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밤중에 갑자기 뜬 이름에 재경의 엄지가 허공에 떠서 움직이질 않았다. 엄마에게 잔뜩 화를 내고 난 후라 어떻게 할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엄마가 사과하려고 전화했나?’
하지만 그날 엄마도 많이 기분 나빠 보이긴 했는데. 점점 엄지손가락이 무겁게 느껴지며 내려가더니 핸드폰의 화면에 톡 닿았을 때 거짓말처럼 진동이 멈췄다.
전화가 끊긴 걸 확인한 재경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전화를 끊은 게 아니니 자는 줄 알겠지. 그러나 다시 진동이 울리며 엄마의 이름이 뜬 순간 재경은 아까처럼 바라만 보기 힘들어졌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계속 받을 때까지 울리지 않을 것이다. 재경이 통화버튼을 밀자 화면이 변했다. 상단에 통화가 시작된 초가 올라가는 걸 보다가 어색하게 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 바쁘니?
“…아니요.”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어오는 엄마의 목소리에 재경은 베개에 상체를 기댔다. 단단한 헤드에 뒤통수를 댄 재경은 엄마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이불을 매만졌다.
- 이번 달 이자를 안 냈던데 혹시 잊었어?
“아… 이번에 오디션을 하면서 알바를 못 했어. 이번달에 어려울 거 같은데 엄마가 어떻게 안 될까?”
재경이 뒤늦게 이자를 떠올렸다. 이전에야 통장에 남은 돈이 있어서 이자가 빠져나간 거 같은데 뭐, 빈 통장에 긁어갈 것도 없으니 연체가 되었겠지.
사기를 당하기 전이라 이자가 세진 않지만 매일 불규칙하게 일하는 엄마는 잊기 일쑤라 재경이 내곤 했었다. 그것도 오디션에 들어오면서 무너졌지만. 재경의 조심스러운 어조에 엄마의 낮은 한숨이 들려왔다. 엄마도 힘들구나.
-그래, 이번엔 내가 어떻게 내볼게. 그리고 재경아.
“응.”
실은 이자 같은 건 엄마가 감당해야지, 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 빚이 전부 제가 연습생으로 돌면서 생긴 것이라 무작정 밀어내기 애매했다. 그런데 엄마가 별말 없이 알겠다고 하니 재경이 더 어색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 그리고… 그 앨범은 그대로 진행하기로 했어.
다음달엔 어떻게 이자를 내야 하지, 생각하던 재경이 화들짝 놀라 핸드폰을 꼭 쥐었다.
뭐라고?
“엄마, 내가 말했잖아. 그거 아니라니까. 그 사람들 사기꾼이야. 엄마한테 투자 명목으로 대출 받으라고 할거야. 진짜라고.”
언제 멋쩍어하고 어색했는지 모르게 재경의 언성이 높아졌다. 침대에서 아예 상체를 일으키며 엄마에게 그때 했던 말을 다시 반복했다. 몇 번을 말해서라도 엄마가 좀 알아들었으면 하는 마음에. 그러나 재경의 답답한 마음을 알고도 엄마는 곧바로 반응하지 않았다.
- 나는 아니라고 믿어.
“왜 아니야. 솔직히 지금 엄마 제대로 된 직업도 없는데 대출이 나오는 게 말이 돼? 안되는데도 돈이 나온다는 건 잘 생각해봐야지.”
재경은 대출을 받으라고 할거다 하는데도 엄마는 부정하기보다 침묵을 택했다.
‘어?’
재경이 이상한 걸 깨달았다. 사기꾼이라고 할 때 듣는 척도 안하던 엄마가 이상하게 반응이 작았다. 대출도 지금 처음 말한 거 같은데 엄마의 반응이 너무 미적지근했다. 대출이라니 그런 거 아니라고 해야 하는 건데.
“엄마 설마… 벌써 대출받았어?”
- 아니. 아니야.
긴장해서 물어봤던 재경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곧 다시 바짝 몸을 긴장시켰다.
“그럼 대출 권유 받은거야?”
-재경아.
“아, 엄마. 제발 그러지마. 그 강을 건너면 안 돼.”
재경이 마른 세수를 하며 엄마를 말렸다. 나중에 걷잡을 수 없이 커진 빚을 감당할 순 없었다. 자신은 아직 오디션에 참가하고 있는데 그자들이 대출을 먼저 요구할 줄이야.
재경이 앞으로 엎어지며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숨이 막혀오고 앞이 깜깜한 게 제 미래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자기가 오디션에 참가하는 게 아니라 엄마를 어디 못 가게 붙잡았어야 했다. 그런 재경을 보고 있기라도 한 듯 엄마가 몇 번 숨을 내쉬는가 싶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 네 앨범이 잘되면 그 다음에 엄마 앨범을 내준대.
“…….”
- 네가 가수가 되면 나도 다시 가수가 될 수 있대.
엄마의 목소리에는 재경을 향한 미안함, 그러면서도 자신의 꿈을 포기하기 힘든 절실함이 느껴졌다.
- 그 사람들이 사기꾼이 아니라고 믿어야지. 안 그러면 나는 다시 무대에 설 수 없는데. 재경아…… 네가 엄마 별이잖아. 응?
역시나 엄마는 가수가 노래 따라간다는 그 말을 믿고 있었구나. 이번에 별을 두고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모를 엄마의 속마음이었다.
