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아이돌-57화 (57/125)

57화

“네가 할 수밖에 없다니까?”

본격적으로 연습이 시작되면서 재경은 중하랑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그것을 알게 되기까지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개인적으로 안무를 익히는 시간을 가진 후 단체 연습에 돌입하자마자 알았으니까. 재경은 음원이 흘러나오는데도 춤을 출 생각도 못 하고 거울에 비친 다른 연습생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네가 없어서 나 혼자 그 거리를 걸었어

후렴에서 연습생들이 추는 안무를 보고 있자니 막막한 기분을 느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들이 춰야 하는 걸그룹의 노래의 가사는 연인과 함께 나누던 추억을 혼자서 하게 된다는 슬픈 내용이지만 곡의 분위기 자체는 강렬한 팝 댄스곡이었다.

그만큼 상대방을 원망하기도 하고 그리워하기도 하고 또 미련이 남기도 하는 걸 표현해야 하는 곡이었다.

‘그런데 저게 뭐야. 왜 다들… 힘이 넘치는 건데.’

안무는 얼추 외워서 노래에 맞게 추기는 하는데 어딘가 어정쩡하고 이상했다. 걸그룹의 곡을 남자가 추는 거긴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전혀 들어맞지 않았다.

그냥 완전 다른 곡처럼 느껴지는데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다 보니 그저 망망대해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이걸 건드리자니 일이 커질 거 같고, 그렇다고 모른 척하자니…….

재경의 속마음을 눈치챈 중하랑이 마지막 엔딩 포즈를 잡을 때 씨익 웃었다.

“어때?”

“…걸그룹의 노래에 떼로 춤추는 군인 같은 느낌이에요.”

중하랑에서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재경은 솔직하게 나갔다.

“와. 그거 칭찬이지? 우리의 곡 해석으로 밀고 나가면 좋잖아.”

“전혀요.”

어디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재경이 아예 한 사람씩 콕콕 집었다.

“엄청 딱딱해요. 헤어지자고 한 남자친구 찾아가서 한 방 날릴 거 같고요. 하랑이 형은 정말 춤을…….”

“쉿, 거기까지만 말해도 돼.”

재경의 가차 없는 소감에도 연습생들의 표정은 전혀 무겁지 않았다. 오히려 웃고 있는 게 음흉스럽기 짝이 없었다. 재경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이렇게는 안 돼요. 춤이 너무 딱딱하고 곡 해석으로 밀어붙이기엔 한계가 있어요.”

“그럼 재경이 네가 보여줘.”

중하랑이 뒤로 물러나며 재경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다른 연습생 모두 맞춰서 뒤로 물러나니 저절로 가운데 자리가 비었다. 그 자리를 보며 재경은 어떻게 할까 망설였다. 혼자 춤을 추는 것까지 찍히고 싶진 않지만 이대로 두기에도 난감하고.

“어서 보여주지 않으면 우리는 이렇게 갈 거다.”

중하랑의 속을 긁는 말에서 재경은 그를 흘겨보았다. 실실 웃으며 다른 사람의 속을 뒤집는 게 어딘가 하준과 비슷한 성격의 사람이었다.

“나는 괜찮아. 어차피 춤 잘 못 추니까 내 매력으로 어필하면 돼. 승권이 너도?”

“응, 나도.”

‘이 사람들이 진짜.’

중하랑과 이승권의 장난스러운 대화에 재경이 충동적으로 걸어가 자리를 잡았다. 이대로는 중간 점검에서부터 온갖 지적을 받을 게 뻔하니까 보여 줄 수밖에 없었다.

“노래 튼다.”

음원이 흘러나오자 재경의 눈빛이 바뀌었다. 재경은 정확한 박자와 함께 안무를 췄다. 긴 팔다리가 쭉쭉 뻗어나갈 땐 시원하게 느껴지다가 웨이브에서는 부드러운 동작으로 바뀌는데 그 강약 조절이 확실하면서도 물 흐르듯 이뤄졌다. 그리고 엉덩이를 톡톡 치는 부분에서는 조금 틀어서 제 팔을 톡툭 두드리는 변형 안무가 나왔다.

“그럴 줄 알았어. 쟤 분명 연구 많이 했어.”

중하랑이 재경의 춤을 평가하듯 팔짱 낀 채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안무를 변형한 것만이 아니었다. 노래 중간중간 가면을 쓰듯 바뀌는 재경의 눈빛에 그 혼자 춤을 추는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안무를 그냥 외운 정도가 아니라 제게 맞는 옷을 입은 듯하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우리의 센터야.”

중하랑의 감탄에 이승권이 동조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어울리네.”

“나 쟤랑 꼭 한 번 같이 춤을 추고 싶었어. 왠지 같이 추면 멋있을 거 같아서.”

이제껏 조용히 재경을 지켜보던 한시우가 말을 보탰다.

연습생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에 서로의 실력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한시우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매력을 어필해도 기본 실력이 밑바탕에 깔려 있지 않은 이상 오디션에서 올라가길 바라는 건 막연한 기대와 같았다.

그런 점에서 서재경 연습생은 조용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눈에 띄는 연습생이었다. 노래와 춤, 외모까지 뭐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 그래서 서재경을 경계하는 연습생이 많았지만, 한편으로는 그와 한 팀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한시우는 엄밀히 따지면 재경과 한 무대를 잘 만들고 싶은 부류였다.

“보면 볼수록 질투가 아니라 같이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지.”

