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아이돌-78화 (78/125)

78화

재경이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진정시키기 위해 눈을 꾹 감았다. 눈가가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걸 느끼면서도 가만히 숨을 쉬는 것 정도로는 바닥에 무너지지 않게 참는 게 고작이었다.

이 모든 건 하나의 곡과 원곡자의 이름을 보고 난 후부터였다.

‘왜 여기에 엄마의 이름이…….’

재경은 엄마가 옛날에 가수였다는 걸 조금도 내비친 적이 없었다. 특히나 지금껏 모든 방송을 본 건 아니지만 제작진은 연습생의 개인 사생활로 서사를 만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정말 우연으로 나온 노래겠지만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끝이 떨려왔다.

“이제 선택해야 해요.”

따라온 작가의 속삭임에 재경은 다른 곡을 선택하려고 등을 돌렸다. 엄마의 이름에 당황한 건 당황한 거고 재경은 지금 오디션을 치르는 중이었다. 그러니 적당히 마음에 드는 곡을 선택해야 하는…….

“서재경 연습생?”

작가의 부름을 듣지 못했는지 재경은 제 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른 곡을 선택하려면 가야 하는데 발에 본드라도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왜 이러는 거야.’

머리로는 이 노래가 아니라 다른 걸 선택해야 한다는 걸 아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재경은 한숨이 나오는 걸 참으려 제 이마를 거칠게 비볐다.

엄마의 이름을 본 순간부터 머리와 가슴이 따로 놀았다. 이성적으로는 지금 당장 움직이라고 명령하고 있지만 가슴이 꿈쩍하지 않았다.

“그렇게 고민돼요?”

작가의 웃음 섞인 물음이 재경이가 무엇을 선택할지 잔뜩 고민하는 모습으로 비쳤나 보다. 재경은 여기서 더 시간을 끌면 이상해질 걸 알기에 이제 선택해야 할 것을 깨달았다.

한 번 더 다른 곡을 향해 돌아봤지만 그쪽으로 몸이 움직이지 않으니 결국 재경은 엄마의 이름이 적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에 고정된 카메라 외에 따로 재경을 찍는 카메라는 없었다. 다음 연습생이 선택하는 걸 찍어야 하기 때문에 상주하는 스태프 두엇만이 남아 있었다. 재경은 태연한 척 연습실의 중간에 털썩 앉았다.

“안녕하세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넨 재경은 억지로 지은 미소 안에 한숨을 감췄다. 카메라에 제 반응이 잡히지 않게 가만히 있지만 속은 전쟁이라도 난 듯 시끄러웠다.

그렇게 싫어했으면서. 엄마가 다시 가수가 되겠다고 자신을 몰아세우는 걸 끔찍해했으면서. 이제껏 엄마의 보살핌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했으면서 뭐가 좋다고 엄마의 곡을 선택한 건지.

진짜 자신은 멍청하고 답답한 놈이었다. 제 사정을 아는 이라면 전부 모자라다고 혀를 끌끌 찰 것만 같았다.

그런 선택을 했다. 누구의 재촉도 없이 저 혼자 못난 선택을.

“어? 누가 오나 보다.”

재경이 혼자만의 괴로움에 빠져 몸부림칠 동안 바깥에 귀를 기울이던 스태프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그제야 상념에서 빠져나온 재경이 문을 바라보았다. 스태프와 대화를 하는지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오더니 멀어졌다. 그리고 선택이 끝났다는 스태프의 설명에 재경은 문에서 고개를 돌렸다.

이 노래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노래가 잘 됐다고 들었지만 그래봐야 2개월 반짝였다가 사라진 노래였다.

이후로 몇 번 더 문밖에서 소리가 들렸지만, 누구도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았다. 모든 선택이 끝났다고 스태프가 말해오고 나서야 재경은 힘없는 웃음을 흘렸다. 정하연이라는 가수가 부른 노래는 연습생에게조차 외면당하고 말았다.

오히려 그게 재경의 무거운 마음을 한결 덜어주었다. 자신의 못난 모습도 있지만 이젠 엄마도 더는 가수에 목을 매지 않아도 된다는 게 이걸 통해서 알 수 있을 거 같았다.

‘이제 엄마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어.’

그러니까 엄마도 그만 마음을 접었으면 했다. 그럼 엄마와 재경 둘이서 정말 평범하게 노래가 아닌 다른 일을 평생 하다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될 것이다.

재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건너가면 될까요?”

같은 제목을 선택하는 인원은 있고 재경이 있는 곳에는 아무도 없을 테니 전부 저 연습실에 있겠다. 모두가 움직이는 것보다 재경 혼자 가는 게 훨씬 간단하니 스태프도 별말 없이 고개만 끄덕여주었다.

곡을 선택할 때만 해도 발이 움직이지 않았는데 막상 건너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 몸이 홀가분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엄마의 이름에서 벗어나는 건 생각보다 쉬웠다.

*  *  *

문을 열자마자 보인 낯익은 얼굴에 재경이 놀란 제 입을 막았다. 분명 개인으로 선택했을 거고 또 어떤 곡이 있는지 미리 알 수 있는 게 아닌데 연습실에는 기가 막히게 JT 연습생 4명이 도란도란 앉아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보다 못한 재경의 물음에 하준이 일단 들어오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재경은 방금까지 자신을 괴롭히던 엄마의 노래도 잊고 하준과 정우 사이에 들어와 앉았다.

“어떻게 이렇게 네 명이 있게 된 거야?”

