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막 본무대를 마치고 내려온 소운이 아래에 있던 하준을 보고 반갑게 달려갔다.
“형, 왜 여기 있어요?”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서.”
“누구요? 정우 형이요?”
하준이 소운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그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정우야 매일 봤잖아.”
“그렇지. 그래도 형 이번에 엄청 멋있는 거 추니까 보고 싶다는 줄 알았어요.”
“응. 멋있고… 어려운 춤이지.”
하준의 뒷말이 나지막하게 흘러나오면서 소운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려워도 정우 형은 잘하니까 더 좋은 거 아닌가? 그런데 하준이 소운에게 몸을 기대며 앞을 가리켰다.
“나는 팀 전체가 잘하는 게 좋거든.”
하준을 따라 고개를 돌린 소운이 반가운 얼굴을 발견했다.
“재경이 형이네요. 재경이 형이 보고 싶었구나.”
“그렇지. 정확하게 말하면 재경이가 속한 팀의 무대가 보고 싶었어. 지금까지 재경이가 참 잘해왔단 말이야.”
팀의 리더가 중하랑 연습생이라는 건 하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저 팀의 분위기부터 모든 걸 맞춘 건 재경이었다. 하준은 재경이 어떤 무대를 만들었는지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다.
그건 단순히 재경이네 팀이 잘하는지 보고 싶다는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었지만, 소운은 다른 데에 신경이 팔려 알아채지 못했다.
“그래도 무대가 끝나면 대기실에서 봐야 하잖아요. 리액션도 크게 해 가면서요.”
소운이 손을 꼼질거리면서 말하지만 하준은 그런 소운에게 기댄 팔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보자.”
“그래도… 어 시작하네요.”
소운은 대기실까지 가는 시간에 놓쳐 버릴 새라 어느새 하준의 옆에 딱 달라붙어 무대를 보았다.
“저 형이 이번에 센터 하는 거 보면 다음에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마 아닐걸. 저 팀에서 재경이가 아니면 안 됐던 거야. 그런 특별한 경우가 자주 찾아오는 건 아니지.”
하준의 말대로 오디션에 참가한만큼 센터를 하고 싶은 사람은 널렸다. 거기다 보컬로 관심이 있는 자들은 당연히 메인보컬을 하려고 할 테고.
“그러니까 지금을 잘 봐 둬. 언제 재경이가 센터를 하겠어.”
“그건 그러네요.”
소운도 어느새 하준에게 기댄 체로 편안히 감상을 시작했다.
* * *
‘뭐지.’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재경은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몸은 알아서 안무를 기억하고 움직이는데 정신은 몽롱하게 떠 있었다.
아까 리허설 때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 그저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어디가 부족한지 살펴보면서 점검하는 시간이었고 이렇게만 무대에 서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본무대를 시작하니 리허설 때와 전혀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남들이 보기에 달라지진 않았지만, 재경의 내면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대형을 바꾸는 그 순간 재경의 몸이 알아서 자기가 가야 할 곳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곧바로 팔을 뻗어 춤을 추고 몸으로 노래의 감정을 표현해냈다. 내가 지금 어떤 마음인 거지, 생각하다가 가사가 떠오르면 저절로 그것을 표현해내고자 몸이 움직였다.
이제껏 연습했던 대로 춤을 추는 와중에 재경이 돌아보지 못한 모든 게 느껴졌다. 팀원과 맞추고 있는 일정한 거리는 물론 한 몸처럼 맞춰가는 동작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은 물론 끝까지 박자를 놓치지 않고 집중하는 그 모든 게 재경에겐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내가 원했던 무대.’
순간 재경은 과거로 돌아온 걸 잊었다. 오디션이라는 것도 잊고 그저 오랜 연습생 생활 끝에 이룬 무대에 오른 거라 생각했다. 이게 재경이 원하던 무대였다. 원하는 대로 몸이 움직여주고 팀원 모두가 한 팀처럼 움직이고 자신 역시 그 안에 속해 들어가는 것.
이런 순간을 위해 그 힘든 시간을 다 버텨온 것 같았다. 점점 숨이 차오르지만, 그것마저도 기분 좋게 다가오고 있었다. 마지막을 향해 움직이는 재경은 이 만족스러운 무대를 했다는 것에 저절로 미소가 새어 나왔다.
그 꿈만 같던 시간은 노래가 끝나자마자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와, 잘했다.”
“진짜 잘했어요.”
마스터들의 환호성에 재경의 정신은 현실로 돌아왔다. 재경은 데뷔했었고 그 아이돌 활동은 온통 엉망이었으며 그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할 때 과거로 돌아온 것. 그리고 아이돌을 그만두기 위해 오디션에 제 발로 찾아온 것까지 제 상황이 떠올랐다.
재경은 씁쓸한 미소를 감추기 위해 땀을 닦는 척 제 입을 가렸다. 제 처지도 잊고 마냥 꿈꿔왔던 무대를 췄다고 좋아하고 있었다니 자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어떤 무대든 결국 재경의 미래에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할 텐데 말이다.
