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재경은 어색한 듯 소파를 매만지며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렸다. 낮잠 비스무리하게 자버려서 그런지 잠이 오지 않았다. 신세 졌다, 고마웠다, 말하고 나가고 싶기도 한데 집 말고 갈 데가 없었다. 아직 엄마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면 또 싸울 게 불 보듯 뻔했다. 그런 재경의 상태를 눈치챈 정우가 그를 거실로 불러왔다.
정우와 나란히 소파에 앉아 있자니 어색한 기운만 맴돌았다. 그나마 소파가 커서 정우와 가까이 붙지 않아도 되는 게 유일한 위안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정우의 존재감을 못 느끼는 것도 아니었다.
침묵도 어색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는 것만 같아서 재경은 억지로 할 말을 떠올려 봤다.
“내가…….”
“아까…….”
동시에 입을 열어버리는 바람에 둘이 멀뚱히 서로를 보았다.
“먼저 말해.”
재경이 먼저 말하라고 양보하고 조용히 있자 정우가 슬쩍 제 입술을 매만졌다. 정우는 “잠시만.”이라고 하더니 부엌으로 들어가 두 개의 머그잔을 들고나왔다.
하나는 재경의 앞으로 내민 정우가 “캐모마일이야.”라고 말하고는 제 머그잔을 들고 자리에 앉았다. 재경이 머그잔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으니 정우가 제 이마를 긁적이다가 목을 가다듬었다.
“아까 그러니까… 생각을 많이 했어.”
정우의 말에 재경의 눈동자가 잠시 그를 향해 움직였다가 돌아갔다. 정우는 머그잔의 표면을 엄지로 쓸며 말을 고르고 또 골랐다. 그가 제 감정만을 내세워 재경을 화나게 한 것 같아서 그를 따라갔다가 우연히 그 상황을 접했다. 엿듣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한 걸음을 물러났지만 재경의 무너질 듯 위태로운 등이 신경쓰였다.
이제껏 오디션에서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어떤 것이든 항상 의젓하고 능숙하게 해내던 재경은 게임 빼고 전부 잘하는 애였다. 그래서 든든하기도 하고 또 무슨 일이든 재경이라면 잘 해내겠지,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렇기에 재경의 다른 모습은 모른 척할 수 없을 정도로 정우에게 충격적이었다. 정우는 듣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재경에게 벌어지는 상황을 전부 지켜보았다.
중년의 남자가 재경을 품평하듯 훑어내리는 시선, 재경과 닮은 듯하면서도 닮지 않은 여성의 하이톤의 웃음소리. 그리고 그 앞에서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재경의 모습. 남자가 자리를 떠나자 재경은 여자와 실랑이를 나눴다. 그러다 여자가 전혀 제 말을 들어주지 않자 재경이 소리를 질렀다. 흡사 절규와 다름없었다.
“그건, 그건 엄마가 저 사기꾼이랑 계약한다니까 나간 거지! 저 사람 사기꾼이야. 사기꾼이라고. 엄마한테 20억 뜯어내서 잠수탈 개새끼란 말이야.”
“엄마 사기당한단 말이야. 가수는 무슨 가수야. 가수는 아무나 해? 그럼 나 말고 엄마나 계약하지 왜 날 물고 늘어지는데!”
재경이 답답하다는 듯 질러대는 목소리엔 그간의 마음고생을 보여 주기라도 하는 듯 상처가 가득했다. 노래할 때는 사정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더욱 마음에 와닿는다고 생각했었는데 전부 꾸며낸 게 아니라 진짜 재경의 굴곡진 삶이 그대로 묻어나오는 거였다.
정우는 재경이 얼기설기 감춰뒀던 상처를 엿보았다. 사기꾼에게서 당하지 않기 위해서 오디션으로 들어온 것. 그리고 그 오디션에서 어떻게든 눈에 띄지 않고 떨어지기를 바라는 것. 재경은 가수가 되고 싶지 않았다. 당장 그를 억지로 무대로 끌어올리려는 어른들에게 벗어나려 발버둥 치고 있었던 거다.
그런 재경에게 정우는 같이 데뷔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사정을 모르기에 의도치 않았다 할지라도 재경을 절벽으로 모는 데 힘을 보탠 꼴이나 다름없었다.
‘그럼 재경이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재경에게 미안한 것도 잠시 그가 불구덩이에서 나오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그리고 정우는 재경이 눈을 떴을 때 역시나 같은 말을 하고 말았다. 데뷔하자고.
“네가 자는 동안 그 상황을 벗어날 방법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
“내 일인데 왜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재경이 웃기다는 듯 작게 미소 지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굳어서 눈동자만 굴리고 있더니 정우가 조금씩 내보이는 마음에 조금은 긴장이 풀린 듯 그의 손끝이 머그잔을 쥐었다.
“너한테 미안한 게 많아서.”
정우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이유로 모든 행동의 면죄부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데뷔해야 하는 것밖에 떠오르지 않았어.”
정우는 재경이 눈뜨자마자 다급하게 꺼냈던 말을 차근차근 설명해 나갔다. 재경은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차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표정은 그래도 많이 풀어졌다.
“그게 아니라면 내 부모님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지만… 그건 네가 싫어할 거 같아서.”