한시우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이 모두 끝나고 다들 모여 마지막 한 사람을 기다리던 때, 그들도 그 사람이 서재경이 될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가볍게 서재경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던 건데 의외로 다들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질투 이전에 한 번은 같이 해 보고 싶다, 당연히 경쟁자이긴 해도 한 번쯤 어울리고 싶다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나도 그래. 쟤가 서는 무대는 왜 이렇게 멋있는 거야. 나도 같이 서면 멋있어지려나 싶었지.”

“그래서 이번에 같이 하잖아. 충분히 괜찮은 무대가 나올 수 있을 것도 같고.”

이승권이 재경의 춤을 보며 중얼거렸다. 중하랑도 같은 생각인지 고개를 끄덕였다가 괴로운 듯 몸부림쳤다.

“아니 근데 쟤는 왜 저렇게 잘 출까?”

“그러는 너는 왜 그렇게 못 출까?”

이승권의 강한 한마디에 중하랑이 그의 목을 죄며 헤드록을 걸었다. 상대적으로 어깨가 넓고 덩치가 있는 이승권에 비해 호리호리한 중하랑이 매달려 있었지만 누구도 그들을 말리지 않았다.

그사이 노래가 끝나고 재경이 살짝 들뜬 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자신이라도 모든 춤을 다 잘 표현할 수는 없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은 게임에서 질 때마다 이 춤을 어떻게 춰야 할지 고민했다는 거였다.

여성스러운 춤을 그대로 출 순 없고 다행히 댄스곡의 비트가 강렬해서 조금만 비틀면 될 거 같단 생각이 들었다. 거울을 통해 봤을 때 나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의 의견이 중요했다.

“좋았어. 진짜 잘했다. 고민 많이 했겠네.”

중하랑의 칭찬에 재경은 땀을 닦으며 멋쩍은 감정을 숨겼다.

아닌 척하면서도 곡을 소화하고 싶은 마음에 고민하던 게 티가 났구나.

“저도 아직 부족해요. 조금 더 만져야 할 거 같아요.”

“그거야 시간이 있으니까. 우리의 센터, 그리고 메인보컬. 다음 연습 가자.”

중하랑이 장난스럽게 주먹을 움켜쥐며 외치는 소리에 재경이 휘청거렸다.

춤 연습 다음은 노래 연습이었다.

*  *  *

“여기 진짜 궁금했었는데. 멤버들은 진짜 다채롭네요.”

마스터이자 보컬 트레이너인 제이나가 재밌다는 듯 연신 멤버들을 돌아보았다.

“마지막 합류가 서재경 연습생이었다면서요?”

“…네.”

“아이고. 표정에서 답이 나오네. 그래도 이왕 된 거 본때를 보여주세요. 감히 서재경 연습생을 제치고 게임을 이긴 사람들한테.”

재경이 게임 꼴찌한 걸 들은 게 틀림없었다.

“풉.”

뒤에서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이승권의 소리 같은데. 재경은 저절로 찡그려지는 표정을 악보로 가렸다. 그래봐야 트레이너도 다 봤겠지만.

보컬 트레이너가 악보를 보다가 중하랑에게 물어보았다.

“걸그룹 곡인데 원키로 하려고?”

“그게, 두 키 낮게 해 봤는데 뭔가 느낌이 안 살아서…….”

그들도 키를 낮춰서 연습해 보긴 했었다. 부르기도 한결 편하고 딱히 이상한 건 아니었는데, 기존의 노래보다 리듬감이 살지 않았다.

“제대로 해 보겠다는 각오야?”

“그렇습니다.”

“키를 변경하지 않은 건 괜찮지만 어디까지나 소화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인거 알지?”

“노력하겠습니다.”

중하랑의 결연한 대답에 보컬 트레이너가 웃으며 들어보자고 했다. 음원이 흘러나오면서 가장 먼저 톤이 나온 이승권이 첫 마디를 불렀다. 시작은 안정적이었고 정확히 음정을 잡고 나가 다음 사람이 이어 부르기도 좋았다.

그러나 바로 다음 파트를 맡은 박주형이 불안한 음정으로 노래를 부르고 현시우와 박민호는 아슬아슬하게 제 파트를 겨우 감당하면서 노래가 점점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랩을 맡은 중하랑의 차례는 오지 않았지만 재경은 착잡한 기분이었다. 노래 연습을 할 때도 느낀 점이긴 했었다.

어떻게든 음정을 맞추고 연습했지만 시간의 한계가 있었다. 그사이 메인보컬인 재경의 순서가 다가왔다.

나는 이렇게 너를 생각하는데

너와의 기억을 잊지 못해 그 거리를 헤매는데

재경은 원키 그대로 고음을 올리면서도 힘든 기색 없이 노래를 불렀다. 가사도 외웠기에 악보를 보지 않는 대신 눈을 감고 부르며 흔들리는 감정을 되잡았다.

재경의 노래가 통한 덕분인데 바로 뒤에 따라오는 현시우가 아까보다 안정적으로 파트를 이어받았다.

노래가 끝나고 재경은 어떤 쓴소리를 들을지 마음 졸이며 악보를 집었다. 그리고 고개를 드는데 그를 보고 있던 보컬 트레이너와 눈이 마주쳤다.

“여기는 진짜 서재경 연습생이 없으면 안 되겠다. 흔들린 감정도 잡아 줘, 음정도 잡아줘 고음 소화도 잘해 줘. 혼자 하드캐리 하네. 너무 든든한데?”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엉망이었다고 말하는 건데. 아, 이승권 연습생 목소리도 노래에 잘 어울렸어요.”

중하랑의 뻔뻔한 대답에 보컬 트레이너는 지적할 마음이 사라졌는지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을 흘렸다. 이미 자기들이 부족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더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칭찬 비슷한 평가를 들은 재경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돌아오고 단 한 번도 음정이 나가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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