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이제 들어가서…….”
정우의 말을 들으며 일어나려던 재경이 배에서 꼬르륵 거리는 소리에 뒤늦게 손을 가려보았다. 그러나 이미 들었는지 정우의 말이 끊겼다.
“내가 차를 줄 게 아니었네.”
“아니야. 괜찮아.”
재경은 더는 폐 끼치기 싫어서 손을 내저었지만, 정우가 머그잔을 들고 주방을 가리켰다.
“밥 먹자. 나도 빈속이야.”
그렇게 말한 정우가 앞장서자 재경은 제 머그잔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타이밍이 진짜. 재경은 무거운 발걸음을 질질 끌어 정우를 따라갔다.
“간단히 라면이나 끓여 먹… 자.”
주방에 들어선 재경은 간단히 먹자고 말하려는데 정우가 냉장고에서 꺼낸 것들을 보고 중간에 말이 잠시 끊겼다.
“그걸 다 먹게?”
“안 그래도 혼자 먹기 많았는데 잘됐다.”
정우가 재경에게 식탁에 앉아 있으라는 듯 눈짓하고는 마저 이것저것 꺼냈다. 전부 반찬이나 데우기 전의 국, 찌개 종류였고 이대로만 차려 먹어도 한 상은 뚝딱 나올 양이었다.
“뭐 그렇게 많아?”
“오늘 나올 거 알고 미리 채워 줬나 봐.”
“너 혼자 산다고 했지?”
재경이 아까 흘리듯이 물었던 질문을 떠올리자 정우가 냉장고 문을 닫으며 다가왔다.
“부모님이랑 사는 집은 너무 넓어서 따로 나왔어.”
재경이 등을 돌려 거실을 보았다. 거실 하나가 제가 사는 집인데 그럼 정우의 부모님은 얼마나 좋은 집에 산다는 걸까.
하긴 소속사 대표 아들이라고 하니 나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겠지.
“혼자 살면 외롭지 않아?”
재경은 제 좁은 집에서조차 휑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이런 넓은 집에 사는 정우는 더욱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까 싶어서 물은 것이지만 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재경이 거실을 둘러보던 시선 그대로 정우를 돌아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입을 다물고 있던 정우가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할 거 없으면 이것 좀 덜어 줘.”
반찬을 놓을 접시를 내어 준 정우가 국을 데우러 가스레인지 앞으로 향했다. 재경은 방금 정우가 왜 대답을 안 했을까 궁금해하면서도 순순히 그가 시킨 것을 했다.
장조림, 멸치볶음, 미역 줄기 볶음 등등 반찬을 하나씩 꺼내고 있자니 그 종류가 상당했다. 정우가 데운 국과 찌개, 밥까지 나오자 밤에 먹기 부담스러울 한 상이 차려졌다.
“이거 다 먹으면 바로 못 자겠는데?”
“먹고 조금 놀다 자면 되지.”
“내일 늦잠 자고?”
“어차피 갈 데도 없고 늘어지게 자자.”
정우가 제 뻑뻑한 눈을 비볐다.
“이번에 유독 잠을 못 잤더니 난 지금부터 꼬박 하루를 자래도 잘 수 있을 거 같아.”
정우가 작게 하품하는 척하다가 밥을 크게 떴다. 그도 배고팠는지 제법 부지런히 먹고 있기에 재경도 뒤늦게 숟가락을 들었다. 국을 먼저 맛보니 소고기뭇국에서 깊은 맛이 느껴졌다.
“맛있다.”
호텔 밥도 만족스러웠는데 이건 진짜 집밥 같았다. 간이 과하지도 않고 어떤 건 맛이 투박스럽기까지 했다. 재경이 계속 국을 떠서 마시고 있으니 정우가 그 모습을 보더니 소리 없이 웃었다.
“이거 만들어 주시는 분이 그래. 자기는 평생 예쁜 요리는 못 만들었어도 적당히 먹을만하게 만든다고.”
“만들어 주시는… 분?”
정우의 부모님이 만들어 준 게 아니었나?
“본가에 요리해 주시는 분이 따로 계셔.”
“아…….”
“어머니는 평생 밥을 해 본 적이 없으시지. 일로 바쁘신 분이거든.”
정우가 재경에게 장조림도 먹어 보라며 가리켰다.
“그래도 어릴 때부터 한 사람이 만든 밥을 먹고 자라서 나한테는 이게 집밥이지.”
재경은 아닌 듯 정우와 제 삶의 공통점이 많이 보였다. 혼자 사는 것도 그렇고 어머니가 일로 바쁜 것도 그렇고. 재경은 장조림을 조금만 들어 먹어 보면서 정우의 생각이 제법 기특하게 다가왔다. 어머니가 아니더라도 익숙한 맛을 찾아서 그것에 감사해하는 것.
“그러게. 이렇게 맛있게 해 주시는 분이 계속 계셨다니 좋았겠네.”
“응. 손이 엄청 큰 것만 빼면 말이지.”
반도 덜어내지 못한 반찬들을 떠올리며 재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먹기 많아 보이기는 했다.
“내일 아침도 밥 먹고 가라.”
“…내일도?”
“너도 거들어야지. 소고기뭇국 다 먹어야 내보낸다.”
“그게 무슨…….”
