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아이돌-75화 (75/125)

75화

발표식을 위해 모여드는 연습생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느껴졌다. 매 라운드를 거치면서 이제 탈락하는 멤버가 더 적어졌다고 하지만 남은 인원 역시 많지는 않은 상황. 이제부터 9명씩 탈락하게 된다는 걸 들은 만큼 자신의 운명을 점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것도 순위가 높지 않은 연습생들의 경우에는 더더욱. 30위권 밖의 연습생들은 지난번 한 자리 순위에 오른 연습생을 부러워했다. 이번에 큰 변동이 없다면 이번에도 수월하게 합격하고 파이널 생방송까지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이래서 처음에 PD가 순위를 밝히지 않으면서 했던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깊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처음 1라운드를 제외하고 순위가 나온 순간부터 연습생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무형의 벽이 생기고 있었다.

계속 높은 등수를 얻어가는 연습생은 은근히 제가 데뷔한 후를 상상하지만 그렇지 못한 연습생들은 우울함과 긴장, 걱정을 부여잡으며 매 라운드를 버텨 내야만 했다.

재경이 들어오자 낯익은 사람들이 인사를 건네왔다. 재경이 적당히 인사를 받으며 빈자리에 앉았다. 아직 주변에 누가 앉지 않아 휑하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만 있는 재경을 향해 카메라가 비치기를 반복하는 그때, 누군가 재경의 앞에 멈춰 섰다. 재경이 고개를 들어 올리기도 전 남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너 진짜 아무것도 안 했더라.”

이번 재경을 둘러싼 논란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것을 올린 건 전상국이지만 혹시나 어떻게 반박할지 몰라서 기다렸지만, 재경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굴었다. 오히려 크게 불거지지 않은 이정우의 논란에만 소속사에서 강경하게 나왔다.

이정우를 끌어내리는 건 실패했지만 처음 목표였던 서재경을 건드렸다는 것만으로도 전상국은 만족했다. 그는 SNS에서 불씨처럼 번지는 재경의 소문을 읽으면서 기분 좋게 아침을 맞을 수 있었다.

“그러게 너도 번듯한 소속사 하나 잡고 왔어야지. 아… 아니다. 네가 갈 데가 어딨냐. 다 한 번씩은 들렀을 텐데. 그렇지?”

전상국은 재경이 개인 연습생으로 들어온 게 제가 만든 악의적인 소문을 가라앉히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생각하니 재경에게 카운터라도 먹인 듯해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

“잘 가라.”

카메라를 등진 전상국이 재경을 향해 비릿하게 웃었다. 그렇게 전상국이 지나가 버렸지만, 혼자 남은 재경은 여전히 처음과 같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재경은 누구를 보고 말을 걸지도 그렇다고 카메라를 의식하지도 않았다. 그저 인형처럼 가만히 있기만 했다.

하지만 재경의 머릿속은 바쁘게 움직였다. 재경은 며칠 전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하준이 정우의 집으로 찾아온 그 날이었다.

“예전에 재경이 너에 대해 알아본 적이 있었거든.”

하준이 따로 알아보려고 했다는 말에 재경이 놀란 감정을 드러냈다. 그저 오디션에서 보는 것으로도 모자라 따로 알아봤다니?

“정우가 너를 궁금해했었어. 그래서 오디션에 들어가기 전에 따로 커뮤니티에 물어봤었지. 생각 외로 널 아는 애가 많더라.”

그때 하준은 재경의 이야기를 몇 개 들었다. 왜 제게 말해 주지 않았냐고 투덜거리는 정우를 무시한 채 하준이 계속 말했다.

“다들 널 생각하는 이미지는 비슷했어. 조용히 와서 연습만 하고 가는 애. 그런데 실력도 좋아서 데뷔하지 않을까 싶었던 애.”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하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건 재경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도 모르는 제 이야기라니. 여러 기획사를 돌아다니기는 했지만 누구와도 친하게 지내지 못했다. 그저 그림자처럼 있다가 나올 때가 많았는데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는 게 의외였다.

“그리고 질투를 많이 받기도 했던 애.”

하준이 이게 가장 중요한 거라고 강조했다.

“누구랑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잘 아는 애가 많더라고. 너 전상국이랑 사이 안 좋았다며?”

“…….”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름에 재경이 헛숨을 들이켰다.

“오랜만에 만났고 사이도 안 좋았고. 마침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들어보니 널 모함하던 내용이랑 비슷하기도 하고. 그래서 더 파달라고 부탁했어.”

“그걸… 왜, 아니 어떻게. 그러니까.”

재경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더듬거렸다. 전상국과 자신의 일을 누군가 기억하고 있을 줄 몰랐다. 그래서 하준이 전상국을 입에 담았을 때부터 재경의 머릿속이 잔뜩 엉켜 버렸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해야하는 건지 아무 생각도 안 났다.

“조금씩 나오고 있다고 하니까 일단 기다려 봐. 그리고 만약 필요하다면…….”

거기까지 말한 하준은 정우에게 팔이 잡히자 뒷말을 잇지 못했다. 정우와 무언의 눈빛을 주고받은 하준이 못 말린다는 듯 웃더니 재경의 어깨를 무겁게 눌렀다.

“그러니까 너는 순위가 떨어지더라도 붙어만 있으면 돼. 그러면 다음은 쉬워질 거야.”

