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우리 결정했어.”
회의가 끝났는지 재경을 바라보는 시선과 함께 카메라까지 가까이 다가왔다. 재경 역시 하준에게 걸어가면서 제법 길었던 회의의 결과가 궁금했다.
네 사람이 선택했던 곡을 하는 게 가장 무난할 텐데 뭐가 그리 긴 고민을 했는지.
“네가 선택한 곡으로 갈 거야.”
“…네?”
재경이 잘못 들었나 싶어 하준을 보았다. 그러자 하준은 그렇게 결정한 건후와 태연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잘 아는 곡으로 하는 거 좀 치사하잖아.”
건후는 꼭 재경 때문이 아니라는 듯 헛기침을 하며 다른 곡을 선택한 이유를 들먹였고 태연은 헤실헤실 웃으며 재경에게 달라붙었다.
“새로운 멤버가 왔으니까 새로운 마음으로 해야죠.”
결국 한 사람을 위해 네 사람이 선택을 바꾼 것과 같게 되었다. 그래서 재경은 얼떨떨한 눈으로 태연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정말 괜찮아. 차라리 모두 아는 곡으로 가는 게 더 연습하기에도 좋고…….”
“그건 재미없으니까요. 솔직히 재경이 형이랑 새롭게 무대 꾸며가는 게 기대되기도 하고.”
태연의 긍정적인 에너지에 휘말린 재경은 다시 생각해 보라는 말도 꺼내지 못하고 어안이 벙벙해져 있었다. 분명 노래를 선택할 때만 해도 그 혼자 있었는데 마지막에 선택된 곡은 이게 되었다.
“잠깐만, 다시 잘 생각해서…….”
“그럼 두 노래를 다 보고 나서 이야기하는 게 어때?”
재경이 태연을 달래려고 말을 꺼낼 때였다. 정우가 태블릿을 가지고 와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정말 절묘하게 말을 잘라버리는 바람에 재경은 뒤의 말을 잇지도 못하고 그대로 끌려갔다.
첫 번째는 네 사람이 선택한 ‘별’이었다. 보이그룹의 곡으로 청량한 분위기의 소년 같은 곡이었다. 듣고 있자니 이 곡으로 간다면 분위기도 잘 살릴 수 있을 것 같았고 무엇보다 각자의 매력이 돋보이도록 편곡을 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걸 선택했구나, 재경이 집중해서 바라보고 있는 사이 노래가 끝났고 정우는 곧바로 다음 곡을 틀었다. 똑같은 ‘별’이지만 20년 전 한 여가수가 부른 곡으로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곡이었다.
“저 태어나기 전에 나온 노래네요.”
태연이 노래가 발표된 날짜를 보고 하는 말에 재경이 피식 웃었다. 태연만이 아니라 자신도 태어나기 전에 나온 노래다. 이 노래를 부를 때의 엄마는 꽃다운 나이의 아가씨였으니까.
“두 노래 분위기가 확실히 다르긴 하네요.”
태연이 턱을 쓰다듬으며 신중하게 두 노래를 비교해 보았다.
“이 별을 선택하면 연습이 수월하긴 할 거 같은데 다른 별은 일단 어떤 콘셉트로 갈지부터 정해야 해요. 이 여가수처럼 우리가 나란히 서서 불러도 좋을 거 같고 아니면… 흠.”
이제야말로 진지하게 두 곡을 비교하고 어느 곡이 나을지 선택하는 대화에 재경이 한시름 마음을 놓았다. 자기 때문에 억지로 다른 곡을 선택하는 것만 같아서 불편했었기 때문에.
“곡 해석을 잘못하면 이건 정말 답이 없지.”
건후가 냉정하게 정하연의 별을 지적했다. 당장 요즘 감성에 맞게 부르기도 해야 하지만 어설프게 부르다가는 이도저도 안 될 것을 집었다. 하준도 비슷한 생각인지 두 영상을 다시 틀어보며 고민했다.
