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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아이돌-83화 (83/125)

83화

각자 개인 연습을 하고 만난 그들은 각자 한 번씩 불러본 후 파트를 나누기로 했다. 태연이 가장 먼저 가사지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먼저 할게.”

매도 가장 먼저 맞는 게 낫다고 다른 사람보다 먼저 하면 그나마 나을 거란 얄팍한 계산이었다. 그러나 가장 어리기도 한 태연이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서로 눈치를 보지 않아도 좋았다. “형 저 잘할 거 같죠?”

태연이 재경에게만 시선을 보내며 턱을 들었다. 지금껏 재경이 잘하는 걸 봤으니 자기도 뭔가 보여주고 싶은가 보다.

“태연아, 노래를 다 하고 나서 잘하냐고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오죽하면 하준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하지만 태연은 능청스럽게 웃었다.

“혹시나 아닐 수도 있으니까 이렇게 미리 물어본 거죠. 그럼 시작할게요.”

태연은 흠흠 목을 가다듬는 동안 건후가 음원을 틀어 주었다. 잔잔하게 깔리는 음원을 듣던 태연이 특유의 목소리로 편안하게 노래를 시작했다.

재경은 자신이 잘 아는 노래를 다른 사람이 부른다는 게 어색해서 멍하니 태연을 바라보았다. 어딘가 어설프기도 하고 또 낯설게 들려왔다. 이상하게 울렁거리는 가슴을 한 손으로 꾹 누르고 있자니 등 뒤로 정우의 손이 올라왔다.

재경은 그 온기에 정우 쪽으로 상체를 기울여 귓속말을 중얼거렸다.

“전혀 다른 노래 같아.”

늘 듣던 여자의 목소리가 아니기도 했지만 노래가 태연이 특유의 분위기가 묻어나오고 있어서 전혀 외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바로 옆에 짝사랑하는 소녀를 두고 고백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재경이 하는 말을 알아들었는지 정우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마주 끄덕여주었다.

“태연이가 부르면 모든 노래가 설레게 되지.”

“그러네.”

딱 그 나이대의 설렘을 담고 있으니 노래가 한결 밝아져서 듣기 편안해졌다. 어느새 노래가 끝나자 태연은 스스로도 만족스러운지 나름 귀여운 엔딩 포즈를 지었다. 그다음은 건후가 일어나더니 별말 없이 스스로 음원을 틀었다.

조금 전 태연과는 달리 중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뻗어 나오자 한순간 곡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재경은 아예 무릎을 끌어안은 채 턱을 기대고 건후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허스키한 목소리가 자아내는 노래에는 한 남자의 묵직한 마음이 담겨 왔다.

태연과 다르게 1절만 부른 건후가 머쓱하게 음원을 껐다.

“꼭 다 부를 필요는 없으니까 여기까지 해도 되지?”

건후는 부끄럽지 않은 듯 더 행동이 커진 채로 자리에 앉았지만 그의 귀가 새빨갛게 변해 있는 걸 본 모두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다음은 하준이 형.”

태연의 지목에 하준 역시 별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노래가 시작하기 전에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건후가 음원을 틀어버리는 바람에 놓치고 말았다. 할 말이 많던 것인지 아쉬운 표정을 지은 하준이 이내 노래에 집중했다.

그 노래를 듣는 재경의 귓가에 대고 정우가 작게 속삭였다.

“여전히 느끼하지?”

“응. 그런데 나쁘지 않네.”

재경은 처음에 하준이 보컬 트레이너에게 들었던 감상이 떠올라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어 웃음을 감췄다. 하준이 노래를 다 부르자 태연과 건후가 박수 치며 엄지를 추켜세웠다. 팀이 아니라 누구든 혼자 나가서 불러도 좋을 만큼 각자의 노래가 좋았다.

그다음으로 재경이 일어나려고 했지만 어깨를 누르는 힘이 살짝 느껴지더니, 옆에 있던 정우가 일어났다.

“내가 먼저 할게.”

정우가 자신을 바라보는 재경에게 마지막에 하라는 눈빛을 보내며 건후에게 음원을 틀 것을 부탁했다. 룸에 옹기종기 모여 있지만 애초에 여기서 연습을 진행할 거란 말에 모여든 카메라가 일제히 정우에게 집중되었다.

재경은 처음 웅크리고 앉은 자세 그대로 정우를 올려다보았다. 제게 새로운 노래라고 생각하라던 정우는 과연 어떻게 부를지 궁금했다.

정우는 가사지를 보는 그대로 천천히 입을 떼기 시작했다.

세상이 너를 비추던 날이 있었지

그 빛을 받아 네가 세상에 나왔을 때

한순간 어둠이 너를 감싼 거야

첫 구절을 시작하는 정우의 무거운 목소리에 순간 재경은 무릎 사이에 얼굴을 숨겼다. 아까는 웃음을 감추기 위해서였는데 지금은 완전히 다른 감정에 휩싸여서 그랬다. 이제 막 노래를 시작했는데 듣자마자 울컥 올라오는 감정이 있었다.

앞서 3번이나 들은 노래였는데 왜 이렇게 가슴이 먹먹한지 왜 이렇게 눈물이 날 것 같은지 몰랐다. 그저 담담한 정우의 목소리에 스며들어오는 노래가 재경의 심장을 쥐어짜고 있었다.

어쩌면 쓸쓸하고도 슬펐던 과거가 떠올라서 그런지 몰랐다. 재경은 어떻게든 끝까지 침착함을 유지하게 위해 마음을 다잡고 또 다잡았다.

‘뭐야.’

