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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아이돌-73화 (73/125)

73화

“…….”

재경은 해가 뜨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고층의 집에서 보이는 해가 뜨는 푸르른 시위가 예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낯설다는 게 가장 크게 와닿았다.

‘내가 언제 잠들었지?’

어제 영화를 보다가 정우와 대화를 나눈 거 같은데…….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게 깊게 잔 것도 모자라 소파에 있어야 할 몸이 침대에 있다는 게 기가 막히기도 했다. 몽유병이 있지 않고서야 정우가 소파에서 침대로 옮겨 준 것 같은데 왜 깨지 않았을까.

그리고…….

재경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자 정우의 벗은 등이 보였다.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거리는 게 푹 자고 있다는 신호였다.

‘얘는 왜 여기서 자지?’

혼자 사니까 침대가 하나라서? 그럼 난 소파에서 자게 그냥 두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재경은 침대 헤드에 기댄 자세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정우의 집에 오고부터는 모든 게 다 평화로웠다. 아늑한 공간 속에서 그 어떤 혼란도 없었고 고민도 없었다. 그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편하게 쉬다가 잠이 들었다.

집에서도 오디션을 치르는 호텔에서도 느끼지 못한 편안함이었다. 마치 지금껏 달려온 재경에게 잠시 쉬는 시간이 되어 주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쉰 적이 언제였더라.

‘활동할 때도 못 쉬었고…….’

그 이후로 회귀해서도 바빴던 걸 생각하면 거의 처음 아닌가?

재경은 그렇게 만들어준 정우를 보았다. 정우가 잠결에 재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짙은 눈썹 아래 꼭 감긴 눈은 속눈썹이 촘촘하게 메워서 빛을 막아 주았다. 높다란 콧대와 연한 분홍빛의 입술은 지금껏 본 그의 모습 중 가장 낯선 얼굴이었다.

자신을 귀찮은 존재 취급하던 25살의 이정우, 어미 오리를 따라다니는 새끼오리만 같았던 19살의 이정우. 이젠 이정우의 진짜 얼굴이 뭘지 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 그의 진짜 모습이겠지. 예전의 이정우와 지금의 이정우는 애초 만나는 시작이 달랐으니까.

“네게 위안을 받는다는 게 되게 이상해.”

네 옆으로 오지 말라고 했었잖아. 그래놓고 이렇게 사람을 편하게 해주면 어쩌자는 거야.

정우가 들으면 황당해할 생각에 재경이 혼자 비죽 웃었다.

과거에 그에게서 다가오지 말라는 말에 상처를 받았던 건…….

“너랑 친구가 되지 못해서 더 서운했나 보다.”

아직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재경에 비해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던 정우가 대단해 보였던 것 같았다. 그래서 그와 가까워지고 싶었던 마음이 거부당하자 더 큰 상처를 입었었다.

평생 피가 멈출 것 같지 않던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가고 있었다. 나중엔 아예 흔적도 남지 않을 것처럼 빠르게 나아가는 건 정우와 보낸 시간의 영향이 가장 컸다.

“고맙다.”

재경은 정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자신의 아픔을 누구에게도 위로받을 줄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치유받을 줄 몰랐다. 자면서도 재경의 말이 들리기라도 했는지 정우의 입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  *  *

잠에서 깬 정우는 재경이 자던 자리를 손을 쓸어보다 번쩍 눈을 떴다. 빈자리를 확인한 정우가 상체를 일으키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방에 재경이 없는 것으로 보아 나갔다 싶어 정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늦게 자는 바람에 재경이 일어난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혹시나 나가고 나서 마음이 달라지면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약간 답답하기도 했다. 정우는 괜히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며 방을 나왔다.

“일어났냐?”

구수한 냄새와 함께 주방에서 등을 돌린 재경이 정우를 아는 척했다.

“왜…….”

“나 오늘 하루만 더 신세 질게.”

정우는 얼떨떨하면서도 아까보다 나아진 기분으로 의자를 빼서 앉았다.

“갈 줄 알았어.”

“알바 사장님한테 연락해야 하는데 깜박했어.”

어제 정신이 없어서 합숙을 나왔다는 말을 못 했다며 재경이 된장찌개를 가운데 내려놨다.

“이거 재료만 있기에 내 마음대로 끓였어.”

입맛에 안 맞아도 어쩔 수 없다는 말에 정우가 괜찮다고 하려다가 문득 제 상태를 깨닫고 빠르게 화장실로 들어갔다. 간단히 양치와 세수만 하고 돌아온 사이 재경이 상을 차려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냉장고 보니까 정말 손이 크시더라. 미역국도 있던데?”

국이 종류별로 있는 걸 보고 놀랐다면서 재경은 정우가 앉기를 기다렸다가 숟가락을 들었다.

“내가 밥 차렸으니 눈치 안 보고 마음껏 먹는다.”

“내가 언제 눈치를 줬다고.”

“네 집이잖아.”

재경이 미역국을 마시면서 대답했다. 원래라면 새벽에 일어났을 때 바로 나갔어야 했는데 이 공간에 더 머물고 싶었다. 제 집도 아닌데 편하고 좋으니까 얼굴에 철판 깔고 조금만 더 비비적거리고 싶은 마음에 밥을 차렸다.

