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정우가 정말 싫다는 듯 진저리치는 모습에 재경이 웃음을 터트렸다. 제 말에 상상이라도 한 건지 툭 튀어나온 솔직한 반응에 잘생긴 얼굴이 한껏 구겨진 게 웃겼다. 그렇게 싫은가?
“나랑은 잘 잤으면서 뭘 그래.”
그게 뭐가 대수라고. 재경이 핫초코를 들이켜면서 정우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굴었다. 무심코 말을 던지고 돌아선 재경이 앞서 걸어가지만, 정우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정우는 제 손에 든 핫초코를 바라보면서 이상하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재경은 어제 악몽을 꿔서 같이 잤다고 하지만 한 침대에 있는 게 어색하지 않았다. 어제만이 아니라 자신의 집에 데려왔을 때도 재경과 같이 잤다. 그는 재경을 불편해하기는커녕 그가 자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었는데 그동안 그게 이상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재경을 더 알고 싶고 그와 가까이 지내고 싶다고만 여겼던 마음 어딘가에 숨겨졌던 다른 감정의 씨앗의 정체를 느끼기 시작했을 때,
“안 와?”
재경이 재촉에 정우는 억지로 생각을 누른 채 그를 따라갔다.
* * *
연습실로 바로 가려던 정우가 돌연 재경에게 룸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바람에 둘은 일찍 나온 게 무색하게 룸으로 돌아갔다.
“어서 와.”
하준이 재경과 정우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리더가 된 하준이 컨셉 회의를 열자며 룸으로 불러들였다. 다른 이들은 벌써 약간의 편곡과 함께 연습이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재경의 조는 아직 아무것도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연습실에 가지도 않고 룸에서 모이니 재경은 조금 의아해하던 참이었다.
“왜 연습실이 아니라 여기에서 회의를 해?”
“거기는 다른 애들이 들으니까.”
하나의 연습실에 한 팀만 있는 게 아니기도 하고 또 카메라에 컨셉 회의하는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서 그런다며 정우가 재경을 끌어당겼다. 틀린 말이 아니라 재경은 더 물어보지 않고 소파에 앉자 하준이 곧바로 회의을 시작했다.
“일단 이 노래를 어떤 컨셉으로 끌고 갈지 결정하고 연습실로 가자.”
태연이 태블릿의 화면을 의미 없이 톡톡 치면서 고민하다가 약간 모호하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이 노래를 댄스로 전환하기는 어려울 거 같아요.”
“밝은 댄스까지는 아니더라도 한국 무용을 이용하는 식은 가능하지.”
이어 건후가 온전히 댄스가 안 되는 것도 아니라며 하나의 방안을 내밀자 태연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하준은 그보다 중요한 게 있는지 둘의 의견에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재즈풍으로 부르든 댄스를 추가하는 것도 좋지만 당장 이 노래를 어떻게 해석할지가 중요해. 듣는 사람들을 생각해 봐야지.”
하준이 말한 컨셉이라는 게 곡 해석을 말하는 걸 알고 재경이 가사지를 들여다보았다. 엄마의 노래라서 지겹도록 들었던 곡이었다. 그런데 음정은 전부 빼고 시처럼 주룩 쓰인 가사를 읽고 있으니 느낌이 남달랐다. 생각해 보니 이렇게 본 적이 없었다. 가사를 읽으면서 무언가 잡힐 듯 말 듯한 느낌에 초조함을 느끼면서 재경은 괜스레 제 옷깃을 당기며 가사지를 읽었다.
“그런데 이거 가사가 되게 좋네요.”
재경처럼 가사지만을 보던 태연이 불쑥 제 감상을 내뱉었다. 노래를 들을 때야 음이 먼저 들려오니 가사를 먼저 보지 않았었기에 뒤늦게 알게 된 모양이었다. 재경이 태연에게 조금 더 자세히 설명했으면 하는 눈빛으로 보았다.
“네가 품은 그 별이 너를 비춰 줄 거라는 가사가 좋아서요. 별이라는 게 어떻게 생각하냐에 따라 다르잖아요. 좋아하는 아이돌이 별이 될 수도 있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별일 수도 있고.”
태연의 설명에 재경이 다시 가사지를 보았다.
[네가 품은 그 별이 너를 비춰 줄 거야
네가 걸어가야 할 길을
네가 나아가야 할 길을
네가 품은 그 별은 너만을 위한 별이야
너를 사랑해 주고
너를 아낌없이 품어 줄 거야
네가 품은 그 별을 꼭 잡아
세상이 너를 외면한데도
그 별이 널 밝게 비쳐 줄 거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가사가 좋아.”
하준이 같은 생각인지 종이를 팔랑거렸다. 처음부터 가사를 눈여겨봤는지 하준이 곧바로 가사를 톡톡 두드렸다.
“그래서 이 가사에 맞게 컨셉을 만들어 보는 게 좋겠는데 다들 어때?”
“형 처음부터 생각이 있었네요.”
태연이 그럼 그냥 말하지 뭐 이야기를 해보자고 그랬냐며 구시렁거리고 있는 사이 건후가 제 머리를 받친 채 천장을 보았다.
“그런데 이 가수는 지금 뭐하고 있을까?”
“뭐? 갑자기 가수는 왜?”
태연이 건후의 엉뚱한 말에 곧바로 꼬리를 잡았다.
