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아무래도 이번 팀.’
집에 오는 길목에 선 재경은 정우가 왜 갑자기 이상하게 구는지 원인을 생각해 보았다. 자신의 정확한 사정을 모르면서도 배려해주던 그의 태도가 달라진 건 이번 라운드에서 만난 팀과 관련이 있어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나한테 같이 데뷔하자니.’
재경이 헛웃음을 삼켰다. 원래 같이 활동했었다고 말하고 싶은 걸 몇 번이나 참았는지. 지금은 그때와 달라졌다 하지만 그래도 정우는 모를 자신만 아는 비밀을 말하고 싶었었다.
“방송을 보면 알려나.”
그렇게 중얼거리던 재경이 막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가 걸음을 멈췄다. 제 집에 불이 켜져 있었다. 옅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어 누군가 있다는 걸 알자 재경의 눈빛이 심각하게 가라앉았다. 과거 이 나이 즈음에는 엄마가 왔다며 좋아했겠지만, 지금은 엄마가 달갑지 않았다.
또 그 계약을 이야기하면 어쩌지 싶은 걱정에 재경이 집 앞에 선 채 한 걸음을 떼지 못했다.
‘다음에…….’
결국 재경은 집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엄마를 볼 기분이 아니었다. 그러니 오늘은 적당한 곳에서 시간을 보내며 엄마와 만나는 걸 피할 생각이었다.
생각을 굳힌 재경이 막 돌아선 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여기까지 와 주셨는데… 어머, 재경아. 왔니?”
엄마의 하이톤의 목소리에 뒷덜미가 오싹하게 일어난 재경이 엉거주춤 몸을 돌렸다. 아예 안 봤다면 모를까 이렇게 마주한 이상 그냥 갈 수도 없었다.
“잠깐 들른 거야. 금방 나가 봐야…….”
재경이 엄마의 뒤에서 그림자처럼 나타난 남자를 발견하며 말끝이 흐려졌다.
실장이었다. 마찬가지로 재경을 발견한 남자가 화장을 지우지 않은 재경의 얼굴을 보더니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꾸미고 보니 엄마를 똑 닮았네.”
실장의 옆에 선 엄마가 자신이 칭찬을 받은 듯 기분 좋아서 떠들어댔다.
“얼굴만 잘난 게 아니라 노래도 잘해요. 그 오디션 보셨죠? 거기 심사위원들이 다 칭찬하는 거. 노래도 날 닮아서 그렇게 잘한답니다.”
“바로 앨범 내도 될 거라고 큰소리친 이유가 있었네.”
“호호호. 당연하죠.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그 회사 노하우를 쏙쏙 빼다 배웠으니까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다 잘해요. 아니, 오디션 봤다면서 왜 모른 척하세요.”
엄마의 높게 올라가는 웃음소리와 실장의 비릿한 미소가 뒤섞이자 재경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아직 오디션이 안 끝났는데…….”
“당연하지. 오디션 잘 보고 있어. 그냥 너 보고 싶다고 해서 잠깐 오신 거야.”
아직 계약할 용의가 있다는 것도 모자라 아예 실장이 재경을 보겠다고 온 상황이라 재경은 혼란을 금치 못했다.
“또 보자.”
실장이 재경의 볼을 톡 치며 지나가자 엄마가 재경의 옆으로 와서 남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계속 서서 뭐해. 들어가자.”
엄마가 재경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 한껏 기분이 좋아서 콧노래까지 부르는 그녀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듣기 싫어 재경이 제 몸에 닿은 엄마의 손을 쳐냈다.
“어머?”
“내가 이 계약 절대 안 한다고 했었잖아. 그런데 저 남자가 왜 와?”
재경의 낮게 깔린 짜증에 엄마는 얘가 왜 이렇게 예민한 거야, 정도로만 여기며 심드렁히 대답했다.
“네가 안 한다고 안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이 기회가 어떤 기횐데 자꾸 안 한대, 얘는.”
“내가 언제 가수 한다고 했냐고.”
“그럼 오디션은 왜 나갔어.”
엄마가 무심히 받아치는 말에 재경이 숨이 막힌다는 듯 침을 삼켰다가 울컥 감정이 올라왔다. 예전엔 사기꾼이라고 말하면 엄마가 믿을까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여유도 없었다.
“그건, 그건 엄마가 저 사기꾼이랑 계약한다니까 나간 거지!”
“너 어디서 목소리를 높여.”
“저 사람 사기꾼이야. 사기꾼이라고. 엄마한테 20억 뜯어내서 잠수 탈 개새끼란 말이야.”
“너!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엄마 사기당한단 말이야. 가수는 무슨 가수야. 가수는 아무나 해? 그럼 나 말고 엄마나 계약하지 왜 날 물고 늘어지는데?”
재경이 속에 담아둔 말을 전부 끄집어내면서 내질렀다. 이제껏 참고 또 참았다. 차라리 연을 끊은 게 좋을 정도로 엄마는 재경에게 하나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가족이니까. 재경의 유일한 가족이니까 참아왔는데…….
“내가 왜 가수를 해야 해. 처음부터 하고 싶지 않았어. 싫다고. 그딴 게 다 뭔데. 빚만 늘고 있어.”
“뭐긴. 한 번만 뜨면 우리 빚 한방에 갚는데 이거 말고 방법 있어?”
