는 게 재밌었다. 재경이 저 혼자만 아는 비밀에 웃고 있으니 네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재경이 너, 무슨 생각 했어?”
“재경이 형이 하준이 형 비웃은 거죠. 갑자기 그런 느끼한 말을 하니까 사람이 안 웃고 배겨요?”
하준이 눈을 가늘게 뜨며 재경이 왜 갑자기 웃었는지 심문하자 태연이 끼어들어 장난쳤다. 하준이 정말 그러나며 재경을 재촉할 때도 태연의 깐죽거림에 어느 순간 응원의 분위기가 흐지부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표정이 무거운 사람이 없었다. 재경조차 연습하면서 맞춰본 합을 떠올리며 마음을 놓았다. 항상 혼자 연습하다가 만났던 그런 과거와 달랐다.
그때도 이렇게 함께 연습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아쉬움도 잠시 지금 만족스러움이 더 컸다.
‘이게 진짜야.’
눈으로 보이고 느껴지는 이 모든 순간을 현실로 받아들인 재경이 익숙하게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젠 말하지 않아도 제 옆에 있는 정우가 재경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왜?’
‘고마워서.’
눈으로 보내는 인사라 정우가 알아들을지 모르겠지만 재경은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았다. 늘 옆에 있어 주고 뒤를 받쳐주는 정우의 존재가 더할 나위 없이 든든했다.
‘나중에 꼭 갚을게.’
언젠가 그에게 은혜를 갚을 수 있길 바라며 재경은 마이크를 쥔 손에 힘을 줬다. 이제 무대에 오를 시간이었다. 오로지 한 사람을 생각하며 부를 노래 가사가 재경의 마음을 휘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