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아이돌-68화 (68/125)

68화

기뻐하는 팀원 사이로 재경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1등이라니, 그럼 어떻게 된다고 그랬더라?

재경이 아까 들은 말을 억지로 떠올려보려는데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대충 흘려듣고 말았기 때문에 그랬다.

“우리 너튜브에 올라가겠다! 그거 진짜 좋다고 그랬어.”

중하랑이 신나서 외치는 소리를 들은 재경이 그제야 뭐였는지 깨달았다. 팀원이 모두 기뻐하는 게 그대로 화면에 비치면서 최PD가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걸그룹의 곡을 선택하면서 그 어느 팀보다 난항을 겪을 거라고 예상했는데요. 그 모든 염려에도 자신들에게 걸맞게 편곡은 물론 멋진 무대를 보여줬죠. 특히나 한 팀으로의 팀워크가 돋보인다는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점점 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재경이 고개를 푹 숙였다. 이번 라운드는 왜 이렇게 힘든 일이 많을까.

“이번 라운드도 수고하셨습니다. 참고로 호텔 주변에 여러분들의 팬이 많으니까 조심히 귀가하시길 바랍니다.”

최PD의 수고했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  *  *

복도를 걸어가던 재경이 눈에 띄던 아무 곳이나 들어갔다. 문에 등을 기대고 안을 들여다보니 개인 보컬실로 마련된 방이었다. 다른 사람이 없는 건 다행이지만, 한 편에 자리한 카메라를 보니 마음 편히 쉬지는 못하겠다.

카메라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재경은 제 속을 드러내지 못하고 소파에 앉았다.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갔다면 좋으련만 그럴 장소도 많지 않았고 당장 재경은 혼자 있고 싶었다.

벽에 고개를 기대고 눈을 감은 재경은 지금 자신이 제대로 가고 있나 생각해봤다. 1라운드 합격자 발표식의 탈락을 목표로 들어왔는데 여전히 이 자리에 있다. 그렇다고 엄마의 일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이 고민에서 언제 벗어날 수 있을까.

답이 없는 미로를 헤매는 듯한 기분을 느끼던 재경이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여기 있었네.”

“어.”

정우라는 걸 확인한 재경이 다시 눈을 감았다.

“집에 안 가?”

“조금만 있다가 가게.”

최PD의 말대로 밖에 누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속이 복잡해서 혼자 있고 싶었다. 적당히 혼자 있고 싶다는 티를 냈으니 가면 좋으련만 야속하게도 정우는 안으로 들어왔다.

재경은 카메라의 반대편으로 살짝 고개를 돌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는 옆에 앉은 정우의 무릎을 무릎으로 툭 쳤다.

“왜 여기 앉아.”

“나도 조금만 있다가 갈 거야.”

“왜… 아. 그래.”

생각해보면 가장 인기가 많을 정우야말로 여기서 시간을 끌다가 가는 게 좋았다. 그래도 방에 가서 쉬든지 하지 왜 여기에서.

재경은 더 말 걸지 않고 아예 눈을 감았다. 그랬기에 정우의 표정이 눈에 띄게 가라앉아 있는 걸 발견하지 못했다.

“이번 라운드.”

정우의 낮은 목소리가 방음이 잘 된 보컬실에 웅웅 울렸다. 굳이 정우를 돌아보지 않아도 그의 목소리가 잘 들릴 정도로 아주 잘.

“같이 못 해서 아쉬웠어.”

“그러냐?”

재경은 별생각이 없었다. 정우와 다른 팀이 되긴 했어도 그가 연습하는 것도 종종 봐서 그런지 그와 다른 팀이라는 게 별로 와닿지 않았다. 재경이 심드렁한 표정과 함께 정우를 돌아보자 그는 연신 심각한 얼굴로 앞의 벽을 노려보았다. 그런다고 그 벽이 뚫릴 것도 아닌데.

“너랑 같이 무대 오르고 싶다고 생각했어.”

정우가 많은 생각을 했고 또 다짐하게 된 듯 재경을 돌아보았다.

“다음 라운드에서 같은 팀이 되고 싶고 또… 계속 같이하고 싶단 생각도 했어.”

“너…….”

재경이 정우와 뒤에 있는 카메라를 번갈아 보며 당황한 기분을 억지로 눌러야 했다.

“그런 말은 나중에 하자.”

일단 정우의 말을 끊는 게 우선이었다. 적당히 받아주고 싶지 않은 주제였다. 그런데 정우는 재경이 끊어버리는 말을 야속하게 다시 이어왔다.

“같이 데뷔하고 싶다고.”

재경은 순간 끓어오르는 화를 억지로 눌러야 했다. 가뜩이나 복잡한데 와서는 데뷔하고 싶단 헛소리로 사람을 건들고 있었다.

“나 좀 보자.”

재경이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보컬실을 나갔다. 지금껏 자기에 대해 조금 안다는 듯이 굴던 애가 갑자기 같이 데뷔하고 싶다니 재경의 발걸음에 자꾸 힘이 들어갔다.

슬슬 카메라를 철수하기 시작하는 걸 보면서 재경은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가장 안전한 곳은 예전 전상국을 만났던 그곳이었다.

