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정우는 연습하던 와중에 온 전화에 잠시 밖으로 나왔다. 꼭 받아야 하는 전화라 주변에 카메라가 있는 곳을 확인하고는 적당히 자리를 잡자마자 통화를 연결했다.
“여보세요.”
상대방이 말하는 것을 들으며 정우는 간간이 대답만 이어갔다. 벽에 기댄 채 연습을 끝낸 연습생이 지나가기도 하고 스태프가 돌아다니는 걸 보며 대답하던 정우의 시선이 한곳에 고정되었다.
연습실에서 나오는 재경이었다. 평소와 똑같이 말이 없고 무심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평소보다 힘이 없는 걸음걸이나 어딘가 복잡해 보이는 마음이 고스란히 정우의 눈에 잡혔다. 한 사람만 계속 바라본다는 걸 원래는 잘 몰랐다. 딱히 관심가는 사람이 없었고 그저 아버지를 따라 재능이 있는 연습생을 눈여겨보는 정도였다.
그 중에서는 하준처럼 열심히 하고 또 친해지고 싶은 사람도 있었지만 재경은 달랐다. 알면 알수록 더 알고 싶었고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았다. 재경의 재능이 먼저 눈에 띄어서 그를 보기 시작했다면 이제는 그냥 숨쉬듯 자연스럽게 재경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재경의 무심한 얼굴에서도 다양한 감정에 따른 작은 차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 재경은 별 노래를 두고 아직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상태였다. 정우는 저만치로 걸어가는 재경을 보다가 핸드폰 너머 상대방에게 대답했다.
“네, 부탁드릴게요.”
통화를 끝낸 정우는 연습실이 아닌 재경이 있는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어디를 가는 건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재경의 뒤를 따라갔다. 이제 정우는 재경이 그렇게 실력이 좋은 이유도 알았고 그의 가족관계도 엿보았다. 오디션에 참가한 이유까지 알게 되는 그 시간은 정우의 마음이 재경에게 열리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으니까 재경의 옆에 있으려고 했던 마음 뒤로 남들과 조금 달랐던 마음. 정우는 재경과 단순히 아이돌 멤버로만 얽히고 싶은 게 아니라 그와 더 깊은 관계를 만들고 싶었다.
그런 마음을 알게 된 건 얼마되지 않았다. 재경이 무심코 던진 돌이 마음의 호수를 건드리면서 수면 아래 감춰진 것의 존재를 깨달았다.
“서재경.”
정우는 그것을 꺼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재경을 좋아하는 마음. 그것을 숨기려고 하는 노력조차 필요없었다. 좋아하는 걸 안다고 해서 지금과 완전히 달라지는 건 아니기 때문에.
정우의 목소리를 들은 재경의 등이 멈칫했다. 그러고는 좌우를 둘러보는 게 자신을 부른 사람을 찾아다녔다.
“재경아.”
정우가 다시 한번 재경을 불렀다. 나를 돌아봐주면서 작은 미소라도 지어준다면 정우는 흔쾌히 재경을 향한 마음을 키울 작정이었다.
뒤를 돌아보는 재경이 자신을 부른 게 정우라는 걸 알자마자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왜 따라왔냐는 듯 한껏 귀찮은 표정에 정우가 당황했다. 미소를 바란 걸 알기라도 한건지 저렇게 불퉁하게 바라볼 건 없지 않나 싶었다. 마치 제 마음을 키우지 말라고 대답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인지 정우는 재경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오디션의 반이 지나가고 나서야 제 마음을 알았는데 막상 재경이 다가오지 못하게 한다면 가지 말아야 했다.
“연습 안 하고 뭐해.”
재경은 그런 정우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어서 제 옆으로 오라는 신호에 정우가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그냥 네가 보여서 따라왔는데.”
“그게 뭐냐. 아무튼 연습시간이나 잘 지키자.”
그렇게 말하는 재경이야말로 연습실과 반대방향으로 향하면서 전혀 개의치 않아하고 있었다.
“너는 어디가는데?”
“나 가위바위보 져서 음료수 사러 가는데 같이 가자.”
정우의 물음에 순순히 대답하던 재경이 돌연 가자미눈으로 정우를 노려보았다.
“내가 설마 너처럼 연습 빼먹을까 봐?”
“그럴 수도 있지.”
“하긴 지금 어떻게 노래를 불러야 할지 감이 안 오네.”
나만의 별, 나만의 별을 중얼거리는 재경이 두 손을 깍지껴 제 머리를 받쳤다.
“그래서 잠시 머리를 식히면서 생각해 보려고.”
이미 회의는 마쳤고 어떤 콘셉트로 노래를 부를지도 정했지만 재경도 거기에 저만의 감정을 담아내야만 했다. 하준이 각자 마음에 하나씩 별을 품으라고 하면서 누군가를 위로해 주는 노래를 부르자고 했기에 재경의 과제는 두 개로 늘어난 셈이었다.
“너는 누가 별인데?”
답답한 마음에 고개를 뒤로 젖히기도 하고 이리저리 기지개를 켜는 재경이 정우에게 물었다. 정우의 대답에서 혹시나 힌트를 얻으면 좋겠다는 듯 눈을 빛내왔다.
“나는…….”
재경이 바라보는 시선이 짙어질수록 정우의 말끝이 흐려졌다. 하준이 별을 정하라고 하는 순간 자신은 고민할 것도 없이 한 사람을 정했다. 원래도 재경을 생각하면서 노래를 불렀기 때문에 그에게 별은 서재경이었다.