하준부터 건후, 태연, 정우까지 이렇게 모이라고 해도 모이기 힘든 조합이었다. 워낙 전부 모여서 같은 팀을 해 본 적이 없었기에 재경의 물음에 서로를 보며 웃었다.

“소속사의 힘이랄까?”

하준의 의미심장한 말에 재경이 설마, 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대형기획사이기 때문에 어떤 곡인지 미리 알고 있었다는 뜻일까? 그러면 카메라가 있는 곳에서 더 말하면 안 될 거 같은데 싶은 불안감을 건후가 다독여주었다.

“형, 일부러 예고편 노려?”

거, 사기꾼 스킬 쓰지 맙시다. 건후의 타박에 하준이 찔린 듯 혀를 쏙 내밀었다.

“틀린 말은 아니잖아.”

“누가 들으면 우리가 곡명을 미리 알고 여기 들어온 줄 알잖아.”

일부러 노리고 한 말에 건후가 가차 없이 하준의 말을 눌러버렸다. 그리고는 재경에게 오해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건 아니고 이거 우리가 소속사에서 데뷔조 결정하는 평가 때 했었던 곡이야.”

“정확히는 건후 형이랑 제가 이 노래로 데뷔조로 들어갔죠. 하준이 형이랑 정우 형은 아니고.”

재경이 정우를 바라보았다. 정우는 깔끔하게 제 상황을 전했다.

“난 선택할 게 없었어.”

아까 미니게임에서 당당히 꼴찌를 한 덕분에 남은 노래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결국 하준만 머리를 써서 이 노래를 선택했고 다른 사람들은 그저 어쩌다 보니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소리였다.

“자, 우리가 모인 이유는 다 설명이 됐고 이제 곡을 선택해야 하잖아.”

하준이 재빨리 상황을 정리했다. 아마도 건후와 태연이 이 곡을 선택했을 걸 알고 온 만큼 빨리 다음 화제로 넘겨 버리려는 모양이었다. 하준의 말에 재경이 곧바로 제가 말할 차례라는 걸 알았다.

“이 노래로 해요.”

“그래도 돼? 너는 저 노래가 마음에 들었을 거 아니야.”

“그냥… 그냥 선택했어요.”

재경은 살짝 말끝을 흐렸다가 곧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저는 혼자였으니까 이 곡을 하는 게 더 낫잖아요.”

쉽게 생각하자는 의미로 재경이 다시금 말을 덧붙였다.

“이 곡으로 가요.”

아까 엄마의 이름을 보고 움직이지 못했던 건 아예 잊어버린 것처럼 굴었다.

“잠깐 회의 좀 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조금만 기다려 줄래?”

하준이 양해를 구하자 재경은 곧바로 연습실의 한쪽에 가서 앉았다. 손에는 두 곡의 영상이 담긴 태블릿이 들려 있었지만, 딱히 그것을 바라볼 생각이 없었다.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서 그런지 아까처럼 땅을 파고들 만큼 우울하진 않았다.

이게 뭐 대수라고. 엄마의 이름을 본 건 그냥 해프닝으로 넘길 만한 일이다. 어차피 방송을 통해 엄마가 가수에 대한 미련을 놓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하나씩 생각을 정리하게 되니 이젠 속이 막연히 시끄럽지만은 않았다.

어쩌다 저렇게 JT로 4명이 모였나 싶은 어이없는 상황이 제 새까맣던 마음을 흐트러뜨려 준 덕이기도 했다. 다시 혼자가 된다면 또 온갖 상념에 사로잡히겠지만 지금만큼은 그리 많이 괴롭진 않았다. 재경은 벽에 등을 기댄 채 머리를 맞댄 연습생들을 바라보았다.

“재경이가 왜 저렇게 바라보지?”

“자기 곡 해달라는 거 아닐까요?”

“아까 이거 해도 된다고 그랬잖아.”

하준의 물음에 태연과 건후가 순서대로 대답했다. 재경은 아무 의미 없이 바라본 것에 불과하지만 세 사람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근데 솔직히 재경이 형 많이 실망했겠어요.”

태연이 재경의 입장에서 속상했을 부분을 짚었다.

“저랑 건후 형이야 이 곡을 선택한 이유가 뻔하지만 하준이 형이랑 정우 형은 그것도 아니잖아요. 저 방으로 갔어도 됐는데 꼭 여기를 와서 재경이 형이 자기 혼자라는 거 알고 얼마나 마음이 그랬겠어요.”

태연의 말이 이어질수록 하준과 정우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준은 정말로 건후와 태연이 이 곡을 선택했을 거란 확신에 들어왔을 거고 정우는 아무 생각 없이 선택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재경이 혼자 있었던 걸 생각하면 조금 미안해지긴 했다.

“선택이야 자유니까. 어쨌든 지금은 곡을 선택하는 회의잖아.”

하준이 태연의 원망을 살짝 누르며 어떻게 할 거냐는 듯 다른 멤버들을 돌아보았다. 그에 건후는 어깨를 으쓱였고 정우는 이제껏 늘 그랬듯 예상 가능한 답을 전해왔다.

“재경이 따라가자.”

“응, 넌 그럴 줄 알았어.”

하준이 놀랍지도 않은 듯 정우를 보았고 건후와 태연은 정말 어떤 곡을 선택할지 신중하게 고민했다. 노래를 잘 알고 있어 어떤 방식으로든 편곡에 자신 있는 것을 할건지 아니면 전혀 모르는 노래를 선택할지 두 사람에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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