정우가 부르는 노래는 왜 저렇게 슬픈 건데. 아니… 정우는 그냥 담담하게 부르는데 나는 왜 이렇게 울컥하는 거지?

재경은 결국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고 난 후에야 남은 눈물을 집어넣을 수 있었다. 2절까지 부른 덕분에 감정을 추스를 수 있었다.

노래가 끝났을 때 재경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정우와 눈이 마주친 재경은 혹시나 제가 운 걸 들켰으나 싶었지만 아무 일도 없는 척 입을 꼭 다물었다.

“노래가 왜 이렇게 슬프지?”

정우가 재경에게 말을 걸려고 할 때 태연이 살짝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해왔다. 재경이 태연을 보니 눈물이 그렁그렁한 태연이 소매로 제 눈을 훔치고 있었다. 잊지 않고 훌쩍 코까지 빨아들이는 귀여운 모습에 모두가 귀엽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정작 태연은 제가 우는 모습이 카메라에 찍혔다고 종알거렸지만 분위기는 좋아지긴 했다.

“마지막으로 재경이 형.”

태연이 어서 제 운 모습을 감추려고 서둘러 재경을 끌어들였다. 정말 마지막 재경의 순서까지 길고도 짧은 시간이었다. 재경은 긴장된 숨을 고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우가 섰던 자리에서 선 재경은 태연처럼 무슨 말을 하기보단 눈을 감았다.

모든 걸 내려놓고 노래를 부르자.

다시 눈을 뜬 재경이 준비된 것을 안 건후가 마지막 음원을 틀었다. 익숙한 반주가 끝나고 재경이 노래를 시작했다.

세상이 너를 비추던 날이 있었지

그 빛을 받아 네가 세상에 나왔을 때

한순간 어둠이 너를 감싼 거야

어둡다고 두려워하지 마

슬퍼하지 마

네가 품은 그 별이 너를 비춰 줄 거야

네가 걸어가야 할 길을

네가 나아가야 할 길을

가사지를 보지 않고 노래를 부르는 재경은 최대한 제 감정을 담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 노래를 통해서 파트를 나눌 뿐이니 그저 노래를 온전히 익혔다는 것만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노래를 부르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저 음정에 맞춰 가사를 실어 보내기만 하면 되었다. 그렇게 1절만 부른 재경이 건후에게 음원을 꺼달라고 눈짓을 했다. 한참 재경을 바라보고 있던 건후가 뒤늦게 알고 음원을 끄면서 좌중에 고요한 침묵이 흘러 다녔다.

각자 생각에 빠진 듯 말이 없는 그들 사이로 재경은 엉거주춤 앉으면서 저도 모르게 정우를 먼저 보게 되었다. 말없이 가사지를 노려 보고 있는 정우가 제 시선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라 재경이 그의 팔을 툭툭 쳤다.

“별로였어?”

“음…….”

재경이 직접적으로 물어오는 말에 정우가 살짝 난감한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여전히 시선은 가사를 보고 있었는데 어딘가 심각해 보였다.

“살짝…….”

생각을 정리한 정우가 입을 열었는데 그걸 알아채지 못한 태연이 괴상한 신음과 함께 제 가슴을 쳤다.

“뭐지. 뭘까.”

재경이 태연을 보고 왜 그러냐는 듯 바로 보았다. 정우도 그렇고 태연까지 예상했던 반응은 아니었다. 그냥 잘 들었다, 이제 파트 나누자 할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다들 심각한지.

“그러니까 잘 모르겠어요.”

“몰라?”

재경의 되물음에 태연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네. 지금까지 형이 부른 노래는 다 좋았거든요? 슬픈 노래를 부르면 같이 슬프고 그랬는데 이건 뭔가 이상해요. 그냥 답답했어요.”

태연은 잠깐 재경의 눈치를 보는 것도 잠시 제 솔직한 마음을 드러냈다. 옆에서 건후와 하준도 비슷하다는 의견을 보이자 재경이 정우를 돌아보았다. 설마 너도 그러냐는 시선에 정우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너답지 않았어.”

나다운 건 뭘까.

재경이 잘 알아듣지 못하고 있자 정우가 가사지를 팔랑거렸다.

“태연이처럼 설레지도 건후처럼 묵직하지도 않았다고. 그냥 감정을 배제하고 노래를 불러서 무슨 노랜지 몰랐다는 소리야.”

“아…….”

재경이 아까 노래를 부르면서 감정을 덜어낸 걸 다들 느꼈구나.

“재경아.”

정우는 그런 재경의 표정을 살피면서도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이걸 새로운 노래라고 여기는 건 좋아. 좋은데 그렇다고 이 노래를 어떻게 부를 건지 감정이 없으면 되게 무미하지 않을까?”

정우는 재경이 알아듣길 바라며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그러니까 너만의 별을 만들어야지.”

그게 지금 재경에게 느끼는 아쉬움이었다. 각자 노래를 들어서 파트를 나눠보고자 했던 것에 하나의 문제가 추가되었다. 바로 재경의 무감정했던 노래.

“일단 파트부터 나누자. 이거 키를 그대로 가는 대신 재경이가 고음을 맡아야겠다. 다른 사람은 못 할 거 같기도 하고 또 무리해서 연습하다가 목이 나가면 안 되니까.”

하준의 빠른 정리에 재경은 다른 의견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는 차츰 나눠지는 파트 정리를 보기만 할 뿐 조금도 참여 의지를 보이지 못했다. 재경의 머릿속엔 온통 정우의 말만 떠다녔다.

나만의 별. 나만의…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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