하준은 재경이 이번만 버틸 수 있다면 최종까지도 갈 수 있을 거라 확신하는 듯했다.

어디까지나 이번 라운드를 통과해야 한다는 조건  에서일 테지만

상념에서 빠져나온 재경은 무대에 마련한 합격자석을 보았다. 하준은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결과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잘될 거야, 같은 희망은 지금 상황에서 마음을 달래주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떨어질 경우는 생각하지 말자며 긍정 회로를 돌리는 하준과 달리 재경은 제 사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았다.

실은 정우가 데뷔하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는 말에 혹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정우가 말한 대로 빚을 지지 않을 수 있고 계약 기간이 끝났을 때 안정적인 생활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게 재경의 마음을 많이 흔들었다.

“기대하지 않을래.”

그러나 어디까지나 잘 될 때의 이야기였다. 재경이 조용히 제 진심을 내보였다. 이번에 떨어져도 괜찮았다. 여기까지 버틴 게 신기했고 이제는 오디션으로 도망치는 게 아니라 엄마와 똑바로 마주하고 싸워야만 했다.

어느새 빈자리가 다 차고 재경은 제 옆에 낯선 연습생들이 자리한 걸 보았다. 늘 옆에 앉지 못해 안달이던 정우는 처음으로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막 하준과 귓속말을 나누던 정우가 무심코 고개를 돌리면서 그를 보던 재경과 눈이 마주쳤다. 정우는 재경과 언제 눈이 마주쳤냐는 듯 고개를 돌렸다. 어제까지 한집에 있었던 것에 비하면 차가우리만치 냉랭한 태도였다. 이후로도 재경은 몇 번 더 정우를 보았다.

*  *  *

“벌써 4번째 발표식까지 왔네요. 벌써 반이 넘게 달려왔습니다.”

최PD의 진행과 함께 연습생들이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동안 많은 것이 달라졌죠. 이젠 밖에서 우리 참가자들을 알아보는 사람도 늘어났습니다. 당연히 관심을 주는 사람도 많아졌겠죠? 그게 방송 관계자든 아니면 광고 쪽 사람이든지요.”

처음 화제성을 잡았지만 그리 높지 못했던 시청률은 매회 방송이 진행되면서 새롭게 갱신되고 있었다. 특히나 이제껏 잘 없었던 오디션 프로그램의 확실한 성공을 이루면서 물밑에서 새로운 오디션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도 많이 돌았다.

오디션이 끝나면 데뷔조에 들어가는 연습생은 확실하게 인기를 얻을 것이다. 그런 만큼 남은 참가자들은 점점 더 합격의 염원이 간절해지고 있었다.

“지금부터 합격자를 발표하겠습니다. 27위는 두고 26위부터 발표하겠습니다.”

최PD가 한 명씩 합격자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리에 있던 연습생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벌써 불리게 된 자신의 낮은 순위를 아쉬워하면서도 탈락하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숨길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30위권이라 탈락할 줄 알았던 전상국이 15등에 안착하면서 나갈 때 그는 아직 이름이 불리지 못한 재경을 비웃었다. 재경이 9위 안으로 들어갈 리가 없다는 듯 전상국은 재경이 탈락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순위권에 들어가겠네요. 9위 발표합니다.”

바로 전 발표식에서 9위는 재경이었다. 그렇기에 연습생들이 그를 힐끔거렸지만, 전상국만큼은 재경이 불리지 않을 걸 확신했다.

“주도원 연습생입니다. 축하합니다.”

12위를 했던 주도원이 9위로 순위가 올라가면서 연습생들 사이에서 분분한 의견이 일어났다. 재경이 더 높은 순위에 올라가지 않는 이상 탈락할 위기에 놓인 것이다.

이후로도 순위에 맞게 호명하는 이름 속에 재경은 없었고 최종 1위로 이정우가 되면서 마지막 27위만 남게 되었다.

이제 카메라의 대다수가 재경을 비추고 있었다. 확연히 낮아진 등수. 다음 라운드를 하지 못할 것인가 싶은 와중에도 재경은 여전히 처음의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합격자석에 앉은 주도원과 전상국이 무언의 눈빛을 주고받았다.

‘거봐, 내 말대로 됐지?’

‘그러게. 서재경은 떨어지겠네.’

아슬아슬하게나마 데뷔조 커트라인에 들어간 주도원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자신은 떨어질 줄 알았는데 비교적 안정적인 순위에 앉은 전상국도 마찬가지였다.

정우와 하준도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떡할 거야.’

‘이건 어쩔 수 없어. 지켜 보자.’

정우의 초조한 시선에 하준에 고개를 저었다. 정우의 눈빛은 더욱 안타까운 빛으로 물들었다. 재경을 위해 준비한 게 있음에도 하준이 다음으로 미루라고 말리는 바람에 아무것도 못 하고 왔기에 더욱 후회스러웠다.

그런 정우의 불안을 잘 알면서도 하준은 지켜보자고만 했다.

‘재경이 올라오게 되면 우리는 그때 움직여야 해.’

하준의 시선이 정우를 비롯해 몇몇 연습생을 훑고 지나갔다.

“마지막 27위를 발표하겠습니다.”

이름이 불리지 않은 연습생은 10명. 그리고 남은 합격자 자리는 하나.

그 한 자리를 두고 연습생들의 얼굴이 하나씩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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