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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아이돌-70화 (70/125)

70화

재경이 자괴감에 빠져 정우에게 돌아설 때였다. 이젠 화 낼 기운도 없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재경은 정우에게도 거리를 벌렸다.

“미안해.”

정우의 사과에 재경이 멈춰 섰다. 지금 정우가 왜 제게 미안하다고 하는 건지.

“…꺼져.”

그리고 그 말이 뭐라고 자기는 갑자기 목이 메는지. 시야마저 흐릿해지려는 걸 재경은 몇 번 눈을 깜박여 참아냈다.

“너 진짜 싫으니까 꺼지라고.”

“미안해.”

“내가 스무 살만 됐어도 오디션 안 나갔어.”

그러면 다시 이정우 너와 만나지도 않았을 텐데. 모든 악연은 왜 시간이 되돌아와도 그대로 재경에게 엉겨 붙어 있는지.

재경이 정우를 노려보며 아까 못한 말을 속 시원하게 꺼냈다. 이미 다 들었으니까.

“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화냈어. 그러면 안 되는 건데 얼마든지 나 미워해. 분이 풀릴 때까지 때려도 좋아.”

정우가 달래는 말에 재경은 입술을 깨물며 눈을 부릅떠 보지만 소용없었다. 자꾸만 눈가가 시큰하게 달아올랐고 입술이 부들 떨려왔다. 별거 아닌 투박한 위로인데 그 위로가 재경을 흔들었다.

남들이 보면 답답할, 그러나 자신은 어쩔 도리가 없는 이 상황 속에서 재경은 누구에게든 위로를 받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그게 정우가 될 거란 건 전혀 생각못했지만 재경을 한없이 약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제 어떡해.”

재경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모든 걸 탁 놔버리듯 손을 놓으니 그때부터는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나는 이제 어떡해.”

“일단 우리 집으로 가자.”

그 후로 재경은 정우가 이끄는 대로 움직였던 것 같았다. 눈을 감았다 뜨면 차 안이었고 또 잠시 눈을 감은 사이에 그의 몸은 침대에 있었다. 드문드문 사라진 기억 사이로 재경은 왜 순순히 정우를 따라왔을까 싶었지만, 그 의문은 잠에 밀려 사라졌다.

*  *  *

잠에서 깼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아직 호텔인가? 하는 생각이었다. 재경의 집은 침대가 없었고 또 멍한 정신에서 침대에서 자는 건 오디션 합숙밖에 없었다.

그러다 곧 오늘 있었던 일들이 빠르게 지나가면서 재경이 눈을 번쩍 떴다. 아직 뻑뻑한 눈을 깜박거리고 있으니 앞의 어두운 창문이 재경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호텔 룸이 아닌 완전히 다른 공간.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던 재경은 줄곧 정우에게 기대서 움직였던 게 떠올랐다.

“그럼 여기는…….”

“우리 집.”

재경이 고개를 들자 문가에 기대있던 정우와 눈이 마주쳤다. 화장을 다 지웠는지 말간 얼굴에 가벼운 티를 걸친 그의 편안한 모습 때문인지 이 공간이 더욱 재경에겐 낯설게 다가왔다.

재경이 어떤 생각을 하든 정우는 컵을 들고 다가왔다.

“물 마셔.”

재경은 무의식적으로 거절하려다가 목이 잠기고 약간 부은 것도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정우에게서 물컵을 받아 마시고 있으니 그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재경은 눈뜨자마자 정우와 마주한 이 상황이 불편했다. 그에게 제 치부가 전부 드러난 것도 모자라 낮엔 싸우기까지 했으니 마주보고 나눌 대화가 뻔했다.

그런 재경의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정우가 그에게서 물컵을 가져가 테이블 위에 놓으며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네가 말하기 싫으면 아무것도 안 물어봐. 그냥 쉬라고 데려온 거야.”

정우는 다 상관없다는 듯 재경의 달래 주었다. 동갑인데 어린아이 대하듯 구는 행동에 재경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말하기 싫었는데 이렇게 나오면 반칙이잖아.

“궁금한 게 뭔데.”

“그 남자 사기꾼인 거 어떻게 알았어?”

역시나 궁금했던지 정우는 빈말이라도 괜찮다는 말 대신 바로 물어왔다. 재경은 황당한 것도 잠시 입을 다물었다. 미래에서 알았다고 말할 순 없었다.

“그냥 알게 됐어.”

빚을 지고 그 빚을 지우기 위해 억지로 아이돌을 하고. 너무도 뼈저린 경험이 있었기에 그 남자가 사기꾼이라는 건 죽어서도 잊지 못할 거 같았다.

“경찰은?”

“생각만 해 보고 아직 못 가 봤어.”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인데?”

“아직 몰라.”

재경도 화내고 돌아서긴 했지만 답답한 마음은 그대로였다. 그 마음이 전달되었는지 정우가 함께 고민했다.

“그럼 너는 아직 미성년자라서 계약을 피하려고 오디션에 온거란 거지?”

정우가 다시 한번 짚어오는 말에 재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경으로서도 당장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어떤 속시원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그냥 그렇게 가만히 있으니 문득 이 순간이 참 우습게 느껴졌다. 어떻게 이정우에게 사과도 받고 이렇게 신세를 지게 되었는지.

“일단 데뷔하자.”