재경은 실없는 장난이라고 무시하면서도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실은 국이 제일 맛있긴 했다. 국을 몇 번이고 떠 마시고 있으니 정우도 제 식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오디션이 끝나고 밖에서 맞이한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 * *
다시 소파로 돌아와 담요를 덮고 영화를 보는 재경은 아까 정우가 한 말을 곱씹어보았다. 부모님이 일로 바쁜 것 때문에 혼자서 커야 했던 것 같았다. 주변에 정우를 보살펴주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가족 간의 시간은 많이 보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런 건 재경도 마찬가지였다. 연습생으로 들어가 가수가 될 수 있다고 응원하는 엄마도 정작 같이 밥을 먹거나 함께 티비를 보는 시간이 많지는 않았다.
거기다 제법 긴 연습생의 생활까지 닮은 점이 많았다. 그런 정우에게 제 사정도 모르고 데뷔하자고 했다면서 화낸 게 미안할 지경이었다.
“서재경.”
“왜.”
“영화 안 보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그냥…….”
재경이 다른 생각하는 걸 알아챈 모양인지 정우가 그를 돌아보았다. 어두운 거실에 티비에서 나오는 불빛이 정우의 얼굴에 알록달록 색을 입혔다.
“재미없어?”
“별생각 없는데.”
“재미없구나.”
정우가 리모컨을 가져와서 다른 걸 보자고 눌러댔다. 아무 상관이 없는 재경은 가만히 두었다. 그런데 내일부터는 다시 알바를 가야 하는데 여기서 이렇고 있어도 되는 건지.
반쯤 누운 몸이 알아서 편하게 자세를 찾아갔다.
“스릴러 종류는 어때?”
“아무거나 상관없어.”
재경의 대답에 정우가 가장 최근 방영한 영화를 선택했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하는 영화를 보며 둘은 다시 말이 없어졌다. 정우는 간간이 음료수를 마시며 영화에 집중했고 재경은 눈을 가물거리며 잠이 오려는 걸 참았다.
밥까지 먹고 몸이 편하니 눈꺼풀이 무거웠다.
이렇게 잠들면 안 되는데 아예 들어가겠다고 말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에 정우의 나직한 물음이 들려왔다.
“넌 어떻게 하다가 연습생이 된 거야?”
“엄마가… 데리고 갔어.”
“기획사로?”
“응.”
재경이 작게 하품하며 대답했다. 상대적으로 앞에 앉은 정우는 재경이 하품하는 걸 보지 못한 채 다시 물었다.
“몇 살 때?”
“아홉 살이었나, 열 살이었나?”
“어릴 때 갔네.”
“그렇지.”
이젠 너무 어릴 때라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연습생이라는 명목하에 레슨을 받으며 살았던 게 전부였다.
“학교 다니면서 연습생까지 하려면 힘들었겠네.”
“으음…….”
재경은 눈두덩이를 비비며 목울음을 흘렸다. 학교를 다니면서 연습생 했던 게 힘들었던가? 정우의 물음에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억지로 움직여 생각해 보았다.
“그건 아니고 돈이 없는 게 힘들었지.”
“돈?”
“응. 가난하니까. 연습생으로 진 빚도 있고 또 전기세, 수도세를 낼 돈이 없으니까 알바할 때가 더 힘들었지.”
“그건 네가 아니라 어른이 고민해야 할 문제 아니야?”
“엄마는 잘 안 들어오니까.”
재경은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듯 그냥 술술 대답했다. 실은 지금의 만족스러운 순간과 막 잠이 들 것 같은 정신이 정우를 향한 경계심을 늦추고 있는지도 몰랐다.
“지원금도 없고 엄마는 안 들어오고. 학교를 빠져서 점심을 못 먹을 때도 있었고…….”
“힘들게 살았네.”
“힘들게? 힘들게… 살았나.”
재경은 아이돌이 되기 전까지의 제 삶을 생각해 보았다. 아이돌로 활동한 시간보다 훨씬 긴 시간인데도 정우의 말처럼 힘들게 살았나 되돌려보면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돈이 없는 건 괜찮아. 조금 외롭긴 하지만 그것도 괜찮았어. 오히려 지금보다 데뷔하고 힘들었지.”
아무리 알바를 많이 한다고 해도 온전히 세상을 겪어보던 때가 아니었다. 아이돌이 되고 사회생활이라는 걸 겪으면서 재경은 매일 힘들게 살았다. 혼자라서 외로울 때와 모두의 외면 속에서 느껴지는 외로움은 달랐다.
의지할 데가 없이 그가 오롯이 혼자 서야 하는 게 버거웠다. 그리고 한순간 자신을 보살펴주던 엄마를 제가 보살펴줘야 한다니 그 책임감도 무거웠다.
“지금은 괜찮아. 이 정도는 괜찮지.”
“강하네, 서재경.”
“그런가…….”
재경은 작게 미소를 짓더니 그대로 눈을 감았다. 이제 버티기엔 한계가 찾아왔다. 재경이 곤한 숨을 내쉬며 잠에 빠져들자 정우가 그를 돌아보았다. 아까도 잠결에 많은 대답을 한 걸 알고 있었다. 언제 또 이런 대답을 해 줄까 싶어 질문했는데 결국 재경이 잠들었다.
정우는 오늘 재경과 나눈 대화로 그를 많이 알게 되었다. 그동안 잘 버텨 온 재경이 대견하면서도 이제 그가 힘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서재경. 재경아.”
처음 오디션에 들어갔을 땐 서재경에게 기댔지만 이젠 재경을 지탱해주고 싶었다. 그게 단순히 친구의 마음인지는 모르겠다. 그저…….
재경을 바라보는 정우의 눈빛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정우의 손끝이 재경의 볼을 살살 쓰다듬다가 그의 입술을 가볍게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