정우는 재경을 위로해주고 싶었고 보듬어주고 싶었다. 부모님에게 사랑받지 못한 외로움을 자신이 채워주고 싶었는데 그런 마음을 재경에게 곧이곧대로 드러내기가 어려웠다.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재경은 상관없다는 듯 정우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받은 현금을 주섬주섬 꺼내 자판기에 밀어 넣었다.
“너는 이미 어떻게 부를지 정한 거 같은데 괜히 물어봤네.”
재경은 정우가 불렀던 별을 떠올리기라도 했는데 고개를 주억거리며 중얼거렸다.
“내가 부른 별은 어땠는데?”
“음…….”
이렇게 둘이 있는 자리가 없어서 물어보지 못했었다. 재경은 잠시 정우의 물음에 생각하는가 싶더니 제 솔직한 마음을 드러냈다.
“슬펐는데 좋았어.”
정우의 노래는 유난히 슬프게 들렸다면서 재경이 하나하나 버튼을 누르며 대답했다. 재경을 생각하고 부른 노래인데 슬프게 들렸다니. 정우는 충동적으로 음료수를 꺼내려는 재경의 손을 잡았다. 재경이 왜 그러냐는 듯 정우를 올려다보면서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내가 부른 별은…….”
정우는 재경에게 전부 말할까 싶은 마음에 운을 띄웠다. 그러나 재경의 말간 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그 대신 음료수를 하나씩 꺼내 왔다.
“네가 별로 할 사람은 나였으면 좋겠다.”
품에 5개의 음료수를 든 정우가 그중 하나를 재경에게 건네며 간접접인 고백을 건넸다. 나는 이미 별이 넌데 이왕이면 너도 나였으면 좋겠다는.
“너는 노래까지 그러냐.”
그러나 원래부터 정우가 유난히 제게 잘 들러붙는 걸 생각한 재경이 가볍게 받아쳤다. 제 몫의 음료수를 정확하게 집어낸 걸 신기해하면서 재경이 등을 돌렸다.
“연습하러 가자.”
아직 복잡한 속을 정리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잠깐 나오니 한결 가벼운 표정으로 재경이 미소지었다. 그 미소를 본 정우가 어떤 다짐을 했는지도 모르고.
* * *
‘누구를 나만의 별로 삼으라는 걸까.’
재경에게는 하준이 준 과제가 세상 어려운 듯 끙끙거렸다. 자기 인생에서 가장 불쌍한 건 자긴데 대체 누구를 위로하라는 걸까?
아이돌을 할 때 가장 많은 악플을 받아봤고 온갖 루머에 시달렸으며 주변의 모두에게 외면당한 기억이 또렷하게 박혀있는 지금 자기보다 불쌍한 인간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제게 약 20억의 빚을 안긴 사기꾼이 불쌍할까, 아니면 자신을 J로 만든 기자가 불쌍할까.
“아무것도 안 떠올라.”
결국 답답한 마음에 재경이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벌써 연습은 시작되었고 앞으로 남은 시간은 5일밖에 없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재경이 감정을 잡지 못한다면 이 무대는 망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무엇하나 속 시원하게 생각나는 게 없었다. 노래를 부르다 보면 위로라는 큰 틀 안에 각자의 색이 묻어나오는 데 비해 아직 재경만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자연스레 그 모습이 카메라에 많이 잡히는 것도 재경의 심란함의 한 이유였다.
“우리 할머니?”
그나마 불쌍하다고 할 사람은 할머니였다. 자기 몸을 추스르기도 힘든 나이에 재경을 맡아주었던 할머니. 그 투박한 손으로 어린 재경을 키워내 주셨던 분은 제가 죽기 직전까지 자신이 아닌 재경만을 걱정하다 돌아가셨다.
할머니를 떠올린 재경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베개 위로 점점이 얼룩이 생겼다. 재경은 괜히 할머니를 떠올렸다며 코를 찡그렸다. 아직도 제게 있어 가장 많은 사랑을 준 사람이라고 한다면 할머니뿐인지라 마음이 메워지는 사람이었다.
“이건 위로가 안 되는데.”
재경이 제 눈물을 훔치며 할머니의 생각을 억지로 접었다. 노래를 부르다가 할머니를 떠올리다가 울어버리면 큰일이었다. 애써 올라온 감정을 누르고 있자니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진짜 정우로 할까.”
아까 정우가 자신을 별로 삼아 보라고 했던 말이 떠올라서 괜히 중얼거려 봤다. 그러다 곧 머리를 휘휘 저으며 말도 안 된다는 듯 단호하게 치워 버렸다.
‘앞으로 스타가 될 애를 왜 위로해 줘?’
하나둘 아는 사람을 밀어내고 있으니 남은 사람이 없었다.
“아, 정말…….”
답답한 마음에 재경이 다시금 베개에 얼굴을 묻고 발을 동동거렸다. 이대로 있다가 생각이 안 나면 하준에게 못하겠다고 말해야 할 지경이었다.
막 베개에서 고개를 들고 막혔던 숨을 몰아쉬던 재경이 진동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테이블에 올려 둔 핸드폰이 울리고 있었다.
딱히 알바 사장님이 아니면 연락 오는 곳이 없어 조용한 핸드폰이라 재경은 의아한 마음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상단에 뜬 시간을 확인하니 자정이 훌쩍 넘어갔다.
“이 시간에 누구야?”
재경은 밤중에 연락을 주는 사람이라니, 투덜거리며 수신인을 확인했다. 그리고 [엄마]라고 뜬 두 글자에 재경은 잔뜩 놀라서 굳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