“아니 그냥, 가수가 노래 따라간다고 하니까 자기만의 별을 발견했나? 했지.”
“그게 뭐야. 그리고 노래 제목 아냐?”
“그거나 그거나. 별을 따라간다고 해석하면 되잖아.”
건후과 태연의 툭탁거리는 대화를 듣던 재경은 홀린 듯 다시 가사지를 보았다. 노래를 따라간다는 말. 설마 별이라는 게…….
‘아니야.’
재경은 제 생각을 부정하며 다시 가사지를 들었다. 별이라는 게 자신을 뜻하는 건 아니겠지. 지금껏 자기를 가수로 밀어붙이려는 게 이 노래 때문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미 재경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계속 가사를 읽고 또 읽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하준의 말이 들리지 않는 재경을 정우가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래서… 우리 이번에 춤 없이 가는 건 어때?”
“형, 그냥 생각하는 걸 다 말해봐요.”
하준이 또 의견을 내뱉자 태연이 아예 다 말해 보라고 재촉했다. 그냥 한 번에 말하면 좋을 것을. 그러자 하준이 기다렸다는 듯 말하기 시작했다.
“이 가사를 살리는 쪽으로 가자. 배경은 우주, 그러니까 별이 가득한 배경으로 가고 노래에 힘을 실어보자. 별은… 언제나 제 옆에 있는 존재는 어때? 늘 옆에 있어서 소중한지 몰랐던 그런 상대 말이야.”
하준의 설명이 이어지면서 모두가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태연과 건후는 나쁘지 않은 생각인지 표정이 좋아지고 있었다.
“그러려면 노래를 엄청 잘해야겠지? 어때? 할 수 있겠어?”
“할 수 있냐고 물어보면서 왜 날 봐요?”
태연이 하준과 정통으로 눈이 마주친 게 불만인 듯 툴툴거렸다. 랩이 전문인 건후보다 불안한 게 태연인 걸 대놓고 하준이 티 내고 있었다.
“연습 많이 하다가 혹시라도 목 나가면 안 된다.”
“형은 내가 어린애로 보여요?”
“16살이면 어린이지.”
“이잇.”
태연이 억울한 듯 하준을 불퉁하게 노려보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른 손으로는 손바닥 가득 건후의 모자를 쥐고 말이다. 옷이 잡아당겨지자 건후가 뭐냐는 눈으로 태연을 보았다. 그러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태연을 따라 일어났다.
“그럼 노래부터 익히고 올게. 그리고 여기서 다시 만나.”
하준은 얼마든지 그러라며 건후와 태연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정우와 재경을 두고 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편곡 쪽으로 조금 더 알아보고 올게. 둘도 연습하고 있어.”
정우가 까닥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한 하준이 룸을 나갔다. 애초에 연습실에서 만날 필요가 없다는 게 이거였다. 춤이 아닌 노래 연습이고 개인적으로 먼저 연습할 테니까.
하준마저 사라지자 정우는 재경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재경이 흠칫 놀라서 고개를 들어 정우를 보다가 이내 주변을 돌아보았다. 방금까지 북적거린 거 같은데 어느새 세 사람이 사라졌다.
“다들 어디 갔어?”
“태연이랑 건후는 연습하러 갔고 하준이 형은 편곡 쪽으로 알아본대.”
재경이 다른 생각에 빠져 있다는 걸 알았는지 정우는 순순히 다른 사람들이 없어진 이유를 알려 주었다. 실상 재경의 반응을 계속 살피고 있었기에 그가 어느 순간부터 생각에 빠졌던 걸 눈치채고 있었다.
“우리도 이 노래 연습해보라고 하는데 할 거야?”
“나는…….”
재경이 잠시 가사지를 내려다보았다. 분명 눈감고도 부를 수 있는 노래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완전 처음 보는 노래를 보는 것만 같았다.
“모르겠어. 당장 노래를 부르라고 하면 부를 수 있겠지만 또 못할 거 같아.”
재경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당장 연습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정우가 제 상태를 눈치챈 것 같으니 재경은 솔직한 마음을 드러냈다.
“노래가 너무 낯설어. 내가 아는 별은 그냥… 엄마 노래였는데 왜 이리 이상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어.”
엄마의 노래를 가지고 누군가와 이렇게 대화를 나눈 것도 처음이었다. 재경은 별이라는 제목마저도 단어가 낯설게 느껴져서 괜히 손가락으로 그것을 빙글빙글 돌려봤다.
재경은 제가 느끼는 대로 말했기에 정우가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더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없어 가만히 있는데 정우가 재경의 속을 어루만지는 말을 건네 왔다.
“지금까지 하나의 노래를 편곡하고 그에 따라서 새로운 안무를 만들고… 그래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니 서재경.”
정우는 재경의 어깨를 꼭 쥐었다. 그의 강한 악력에 재경이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엄마의 노래라는 생각은 거기서 멈춰. 지금 너는 오디션을 하는 중이잖아. 그러니까 이걸 완전히 새로운 노래라고 생각해.”
이 노래에 가진 편견을 버릴 수도 있도록 정우는 재경을 향해 강하고 단호하게 짚었다.
“네가 이 노래를 택했을 때의 생각은 버려.”
재경이 너만의 해석을 덧붙인 완전한 새 노래를 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