거기까지 가는 내내 재경은 왜 이제 와 그런 말을 하는 건지 생각해 봤지만 짚이는 게 없었다.

생각이 변한 건 알겠는데 그 원인을 짚어낼 수 없는 것이다.

정우를 기다리고 있던 재경은 그가 나타나자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 거기 카메라가 있는 거 몰랐어? 모르고 그런 말한 거야?”

“카메라 있는 거 봤는데.”

정우의 무심한 대답에 재경이 올라오는 욕을 꾹 밀어냈다.

“카메라 있는 거 알고도 말한 거면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야.”

“같이 데뷔하고 싶다는 거 진심이야.”

“내가… 데뷔하기 싫어하는 거 알잖아.”

“그래. 너 오디션에서 떨어지고 싶어 했지. 왜 네 발로 여기까지 와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사정이 있어서… 아무튼 나는 데뷔하고 싶지 않아.”

“왜?”

“뭐?”

“왜 싫은데?”

재경은 오늘따라 정우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화장이 진한 얼굴은 그동안의 여유롭던 이정우가 아니었다. 어딘가 날카롭고 예민하게 다려져 있는… 언젠가 본 적이 있던 얼굴이었다.

‘내가 거슬린다고 말하던 그때.’

그럼 이번 팀도 정우의 기분에 거슬려서 저러는 걸까?

재경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화살이 자기에게 돌아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대충 머리를 헝클며 정우에게 손을 뻗어 거리를 벌렸다.

“어쨌든 나는 아니니까 너 나랑 데뷔하고 싶다는 그런 말 마라. 아예 내 옆으로 오지 마.”

재경은 처음 정우를 밀어내던 그때와 다름없는 말을 꺼냈다. 나름 거리가 좁아졌다고 여겼지만 결국 헤어져야 할 상대였다. 특히나 데뷔가 확실한 정우에게 붙어 있어 봐야 좋을 게 없었다.

“나는 그냥 조용히 있다가 떨어지고 싶어.”

반쯤 포기한 채 선언했지만, 역시나 정우는 거침없이 재경이 그어 놓은 선을 지워 버렸다.

조용히 재경의 말을 곱씹던 정우가 처음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데 그게 미소와 다른 웃음이라는 게 말을 통해 느껴졌다.

“이기적이네.”

“뭐?”

“데뷔할 생각도 없이 사정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들어와서는 네가 마음에 든다는 사람을 그렇게 밀어내는 거… 그래, 네가 날 싫어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네가 들어오려고 밀어버린 다른 사람한테 미안하지 않아? 어쩌면 걔는 네가 아니었으면 데뷔했을 수도 있잖아.”

정우가 재경의 약한 곳을 서슴없이 파헤쳤다. 재경이 회귀하기 전에 이 오디션에 지원했을 누군가가 재경으로 인해 함께하지 못했다는 게 걸렸는데 그걸 짚고 온 것이다.

“그건, 나도 미안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걸 정우가 걸고 넘어질 줄 몰랐다. 재경은 변명처럼 말을 내뱉다가 입을 다물었다. 굳이 이런 말을 왜 정우에게 해야 하는거지? 점점 머릿속이 차갑게 가라앉으며 재경의 눈빛 역시 싸늘하게 바뀌어갔다.

“마음대로 생각해. 네 말대로 나 이기적인 새끼고 데뷔하고 싶지 않아. 이번에 떨어지고 싶으니까 달라붙지 마.”

“너는 너만 생각하는구나.”

정우의 자조적인 미소에 재경은 순간 울컥했다.

“그러는 너는 떳떳해?”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데뷔 결정됐으면서 여긴 왜 나왔어. 대형기획사에다가 멤버도 다 꾸려졌잖아. 굳이 여기 와서 다른 사람을 밀어낸 건 너 역시 마찬가지지.”

거기다 큰 인기까지 얻어 한 번에 스타가 되었다. 정우를 비롯해 JT의 멤버 사이에서 재경은 늘 소외감을 느껴야했다. 그래서 종종 생각했던 걸 내뱉고 말았다. 그냥 데뷔했다면 적어도 재경에게도 그들과 어울릴 기회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괜히 미움으로 바뀌어 정우를 노렸다.

“아니야.”

“아니긴.”

정우가 부정하는 걸 재경이 빈정거렸다. 하준이 데뷔조였던 애들이 오디션에 지원했다고 인터뷰한 걸 기억하고 있었다. 원래부터 데뷔로 정해진 멤버들이기 때문에 더욱 각별한 사이라고 했었다.

“그냥 홍보용으로 나왔으면서 나한테 이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어?”

그 기획사에서 나온 연습생 다 데뷔 날 받은 걸로 아는데.

“1군 연습생이 대거로 나와서 제대로 시선 몰이했잖아. 적어도 너는 나한테 이기적이라고 말할 자격이 없어.”

정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재경을 향해 밉게 말을 쏟아낼 때는 언제고 지금은 그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유난히 이상해 보이는 날이었다. 자신은 모를 일이 생겼나 싶지만 이내 재경은 정우의 얼굴을 외면하듯 고개를 돌렸다.

어떤 일이건 상관없다. 그 결론이 자기와 데뷔하고 싶다는 막말이었으니 더 돌아볼 필요는 없었다.

재경은 그렇게 정우를 두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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