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재경이 복잡하게 얽혀 버린 머릿속을 정리하지 못한 채 혼란스러워했다.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고민했지만 쉽게 질문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떻게 알았어?”
결국 꺼낸 말이 고작 어떻게 알았냐였다. 혹시 이것 때문에 더 연습에 매달린 건 아닌지 싶어 뒤늦게 정우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겉보기로는 심각해 보이진 않지만 감정을 숨길 수도 있기에 조심스러웠다.
재경이 제 눈치를 살피는 걸 느낀 정우가 피식 웃었다. 매번 모든 일에 다 관심 없다는 듯 굴다가도 이럴 때는 꼭 눈치를 본다. 그게 귀여워서 정우는 입가에 웃음을 매단 채로 가벼운 말투로 대답했다.
“하준이 형이 말하던데? 내가 대표 아들이고, 그래서 방송에서 엄청 밀어 주고 있다고. 이번에 발표식에서도 1등할 거라고 장담했다면서?”
“다 읽었구나.”
“그거 이미 여기저기 퍼졌다고도 하던데? 그거뿐이면 말을 안 하지. 하준이 형이 내가 소속사 힘으로 올라갔다는 거 말할 때 엄청 비웃었지.”
“아…….”
소운이 알았는데 하준이라고 모를 리가. 아무리 그래도 바로 정우에게 말했다고 하니 괜히 하준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재경이 속으로 하준의 욕을 하는 동안 정우가 아까 하던 말을 끌어왔다.
“대표 아들이란 대답은 잊었어?”
재경이 정우에게 시선을 피했다.
“그 소문이 진짠지는 관심 없어.”
재경에게도 악소문으로 힘들어할 때가 있었다. 그때 주변 사람들은 재경을 걱정하는 척하면서 진짜인지 넌지시 물어보곤 했다. 처음엔 아니라고 대답했었지만 점점 입을 다물게 되었다. 설명한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고 오히려 기운만 빠져갔으니까.
그래서 정우에게 어떤 말을 하려고 했을 때도 사실인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저 그것으로 인해 정우가 힘들어하고 속상해할 것만 생각했다.
“너 괜찮냐?”
재경은 돌고 돌아 가장 걱정하고 있던 걸 물었다. 어쩐지 정우의 기분이 가장 신경 쓰이고 있었다. 그는 지금도 거울을 통해 정우의 표정을 계속 살폈다.
“신경 안 쓰인다면 거짓말이지.”
정우가 씁쓸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옆에 둔 물병을 가져와 만지작거리며 제게 둘러싼 소문을 생각했다.
“소속사 아들이라서 밀어 줬다는 말은 솔직히 억울하지. 대표 아들이라고 한 번이라도 대접받았으면 이렇게까지 억울하진 않았을 거야.”
정우도 감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재경이 걱정하는 것보다 훨씬 가벼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거는 너한테만 말하는 건데 이번에 나온 JT에서 나만 데뷔조가 아니야.”
재경이 알아듣지 못할까 봐 정우가 친절하게 말을 덧붙였다.
“하준이 형부터 박건후, 민태연 다 데뷔조에 들어가 있다고.”
“너는?”
“나는 진작 탈락이지.”
“왜?”
“대표 아들이라서?”
“뭐?”
이해가 안 된다는 재경의 물음에 정우가 피식 웃었다.
“분명 데뷔하면 내가 누군지 말이 돌 텐데 그걸 감안할 정도로 정말 잘해야 하는 거 아니냐면서 탈락했어.”
재경은 처음 듣는 이야기라 귀를 기울였다. 원래 데뷔조였다는 것도 몰랐지만 거기서 가장 인기가 있던 정우가 빠진 건 정말 생각도 못 했다.
“이 오디션도 내 힘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보여달라고 해서 나온 거야.”
“다른 사람들도?”
“아니? 재밌겠다고 따라 나왔지.”
“…….”
얼굴을 알리려는 것도 아니고 재밌겠다고 나오다니. 재경은 어딘가 의심스러운 듯 보았지만, 정우는 더 말해 주지 않았다. 그저 묘한 미소만 흘릴 뿐.
“이런 말이 나올 걸 예상해서 괜찮아. 오디션에서 나올 줄은 몰랐지만…….”
정우가 고개를 기울여 물을 마셨다. 그는 정말로 깜짝 놀라고 당황스러운 게 아니라 언젠가 언급될 걸 알았기에 무덤덤하게 굴었다.
“내가 반칙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별로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내가 떨어지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그럴 땐 억울해하지만 말고 보여줘야지.”
“강하네. 이정우.”
정우의 말을 들은 재경의 진심이었다.
그런 소문이 돈다고 했을 때 자기는 어땠더라. 억울한 마음에 도망치고 싶었다. 마음은 따라주지 않은 채로 억지로 일정을 소화하느라 컨디션은 더 나빠졌고 졸지에 정신을 잃었다.
그때 재경은 왜 정우처럼 못 했을까?
“무슨 생각해?”
“어?”
“갑자기 표정이 안 좋아서.”
“아무것도 아니야.”
재경이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 과거가 떠올랐다고 말할 게 아니라 화제를 돌렸다.
“연습 더 해야겠다. 보란 듯이 잘해야 할 거 아니야.”
“그래서 하고 있잖아.”
정우가 기지개를 켜며 대답했다. 계속 움직이느라 굳고 떨리는 근육을 매만지다가 갑자기 재경을 돌아보았다.
“너는 연습 많이 했어?”
“갑자기 왜 불똥이 나한테 튀어. 방금도 연습하다 왔거든?”
“늘 나보다 일찍 끝나서.”