마스터 몇몇의 감상을 끝으로 무대를 내려오는 재경은 주먹을 꾹 쥐며 다짐했다. 다음엔 절대 이렇게 정신을 놓지 말자고.
“재경이 형.”
소운이 재경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대기실에 있지 않고 왜 여기 있는지 싶은 재경은 그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말았다. 옆에 있는 하준에게도 겸사겸사 손을 흔들어 줬고.
“이소운이지?”
옆에 있던 중하랑이 물었다. 이제 확연히 수가 줄어서 서로의 이름은 다 알지만 같은 팀을 하지 않은 연습생끼리는 아직 어색하기 마련이었다.
“네.”
“귀여운 얼굴에 딱히 연습 기간이 오래되어 보이진 않는데 그래도 열심히 하는 게 눈에 보이더라.”
중하랑이 그동안 지켜본 이소운의 이야기에 재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소운은 누구보다 밝은 에너지가 넘쳤다. 그게 카메라에도 잘 들어갔는지 조금씩 인기가 올라가고 있었고.
다른 팀원도 한두 마디씩 소운의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관심이 멀어진 재경은 말없이 따라갔다. 재경은 소운이 어떤지보다 방금 자신이 느낀 감정을 털어 내는 게 우선이었다.
“어서 가자. 우리 얼마 못 쉬어. 곧 결과 발표야.”
재경의 가라앉은 표정에 중하랑이 그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재경이 부담스러워하지 않으면서 그가 잘 쉴 수 있도록 배려해 주기 위해서였다. 중하랑의 말에 팀원이 서둘러 대기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재경은 문득 이번에 함께 무대를 꾸몄던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전부 처음 보는 연습생이었다. 우연이라도 지나가면서 인사하거나 말을 주고받지 않았던 사람들과 한 팀이 되었다. 어색할 수 있는 첫 만남에도 그들은 재경에게 호의를 보여 주며 다가왔다. 그래서인지 재경도 쉽게 그들 사이에 어울릴 수 있었다. 특히나 JT처럼 과거의 인연이 없다는 게 재경의 마음을 놓은 원인이었다. 정우처럼 이미 알고 있던 사람의 과거를 마주치는 건 재경에게 있어 그 사람의 과거와 미래를 떠올리고 맞춰보는 피곤한 일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도화지에 처음부터 끝까지 재경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렸다. 모두가 재경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고 서로 보듬어주며 힘을 주고 있으니 재경은 이번 라운드를 하면서 과거의 자신과 비교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였나.’
유독 무대에 집중이 되고 그러다 보니 그 어떤 무대보다 정신이 붕 뜰 수밖에 없었던 게 이거 때문이었나.
‘다음엔 이런 무대가 없겠지?’
대기실로 들어오며 재경은 무대에 대한 그리움을 털어 내려 노력했다.
* * *
“다들 무대 앞으로 모여주세요.”
스태프의 외침에 모두가 분분히 일어났다. 구석에 앉아있던 재경까지 중하랑을 따라 일어나 그의 뒤를 따라갔다.
무대 아래 아까 소운과 하준이 서 있던 그 자리에 팀별로 일자로 서 있자니 최PD가 나왔다.
“이번 3라운드까지 무사히 끝났네요. 전부 수고하셨습니다.”
3라운드는 특히나 중간에 발표식이 있었기에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그래서인지 연습생들의 표정도 복잡해 보였다.
“다음에 오면 발표식을 진행한 후 합격자 위주로 다시 팀을 꾸려서 무대를 준비하게 되겠네요.”
적어도 중간에 연습생의 수가 줄어들지는 않는다는 의미였다. 또 자신이 남을지 떠날지 모르는 불안한 마음으로 연습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에 대부분의 연습생이 좋아했다.
“그럼 이번 3라운드 1등을 발표하겠습니다. 1등을 한 팀에게는 다음 라운드곡 우선 선택권과 더불어 별도로 너튜브에 홍보 영상을 올려주는 혜택이 부여됩니다.”
누구보다 홍보가 간절한 그들에게 있어 상당히 끌리는 혜택이지만 단 한 사람, 재경에게만은 예외였다. 그냥 누가 1등일까 따위의 생각을 하며 서 있는 게 고작일 정도로.
“그럼 1등 팀을 발표하겠습니다.”
최PD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연습생들이 전부 입을 다물면서 어수선했던 공간에 차분하게 정리되었다.
“화면으로 공개합니다.”
순위에 관심은 없어도 누가 1등 하는지 궁금했던 재경이 고개를 들어 화면을 바라보았다. 다른 팀은 얼핏 지나가면서 연습하는 걸 본 게 전부인지라 누가 1등일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Choose Nine 3라운드 1등 팀은… 축하합니다. 걸그룹의 곡을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든 너 때문에 팀입니다.”
최PD의 외침과 함께 화면에 익숙한 얼굴이 잡히자 재경이 얼굴이 멍하니 벙 쪄 버렸다.
…누가 1등 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