정우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려고 하는 찰나에 나온 말에 재경의 눈초리가 뾰족하게 변했다.

“뭐? 너 다 끝난 이야기를…….”

“어차피 너 무대 못 벗어나.”

“야, 이정우.”

“그럴 바에야 차라리 나랑 데뷔해. 그럼 그 계약 더 미뤄지잖아. 네가 성인이 되면 함부로 계약할 수 없을 테니까 그때가 되면 JT랑 계약해.”

“그게 내 마음대로 돼?”

“그거야 네 마음 먹기에 따라 다르지.”

정우는 재경이 할 수 있다면 충분히 데뷔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재경은 전혀 정우와 같은 생각이 아니었다.

“그게 어떻게 내 마음대로 된다는 거야.”

재경이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는데 정우가 질문을 바꿔왔다.

“그 전에, 너 데뷔하기 싫은 이유가 뭐야?”

“뭐?”

“노래하는 거 싫어?”

“그거야…….”

정우의 질문에 재경이 대답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당연하다는 대답이 나와야 하는데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분명 자신은 노래하는 게 싫었다. 아이돌로 무대에 서는 게 끔찍했고 단 한 번도 기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오디션을 나온 이후로 무대에 서는 게 그렇게 싫지 않았다.

노래 부르는 게 재밌었다.

재경의 침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 싫다고 밀어낸 것뿐이잖아. 그럼 데뷔하는 거로 방향을 잡고 노력하자. 빚도 다 갚아주고 그 사기꾼한테 안 가도록 내가 도와줄게.”

아까 엄마와 나눈 대화까지 전부 들어서 빚이 있는 것도 알았다. 정우는 간단하다는 듯 말하지만 재경은 여전히 회의적이었다.

“아직 모르겠어.”

오디션으로 들어온 건 재경의 의지지만 절대 끝까지 갈 생각은 없었다.

“당장 말해달라는 거 아니야. 최종까지 가면 그때 대답해줘.”

“최종까지 갈 수 있을지는 몰라.”

어차피 재경을 향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재경은 그걸 덮을 마음이 없었다. 소문이라는 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 게 알고 있기에 재경은 절대 자신이 최종까지 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전상국은 절대 그 소문을 덮어 주지 않을 것이고, 당장 다음 발표식 후 재경은 탈락할 수도 있고.

재경은 뭐 하나 쉽게 가는 게 없다고 생각하다 정우를 보았다.

“그런데 너 나한테 미안해서 이렇게 하는 거야?”

“아니.”

“그럼?”

왜 같이 고민해주고 설득까지 해오는지 알지 못했다. 재경이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자니 정우가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재경에게 제 속을 드러내도 될지 따져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좋아서.”

“뭐?”

재경이 황당한 얼굴로 되물었다. 이게 갑자기 무슨 뻥튀기 같은 소리야. 엄하게 튀어나온 말에 재경이 와락 인상을 찡그렸다.

“너랑 데뷔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좋아서.”

그러다 정우가 앞에 설명을 덧붙이자 재경이 뒤늦게 이해했다. 순간 자기가 좋아서라고 오해한 것도 웃겼지만 이 와중에 같이 데뷔하자는 욕심을 챙기는 이정우가 웃기기도 했다.

“같이 고민해준 게 아니었냐?”

재경이 왜 그렇게 말이 그쪽으로 가는 거냐는 듯 바라보자 정우가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너한테 무작정 데뷔하자고 말한 건 내 잘못이야. 갑자기 그렇게 말했던 건 미안해.”

정우는 재경에게 보였던 진심이 너무도 갑작스러웠다는 걸 인정했다. 그리고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제 감정을 천천히 풀어 내기 시작했다.

“너랑 같이 연습할 때는 늘 재밌었거든. 그런데 너랑 헤어지고 나니까 진짜 오디션에 참가했다는 게 실감 나더라. 벌써 앞에 무대를 두 번이나 섰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야.”

이번엔 정우가 자신의 이야기를 할 차례인 거 같아 재경이 입을 다물었다.

“서로 돋보이고 싶고 다른 사람을 질투하는 걸 경험하고 있으니까 재경이 너랑 있을 때랑 너무 달랐지. 이게 진짜구나.”

“나는 가짜란 거냐?”

“너랑 있으면 오디션에 온 거 같지 않긴 하지.”

정우가 키들거리며 침대에 발라당 누웠다. 천장을 보는 정우의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이 그의 편한 상태를 느끼게 해줬다. 정우는 그대로 제 머리를 기대고 말을 이어갔다.

“너랑 계속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만 계속 들었어. 그러다 보니까 아예 나중엔 네가 없으면 안 되겠단 생각까지 들더라.”

재경과 떨어져 있는 동안 정우는 더욱 그의 부재를 실감했던 거 같았다.

“까칠하게 굴어도 너랑은 한 팀처럼 느껴졌었거든. 그래서 같이 데뷔했으면 좋겠다고 한 거야.”

이기적이라고 말한 것도, 정우가 민망한 듯 작게 뒷말도 붙였다.

“됐어.”

재경은 부끄러운 마음에 정우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계속 같이하자는 그의 말에 괜히 심장이 뛰었다.

재경은 달아오른 얼굴을 손등으로 쓸며 일부러 더 심술궂게 말했다.

“그렇게 말한다고 내가 데뷔할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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