“네가 무식하다는 생각은 안 하지?”
재경이 발로 정우의 다리를 툭 쳤다.
“얼마나 연습했는데?”
“많이 했다니까?”
뭘 자꾸 묻냐는 식으로 고깝게 쳐다보는데 정우가 앞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럼 보여 줘라.”
“뭐래.”
“연습 많이 했다며. 어색한 거 없는지 봐 줄게.”
“귀찮아.”
재경은 이제 막 식기 시작하는 땀 때문에 으슬으슬 몸을 떨며 벽에서 등을 뗐다. 아까부터 벽을 타고 온 냉기가 사라져서 좋은데 기댈 곳이 없었다. 주변을 살펴봤지만 적당한 게 없어서 재경은 아예 무릎을 끌어안았다.
“서재경 치사하네, 경쟁자라 이거지?”
정우가 재경의 동그랗게 말린 등을 툭 쳤다.
“무슨 경쟁자야.”
“나 경계해서 안 보여 주는 거잖아.”
“말도 안 되는… 아, 보여 줄게.”
재경이 더럽고 치사하다는 듯 정우를 흘겨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땀도 식어서 서늘해졌으니 한번 움직이면 나아지겠지.
연습실 가운데 서자 정우가 알아서 재경의 핸드폰에서 노래를 재생시켰다. 걸그룹의 곡이 아니라 재경의 조가 약간의 편곡과 함께 새로 녹음한 노래였다.
익숙한 듯 낯선 음이 흘러나오자 재경이 곧바로 곡에 스며들어 몸을 움직였다.
노래에 맞춰 부드럽게 몸을 움직이면서도 힘이 느껴졌다. 거울에 비친 눈빛과 손끝, 그리고 적당한 힘 있는 동작을 보고 있자니 원곡자가 떠오르지 않았다.
섬세한 움직임이지만 절대 여성스럽지 않았고 파워풀한 동작도 노래에 튀지 않게 잘 어우러졌다.
발끝까지 전부 계산해서 넣은 듯 재경 혼자서만 추는데도 그 일련의 춤이 지루하지 않고 하나의 흐름처럼 느껴졌다.
팔을 톡톡 건들며 올라오는 안무에서 재경과 정우의 눈이 마주쳤다. 헤어진 애인이라도 되듯 정우를 노려보는 재경의 표정이 제법 매서웠다.
정우가 그 표정을 보다가 이상한 기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래에 잘 어울리는 표정이지만 어딘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우는 그게 뭔지 알지 못하는 채로 재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노래가 끝나기 직전, 다시 재경과 눈을 마주쳤을 때 알았다.
정우를 보는 재경의 눈빛에 새로운 감정이 느껴졌다. 완전히 돌아선 남이라 밉고 원망스럽지만, 그 이면에 깔린 그리움에 정우가 무의식적으로 제 심장을 눌렀다.
네가 밉지만 그래도 여전히 너를 그리워한다는 애절한 음절이 앞선 모든 감정을 삼켜 버렸다.
노래는 끝났지만, 정우는 여전히 재경을 바라보았다. 언제 그립고 미웠냐는 듯이 평소의 뚱한 얼굴이었다. 제 얼굴에 흐른 땀을 닦아 내고 옷을 펄럭이다가 찬바람에 제 팔을 비벼 대는 재경의 평범한 행동을 보던 정우가 헛웃음을 삼켰다.
“적당히 하기는…….”
9위라고 실망한 재경에게 남들은 더 치열하게 연습한다고 했던 제 말이 떠올랐다. 그땐 재경을 달래 주려 한 말이기도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정말 모두가 치열하게 싸우는 곳이니 한 발짝 물러난 재경보다 더 눈에 띄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오늘 재경의 춤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열심히 안 한 줄 알았더니.”
곡 해석부터 안무, 감정 그 무엇 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아닌 척하지만 무대 하나하나에 쏟는 정성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실제로 중간 점검할 때마다 보면 재경의 조는 모두가 재경에게 반쯤 의지하고 있었다. 저렇게 하면서 눈에 안 띄길 바라다니 이젠 재경이 조금 답답해 보였다.
“다음엔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네.”
왠지 이 무대를 보여 주면 더 인기가 오를 거 같은데. 정우는 조심스럽게 재경의 다음 순위를 예상해 보았다.
* * *
정우를 둘러싼 악소문이 연습생들 사이로 퍼져나가는 동시에 또 다른 소문이 일기 시작했다. 핸드폰은 자유적으로 들고 다닐 수 있는 연습생들이 알아서 그 소문을 찾았다.
정우의 소문을 접할 때만 해도 비웃고 심각하게 여기지 않던 하준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번엔 재경이란다.”
정우가 아침부터 찾아온 하준에게서 핸드폰을 받았다.
“재경이가 아직 자고 있어서 너한테 온 거야.”
어제 새벽에 늦게 들어간 걸 알기에 정우는 대꾸하지 않고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익명을 내세워 제 이야기를 하던 그 사이트였다.
“오디션장에 왔더니 예전에 소속사에서 문제가 많았던 연습생을 만났다. 학교에서는 가수가 아닌 연습생인데도 많은 특혜를 받았다. 툭하면 결석하고 싫은 연습생이 있으면 그를 괴롭히다가 제가 원하는 대로 안 되니 온갖 난리를 치고 나갔다.”
하준이 장문으로 올라온 내용에서 몇 가지를 추려 말하더니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거 진짜 미친 거 아니냐?”
그사이 내용을 전부 읽은 정우가 핸드폰을 되돌려줬다.
“얘도 완전 익명은 아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