정우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재경이 고개를 붕붕 젓고 있으니 웃음이 나왔다. 정우도 이제 재경의 성격을 알았다.
“그러니까 우리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건 그거뿐이라고.”
“잠깐만.”
재경이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발견했는지 손을 들었다.
“왜 우리야. 이건 내일인데.”
재경은 정우와 제 사이를 명백히 그었다. 하지만 정우는 코웃음을 치며 재경의 머그잔에 제 머그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네 사정을 알았으니 이제 우리 일이지. 같이 헤쳐나가야 하잖아.”
“같이 헤쳐나가다니… 너 진짜 이상하게 얽혀 들어온다?”
“이번에 데뷔해서 계약 기간만 버티면 너는 온전히 성인이 돼. 거기다 네가 자립할 수 있을 경제적인 여유도 생길 거야. 그것만 생각해.”
정우는 재경이 밀어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말을 꿋꿋이 이어갔다. 예전엔 재경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드러냈다면 지금은 재경이 데뷔하면 좋은 이유를 꺼내 들었다. 그러니 이번엔 재경이 조금 끌리는 듯 제 머그잔을 내려다보았다.
“어차피 안 될 거야.”
“진짜 부정적이네, 서재경.”
정우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서재경의 머리를 헝클었다. 끝까지 안 될 거라고 말하는 건 고집인 건지 아니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건지. 하지만 재경은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었다.
“내 소문이 돈다고 했잖아. 그거 무시 못 할 거야.”
재경은 이미 전생에서 소문이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하루아침에 온갖 흙탕물을 뒤집어썼고 모두가 그를 외면했다.
“다들 날 그런 애로 생각하겠지. 그러다 보면 날 응원하던 사람들도 실망할 거고.”
응원이라는 단어에서 재경은 잠시 입을 다물었었다. 생각해 보면 합격이냐 탈락이냐만 생각해 왔었다. 합격하면 앞으로 어떻게 탈락해야 하지 그런 생각만 하느라 자신을 응원해주는 누군가의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제 인생에서 그렇게 많은 응원을 받아 본 건 처음이었는데.
“서재경.”
재경이 점점 우울의 늪에 빠지려는데 정우가 재경의 어깨를 툭 쳤다.
“어?”
“지금까지 대화하면서 네가 뭘 놓치고 있는 거 같은데.”
“내가?”
정우의 알쏭달쏭한 말에 재경은 언제 우울해졌었냐는 듯 방금 나눈 대화를 곱씹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이 놓친 게 뭔지 모르겠다.
재경의 표정에서 답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걸 본 정우가 피식 웃으며 자신을 가리켰다.
“너?”
“그래.”
재경이 그에게서 멀어지려 상체를 뒤로 물리고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너 혼자 데뷔하는 거 아니잖아. 거기 나도 있거든.”
“그런데?”
“소문이라면 나도 있다고.”
“난 또 무슨 거창한 말을 하나 했네.”
재경이 싱겁다는 듯 정우를 흘겨보았다. 얘랑 대화하다 보면 어딘가 나사 하나 잃어버린 기분이야. 이상해.
그런데 또 이상하게 든든하네. 재경은 식었지만 여전히 좋은 향을 품고 있는 차를 마셨다.
“소문에 관한 건 조만간 정리될 거야.”
“네 소문이 정리되는 거겠지.”
소속사에서 곧 입장문이라도 나오려나 보다, 싶어 재경이 가볍게 대꾸했다. 하지만 정우는 그런 반응에도 제 할 말을 이어갔다.
“소문을 낸 게 연습생이잖아.”
순간 재경이 멈칫하면서 차가 흔들렸다. 정우는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역시 재경도 예상하고 있었다는 걸 알면서 정우는 계속 말했다.
“그게 누구인지부터 찾아낼 거야.”
“찾아낼 순 있고?”
“그거야 소속사에서 할 일이지만 PD님에게도 말했고 고소도 할 거야.”
“생각보다 세게 나가네.”
단순히 아니라고만 말할 줄 알았는데 말이다. 하지만 정우는 절대 그럴 수 없다는 듯 단호한 눈빛을 보냈다.
“나를 건드린 애가 너를 건드릴 가능성이 크겠지. 다 조사해서 밝혀내야지. 그리고 그게 전부 시기심에 나온 거라고 밝히고 나면 네 소문도 가라앉을 거야.”
재경은 아직 누군지 찾아내지도 못했으면서 이미 찾은 것처럼 말하는 정우의 자신감에 헛웃음을 흘렸다. 얘는 대체 뭘 믿고.
“그렇게 장담했다가 못 찾으면 어쩌려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재경은 설마 전상국이 정우까지 건드렸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러다 증거도 없이 괜한 의심을 하는 것만 같아 말았지만.
재경이 제 머그잔을 정우에게 내밀었다.
“다 식었다.”
다시 달라고 뻔뻔하게 요구하자 정우가 알아서 타 먹으라며 재경의 등을 밀었다.
“나는 손님이잖아.”
“손님이 타 마셔.”
“치사하게.”
재경이 소파에 등을 누르며 일어나지 않으려고 버티면서 심각하게 나눴던 대화는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재경은 정우의 데뷔하자는 말에 단 한 번도 그러겠다고 대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