- 듣고 있니? 재경아, 엄마 앞으로 대출을 받을 거니까 나중에 너한테 아무 피해 없도록 할게.
엄마는 혹시나 재경이 말한 대로 사기꾼이라면 자기 혼자 짐을 떠안고 가겠다며 걱정 말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전화를 끊을 때까지 몇 번이나 미안하다고 말했다. 해준 게 없어서 미안하다고 했고 아직도 미련한 꿈을 꾸고 있어 미안하다고 했고 죽기 전에 딱 한 번만 제대로 무대를 서고 싶어서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통화가 끊어지고 한참을 재경은 이불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빨리 자야 내일 목 컨디션이 좋을텐데… 아니면 엄마한테 전화해서 그 대출 받지 말라고 말려야 하는데. 이도저도 해결되지 못한 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게 지금 재경의 처지였다.
이제 정말 방법이 없는걸까?
* * *
아침에 일어났을 때 먼저 씻고 나온 정우가 곧장 재경의 침대로 다가갔다. 어젯밤 방에 들어왔을 때 재경이 잠이 들어있었고 딱히 악몽을 꾸는 거 같지 않아 정우는 자신의 침대에서 잤다. 그런데 지금 가까이 다가가서 본 재경은 숙면을 취한 얼굴이 아니었다.
“재경아.”
정우가 재경의 어깨를 살살 흔들어 그를 깨웠다. 몇 번 인상을 찡그리던 재경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몽롱한 초점이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던 정우는 재경이 눈을 비비며 상체를 일으키는 것까지 보다가 그에게 손을 뻗었다.
“눈이 빨개.”
정우가 재경의 눈가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방금 일어나서 눈이 빨간 게 아닌가 싶지만 눈가까지 온통 붉었다. 재경이 정우가 만진 자리를 쓱쓱 매만졌다.
“비벼서 그러겠지.”
방금 비빈 걸 보지 않았냐면서 재경이 눈을 깜박거렸다.
“운 건 아니지?”
“왜 울어. 내가 울 일이 뭐가 있다고.”
재경은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정우의 손을 밀어냈다. 제 상태가 이상하다는 건 자신도 알았다. 그래도 더는 언급 안 했으면 하는 모양이라 눈치껏 정우가 입을 다물었다.
“연습할 수 있겠어?”
“괜찮아.”
재경은 깨워 줘서 고맙다고 말하고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굼뜬 듯 느릿한 행동은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모양인지 불안한 걸음걸이로 용케 넘어지지 않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평소보다 가라앉아 보이는 재경의 모습에 정우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직도 어떻게 별을 부를지 몰라 고민하는 거라고 생각하기엔 유난히 안 좋아 보이는데.’
정우는 재경이 자주 입던 트레이닝 복을 꺼내 놓고 그 역시도 나갈 준비를 했다.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말리고 있자니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재경이 나왔다.
“너…….”
화장실에 들어갈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이는 상태에 정우가 성큼 재경에게 다가갔다.
“진짜 괜찮은 거야?”
“음… 괜찮아져야지.”
아까보다는 약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재경은 정우가 꺼내놓은 옷을 갈아입고 또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면서 다른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저 간간이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또 시계를 보는 등 바쁘게 주변을 돌아보기만 했다.
“정우야.”
그러다 막 방을 나서기 전에 재경이 손잡이를 잡은 채로 정우를 불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어두운 재경의 눈동자가 정우를 향했다.
“나한테 아직 기회가 있을까?”
밤새 고민하던 많은 생각. 아직 오디션이 끝나지 않았고 이것으로 사기꾼에게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얄팍한 기대는 이제 버렸다. 엄마가 그 대출을 받겠다고 한다면 재경은 이 오디션에서 최종 데뷔까지 가야만 그나마 빚을 갚을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예전엔 탈락을 목표로 달려 왔다고 한다면, 지금부터는 합격을 생각하고 달려야 했다. 그러나 이번에 아슬아슬하게 통과한 자신이 앞으로 남은 두 번의 합격을 쥘 수 있을까.
그 불안감이 곧 무력함으로 변해 재경의 몸을 꽁꽁 에워싸기 시작했다. 온몸이 잡혀 버리기 전에 재경은 동아줄이라도 되듯 정우를 바라보았다.
재경의 물음에 그의 생각이 바뀐 걸 안 정우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것 때문에 생각이 많았나. 정우는 손잡이를 잡은 재경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쳤다. 제 온기를 느끼길 바라며 힘을 준 정우가 재경을 보고 단단한 어투로 말했다.
“잘될 거야. 나랑 내기해도 좋아.”
아니면 진짜 내기할까? 정우의 기분 좋은 듯 휘어지는 눈매를 본 재경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그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았다.
분명 막연하고 아득해야 할 미래인데 정우의 말한마디에 한줄기 희망을 얻었다. 정우라고 뭐 미래를 알겠냐만은 이상하게 그의 말대로 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재경은 무력함에 잡아먹히기 전 겨우 쓰러지지 않을 힘을 되찾았다.
정우는 재경의 우울한 마음을 달래주려 그의 손을 토닥이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할 수 있다는 듯 힘을 실어주는 그의 위로에 재경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해 보자.”
어차피 더 물러날 곳도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