그들 사이에서 재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도 오디션에 더 잘 맞는 노래가 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엄마의 노래를 선택한 이상 조용히 있는 게 가장 좋을 거 같았다.
그리고 이제껏 빤히 영상을 보던 정우가 무슨 생각인지 재경과 영상 속 여자를 번갈아 보았다. 재경이 눈치채지 못하게 은밀하게 보긴 했지만 정우의 매서운 눈빛이 정하연을 파헤치고 있었다.
분명 어디서 본 듯한 얼굴. 이상하게 재경을 떠올리게 하는 얼굴. 정우는 점점 곡보다 정하연이라는 여자의 모습에 집중해서 바라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재경을 따라갔다가 본 여자가 떠올랐다. 분명 이 영상의 여자와 똑같진 않았지만 묘하게 비슷한 얼굴이었다.
정우는 혹시나 재경과 정하연이라는 여자의 관계를 짚어보기만 할 뿐 언급하진 않았다. 그 혼자만의 추측으로 조용히 따져볼 뿐.
“정우 네 생각은 어때?”
“나는…….”
아까와 다르게 정우가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혹시나 정하연이라는 가수가 자기가 생각하는 그 사람이 맞다면 과연 이 곡을 하는 게 맞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럼 다수결로 하자.”
하준이 가장 평화로운 방법을 제시하면서 원점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재경의 의견까지 얹어서 더 나은 곡을 선택하기로 했다.
“곡이 나온 순서대로 하자. 정하연의 ‘별’을 하고 싶은 사람?”
하준이 손을 들라는 식으로 제 손을 들어 시범을 보였다. 그를 따라 태연과 건후가 손을 들었다. 재경은 차마 손을 들지 못했고 정우 역시 생각에 잠겨 있어서 반응하지 않았다.
“그럼 결정이네. 이 곡으로.”
“어? 두 사람이 손들었는데?”
재경이 건후와 태연을 가리키자 하준이 제 손을 흔들었다.
“나도 들고 있잖아.”
이렇게 손들라고 하는 건 줄 알았는데 그도 의견을 낸거 였다.
“과반수가 결정했으니 이 곡으로 선택. 땅땅땅.”
더는 고민하지 말자는 하준의 깔끔한 정리에 태연과 건후는 곧바로 영상을 재생시켜 노래를 익혀갔다.
“역시 도전하는 의미가 있어야지. 어려울수록 더욱 투지가 불타올라.”
건후가 정하연의 별을 택한 이유였다.
“노래 선택했으니까 나가자. 아직 미션 안 끝났대.”
하준이 스태프에게 곡이 결정되었음을 알리면서 카메라도 분분히 움직였다. 곡을 선택하는 과정을 다 찍었으니 이제 철수하는 모양이었다. 고정 거치로 설치했던 카메라마저 다 옮기자 어느새 연습실이 텅 비게 되었다.
하준이 먼저 나가고 태연과 건후가 나갔을 때 재경 역시 그들을 따라 걸어갔다. 엄마의 곡이 선택됐다는 이후로 재경은 혼란스러운 감정을 정리하기 힘들어 입을 다물고 있었다. 다른 이에게 맞춰줄 상황이 되지 않아 가만히 있었지만 다행히 재경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이 없었다.
“잠깐만.”
재경이 막 연습실을 나가려고 할 때였다. 정우가 재경의 팔목을 잡아 나가지 못하게 막는 동시에 문을 닫아버렸다.
밖에서 왜 문을 닫냐는 소리가 들렸지만 정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재경을 바라보았다.
“왜?”
정우의 심각한 표정에 재경이 긴장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정하연이라는 가수.”
정하연이라는 이름이 나왔을 때 재경의 심장이 덜컥거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설마 정우가 뭘 알아챈 걸까?
“너도 아는 사람이지?”