“빚이 얼마나 된다고 그래. 그건 그냥 일을 하면 되잖아.”
예전처럼 20억이 넘는 빚도 아니었다. 고작 1-2억 그거라면 그냥 평범한 일을 하고도 갚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차갑게 고개를 저었다.
“누가? 엄마가 버는 거로 죽을 때까지 다 못 갚아.”
“같이 갚으면 되지. 나 몇 개월만 있으면 성인이야. 바로 일하면 되니까…….”
“그깟 쥐꼬리만 한 돈으로 언제 갚겠다고. 한방에 갚을 거야.”
엄마의 단호한 대답이 재경의 말을 잘랐다. 재경이 19살로 돌아오기 전에도 엄마는 늘 이렇게 말했다. 정작 재경이 아이돌이 된 이후에도 빚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음에도.
“엄마는 늘 그 말도 안 되는 한방에 눈이 멀었어. 그러니까 저 새끼가 사기꾼인지도 모르고 달려들지. 대체 얼마나 더 당해야 정신 차릴 거야. 엄마는 아직도 허황된 꿈만 꾸고 있으면 어떡해.”
“너…….”
재경의 신랄한 말에 흥분한 엄마가 손을 올렸다. 다시 뺨을 때리려고 손을 날렸지만 이번엔 재경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엄마의 손목을 붙잡은 재경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엄마나 노래해. 나는 이제 싫어. 지긋지긋해. 이제 그만할거야. 다 때려칠거라고.”
“지금껏 키워주고 먹여줬더니 네가 나한테 어쩜 그럴 수 있어.”
“날 키운 게 엄마야?”
재경이 엄마의 손목을 던지듯 놔버렸다. 아예 엄마와는 조금도 연결되고 싶지 않다는 듯 차갑고 매섭게.
“여섯 살 때부터 나 혼자 컸어. 나 혼자 씻고 나 혼자 학교 다녔어. 엄마는 뭐했어? 가수 하겠다고 사방으로 돌아다녔지. 나 할머니가 키웠어.”
“할머니 죽고 너 키운 거 나다. 그 돈은 어디 땅 파서 나오니?”
“줄 거야. 벌어 준다고. 그러니까 더는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 이번 계약은 절대 없어. 아동학대로 엄마 신고할 거거든.”
“서재경!”
엄마의 외마디 비명을 들으면서 재경은 매섭게 돌아섰다. 경찰서로 가려고 했던 건 어디까지나 시간을 끌기 위해서였는데 흥분한 나머지 엄마를 고소하겠다고 협박까지 하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 재경은 아무것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몇 걸음 가지도 못한 재경은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서고 말았다.
정우가 왜 여기 있는지 놀란 것도 잠시 재경은 울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오늘 진짜 하루가 왜 이러지?
만나기 싫은 사람들이 계속 앞을 가로막는다. 재경이 정우를 노려보았다.
“너 뭐야.”
“너한테 할 말 있어서 따라왔었어.”
정우의 솔직한 말에 재경이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도 집에 못 들어가고 분에 못 이겨하는 엄마가 있었다. 따라왔다면 다 봤겠네.
재경이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런 꼴 보니까 속 시원해?”
정우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게 재경의 치부를 봤다는 대답인 것만 같아 재경이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려 고개를 돌렸다.
“다 봤으면 꺼져.”
재경은 더는 정우와 할 말이 없기에 그를 지나쳤다. 정우에게 더 따지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다. 그저 혼자 있고 싶었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서재경.”
그런데 정우가 재경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정우가 팔목을 잡아오자 재경이 그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
재경은 정우를 노려보고는 다시 걸어갔다. 정우는 다시 재경의 손목을 잡진 않았지만 그를 계속 따라왔다. 재경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그만 쫓아와. 나 못 본 척 잘하잖아. 그대로 하라고.”
“이야기 좀 해.”
“할 얘기 없어.”
“난 있어.”
정우의 단호한 대답에 재경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천천히 정우를 돌아보았다. 안 그래도 지금 기분이 바닥을 뚫고 내려갔다. 제 오갈 데 없는 분을 엄한 곳에 풀고 싶지 않았는데 전부 제게 딱 달라붙은 정우의 탓이다.
재경이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뭐? 다른 애 밀어내고 내가 프로그램에 나간 벌이라도 받는 거라고 말하게?”
정우가 이기적이라고 했었던 말이 은연중에 재경의 마음에 가시처럼 박힌 모양이었다. 세상 모든 말이 다 가시가 되어 이미 재경의 심장에 빼곡이 박혔는데 정우의 말이 새롭게 재경을 따끔하게 찔러댔다.
“나도 다른 애 밀어내면서까지 들어가고 싶지 않았어. 그런데 어떡해? 사기꾼인 거 아는데도 미성년자란 이유로 내 마음대로 거절하지도 못해. 나도, 나도 급했다고.”
이제 제 사정을 다 알고 있으니 굳이 감출 것도 없었다. 누군가의 미래를 자신이 빼앗은 것 같아 미안하지만 재경 역시 미래를 가지고 싶었다. 진흙탕 속에서 굴러다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오디션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러면 뭐해. 지금도 난 여전히 진창인데.”
재경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벗어나려고 노력했지만 재경의 뜻대로 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