재경이 야무지게 밥을 먹는 걸 본 정우는 부지런히 놀리던 젓가락을 슬쩍 내려놓는 사이에 말일 끼워 넣었다.

“합숙하기 전까지 여기 있는 게 어때?”

“여기?”

“어차피 며칠 안 되잖아.”

이번엔 저번보다는 길지만 그래도 일주일이 안되는 시간밖에 안 남았다. 정우의 제안에 재경이 살짝 놀라면서도 은근히 혹한 마음이 들어 바로 거절하지 못했다.

“내가 있으면 불편할텐데.”

“전혀. 어제부터 같이 밥 먹으니까 더 좋기만 한데 뭐가 불편해.”

“그래도…….”

재경이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한 번 더 망설이고 있는 사이 식사를 마친 정우가 여유롭게 물잔을 들었다.

“이렇게 번갈아 가며 밥 차리자. 편하다.”

정우의 깔끔한 마무리에 재경은 우물쭈물하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  *  *

설거지까지 끝내고 뭐할까 고민하던 둘 사이를 흔든 건 핸드폰의 진동이었다. 정우는 제 핸드폰의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받을까 말까 고민했다. 그러다 아예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에 마지못해 핸드폰을 들었다.

“어.”

- 어디야.

“집.”

하준의 물음에 정우는 태연히 대답했다. 최대한 아무것도 없다는 듯 굴어서 전화를 끊고자 하는 속셈이었다.

“정우야. 차가 어딨다고?”

“거기 바로 위에…….”

반사적으로 대답하던 정우가 아뿔사, 뒤늦게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재경의 목소리를 못 들었으면 좋겠는데 싶은 바람에 슬쩍 핸드폰을 귀에 댔다.

- 재경이랑 같이 있구나.

하준의 의미심장한 목소리에 정우는 소리없는 한숨을 감췄다. 누구보다 재밌는 걸 구경하기 좋아하는 인간이 윤하준이었다. 어떻게 반응할지 뻔히 예상가는데 아니나 다를까 하준이 말해왔다.

- 안 그래도 심심했는데 놀러갈게.

정우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끊어 버린 덕분에 정우는 어두워진 화면을 보며 혀를 찼다.

“누구야?”

“하준이 형.”

정우가 심각하게 인상을 쓰고 있으니 차를 가지고 온 재경이 하나를 그에게 건네며 자리에 앉았다.

“형이 왜?”

“온대.”

정우가 왜 그러는지 뒤늦게 안 재경이 차를 마시는 척 웃음을 감췄다.

“웃지 마.”

“안 웃었는데.”

재경이 전혀 그런 적 없다는 듯 뻔뻔하게 잔을 내려놨지만 입술이 실룩이는 걸 들켜서 실패했다.

“하준이 형한테는 너나나나 원숭이인 거 몰라?”

“알지.”

워낙 남을 관찰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인 거야 잘 알고 있었다. 더불어 누구에게나 친절하지만 일정 선을 그어놓는 사람이라는 것도. 자신에게 싫은 감정을 드러낸 건후나 정우보다 어떻게 보면 제일 어려운 사람이 하준일지도 몰랐다.

“어떻게 알아?”

“뭐?”

“하준이 형이랑 만난지 얼마 안 됐잖아.”

“그게 뭐…….”

제 속을 들춰 보려는 정우의 날카로운 시선에 재경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자꾸 회귀하기 전의 생각을 끌고 오다 보니 남들이 의심할 반응이 가끔 툭툭 나오기는 했다.

“어쨌든 하준이 형은 여기 자주 오나 봐?”

“와서 놀다가 자고 싶을 땐 자고 가고 아주 제멋대로지.”

“자고 가?”

“저기서.”

정우가 가리키는 곳의 문을 본 재경이 벌떡 일어나서 그 문을 열어보았다. 재경이 안을 둘러보는 사이 정우도 뒤늦게 재경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 알고 아차 싶었다.

“여기 손님방이야?”

“대충 그런 셈이지. 하준이 형이 허리 아프다고 침대 하나 들였어.”

“그럼 나 여기서 자라고 하지 그랬어.”

“…거기가 청소가 안 되어있어서.”

정우가 뒤늦게 떠오른 변명을 꺼내자 재경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왔다. 하긴 혼자 사는 집에다가 계속 합숙했으니 청소할 시간도 없었겠구나.

재경이 그렇게 이해하며 돌아오자 정우는 무겁게 입을 다물었다. 괜히 이런저런 말을 떠들다가는 주기적으로 청소하러 오시는 분이 있다는 것까지 말할 것 같아서 그랬다.

그렇게 어제처럼 소파에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을 때쯤 현관문의 벨이 울렸다. 정우가 기다렸다는 듯 현관을 열었고 재경도 하준을 보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들어오는 사람의 얼굴을 본 재경이 놀란 소리를 흘렸다. 하준일 줄 알았는데 가장 먼저 들어온 건 건후였다. 그 뒤로 태연이 들어오고 하준까지 줄줄이 들어오고 나서야 현관문이 닫혔다.

“왜 다 데리고 왔어.”

“사람은 많을수록 재밌잖아.”

짧은 시간 동안 건후와 태연을 데려온 하준이 정우의 어깨를 툭 치며 들어왔다. 그리고 약간 당황해서 굳어 있는 재경에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안녕, 재경아? 반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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