정우는 간접적으로 돌려 물었다. 정하연이라는 가수가 혹시 네 엄마가 아니냐는 질문이 아니었는데도 재경은 정우가 다 알고 물어보는 것만 같았다.
재경은 정우의 시선을 피해 한참을 아래를 훑어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얘는 왜 이런 질문을 할까. 남들처럼 그저 두 곡을 두고 선택하기만 하면 되지 얘는 왜 정하연이라는 가수를 짚고 넘어올까.
“왜?”
“네가 아는 사람 같아서. 맞아?”
정우는 다시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제 질문에 재경이 상처받지 않으면서도 그 사람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만약에 재경의 엄마가 맞다면. 그래서 재경이 제 엄마의 곡을 선택한 거라면. 자신의 집에서 나눴던 재경의 사정을 떠올리며 정우는 묵묵히 대답을 기다렸다.
“맞아. 날 외롭게 했던 사람.”
재경은 정우가 응시하는 시선 속에서 묵묵히 버티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왜 얘는 이리 제 속을 파헤치지 못해서 안달인 건지. 재경은 결국 정우에게 솔직하게 말하고 말았다.
제 대답에 정우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할 때 재경은 그에게 잡힌 팔을 빼냈다. 여기서 더 해 줄 말은 없었다.
“나가자.”
재경이 먼저 문을 열고 나가니 아직 가지 않고 기다린 태연이 반겨주었다. 둘이서만 무슨 이야기를 했냐고 징징거리는 태연을 달래는 척 걸어가는 재경은 자꾸 정우에게 들켜버리는 게 너무도 쓰디쓰게 다가왔다.
* * *
서서히 잠에서 깨는 재경은 밤새 제 몸이 무겁게 느껴지던 이유를 생각해봤다. 어제 최PD로부터 4곡을 선택한 연습생들을 위한 스위트홈을 배정받았고 재경은 그를 포함해 다섯 명과 한 방이 되었다. 한 방이라고는 해도 스위트홈이라 나눠진 방이 두 개 있었고 그중 한 침대에서 잠이 들었던 거 같은데…….
‘가위라도 눌리나?’
어젯밤까지만 해도 엄마의 노래를 하게 됐다는 것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이게 정말 맞는지 지금이라도 바꿔야 하는 건 아닌지. 엄마는 왜 그 노래를 하다가 사라지게 되었는지 생각하다가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는데 제 몸을 누르는 무게가 제법 안정감을 주어 깊게 잘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가위에 눌린 건 아닌 거 같은데 여전히 몸이 무거웠다. 결국 재경은 끙끙거리다가 눈을 떴고 제 허리를 두르는 팔을 발견했다.
“뭐야.”
가위가 아니라 진짜 무거운 거였다. 허리를 가로지르는 팔은 물론 다리를 누르는 다리에 등까지 완전히 덮였으니 그렇게 느낄 수밖에.
재경이 황당해서 고개를 돌려보니 제 등에 얼굴을 박고 자는 익숙한 놈이 있었다.
“이정우. 너 왜 여기서 자냐.”
재경은 한숨을 내쉬며 이정우에게서 멀어지려고 그의 팔을 들었다. 그러나 들린 팔이 뱀처럼 스륵 재경의 손을 빠져나가더니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조금만 더 자자.”
“비켜라.”
“조금만…….”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정우가 재경에게 움직이지 말라는 듯 더욱 그를 압박했다. 덕분에 잠깐 숨이 막힌 재경이 황당한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며 발버둥을 쳤다.
“대체 왜 여기서 자냐고.”
“…까 봐.”
“뭐?”
작게 웅얼거리는 통에 들리지 않아서 재경이 다시 묻자 정우가 고개를 들어 또박또박 말했다.
“너 외로울까 봐.”
“…뭐래.”
설마 어제 엄마에 대해 물었을 때 외롭게 했던 사람이라고 대답했던 것 때문은…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