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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아이돌-56화 (56/125)

56화

카메라맨은 묘한 미소만 지을 뿐 재경의 물음에 답해주지 않았다. 그저 카메라를 더 가까이 들이밀고 실시간으로 반응을 딸 듯이 굴었다.

알고 있으면 그냥 말해주시지. 재경은 치사하다고 여기면서도 그게 방송이라 더 물어보지 않았다. 대신 긴장된 몸을 이완시키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노래는 결정되었고 같이 무대에 올라갈 팀을 확인하는 일만 남았다. 무겁게 눈을 감았다 뜬 재경이 드디어 문고리에 힘을 줘 밀어버렸다.문이 활짝 열리면서 반원을 그리듯 앉아있던 5명의 연습생이 한눈에 들어왔다. 재경의 눈동자가 빠르게 그들의 면면을 살폈다. 재경이 그들을 보듯 그들도 마지막 합류 멤버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우와.”

“실력자다. 실력자.”

“아, 다행이다.”

“짐작했지만 기쁘다.”

아까 마지막 게임에서 본 사람도 있고 처음 본 연습생도 있었다. 5명의 얼굴을 살피면서 재경은 저도 모르게 정우가 없음에 아쉬움을 느꼈다.

‘같이 안 하면 좋은 건데 내가 왜 이러지.’

떨어지자고 할 땐 언제고 지금은 같이 못한 걸 아쉬워하고 있으니 변덕스럽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재경도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다른 곡도 아니고 이번 곡을 같이 하면 좀 좋았겠냔 말이다.

정우가 없는 5명의 환호를 받으며 재경은 터덜터덜 걸어 들어갔다. 카메라맨의 숨길 수 없는 웃음소리는 못 들은 척 한 귀로 흘렸다. 카메라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걸 보고 재경이 적당히 끝에 엉덩이를 내렸다. 그러자 바로 옆에 있는 연습생이 재경을 빤히 보다가 손을 흔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같이 게임할 걸 그랬네요.”

마지막 게임에서 재경이 정우와 하기 싫어서 먼저 말을 걸었던 그 연습생이었다. 재경과 하기 싫어서 냉큼 다른 연습생과 짝을 이뤘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었다. 재경과 짝을 짓지 않아도 이렇게 될 운명이었나 보다. 그건 남자도 비슷한 생각인지 살짝 민망한 미소를 지었다.

“그냥 같이할 걸 그랬나? 아, 아니다.”

남자가 해맑게 웃으며 제 옆의 남자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어차피 너도 여기 있으니까 그게 그거다. 그치, 승권아?”

남자가 같이 짝을 이뤘던 이승권을 보고 말했다. 그에 다소 무뚝뚝해 보이는 이승권은 씁쓸하다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게 벌써 실망하지 말고. 예쁘게 추면 된다니까?”

“이 등치에 어떻게 예쁘게 춰. 중하랑 너는 그 긍정 마인드도 때를 가려서 해.”

“춤에 등치가 무슨 상관이야. 그러면 나는 예쁘게 출 거 같아?”

“넌… 그래. 너보단 잘하겠다.”

“그렇지? 너 그래도 바닥은 아니다? 이 형이 베이스 깔아 줄게.”

이승권의 목을 조르듯 팔을 굽힌 중하랑이 나름대로 위로 아닌 위로로 그를 달래주었다. 그 짧은 대화에 중하랑과 이승권에 대해서 파악할 수 있었다.

긍정적인 성격의 중하랑 연습생과 걱정은 되지만 묵묵히 받아들이는 이승권을 보고 있으니 지루하지 않았다. 그 사이 중하랑과 대화를 나누던 이승권이 재경을 보고 고개를 끄덕여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정우랑 동갑이라고 들었어. 걔랑 처음에 한 방이었거든. 나는 21살이야.”

“네, 안녕하세요.”

“나도 21살.”

재경과 이승권을 번갈아 바라보던 중하랑이 끼어들며 자신을 가리켰다.

“그리고 저기 민호는 20살, 시우 형은 23살, 주형이 형은 24살.”

이름과 나이를 들으면서 재경이 점점 무너지려는 입매를 꾹 다물었다. 그리고 마지막 머리를 밝게 탈색한 박주형이라는 연습생은 아예 5살 차이가 나면서 재경이 막내가 되어 버렸다.

“잘 부탁한다, 막내야. 특별히 형이라고 불러도 돼.”

중하랑이 나이로 서열을 정리하며 재경의 나이를 콕 집었다. 중하랑의 웃음을 따라 다른 연습생까지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재경을 바라보았다. 네가 우리의 막내야, 싶은 눈빛에 재경은 구석에 몰리는 기분이었다.

“잘 부탁합니다.”

포기한 재경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곡 때문에 심란할 줄 알았던 조는 의외로 밝은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 분위기에 힘입어 하랑이 나름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내가 뒤에서 3번째이긴 하지만 나름 이 곡을 선택하고 온 거 알죠? 두 곡이 남아 있었는데 다른 곡이 너무 어려워서 이걸 택한 거란 말씀.“

그래서 정우에게 다른 곡을 택할 기회가 있었구나. 재경은 남는 자리로 오게 되었으니 나름 정우까지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가위바위보라도 좀 잘했다면 정우 대신 자기가 다른 자리로 갔을 수 있…….

문득 재경이 이승권에게 생각이 미쳤다. 중하랑이 뒤에서 3번째라면 이승권은 4번째라는 건데 그도 두 곡 중에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곡을 선택했다는 건데 왜 그랬을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이 노래를 원하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재경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이승권이 그에게 슥 눈길을 주었다가 자연스럽게 돌렸다.

‘나라면 다른 곡으로 갔을 거 같은데. 하긴, 뭐 얼마나 선택할 곡이 많다고.’

재경은 그가 왜 그랬을까 고민하다가 생각을 지웠다. 다른 사람의 처지까지 생각하기엔 제가 짊어진 것만으로도 감당하기 벅찼다.

”그런 의미로 잘 부탁해, 재경아.“

”…네?“

못 들었는데 뭘 잘 부탁한다고? 재경이 중하랑에게 되물었지만, 그는 두 번 말해 주지 않았다.

*  *  *

“리더를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해 보겠습니다.”

중하랑이 경건한 표정을 흉내 내며 한 손을 들었다. 그리고 이리저리 돌아보며 카메라에게 자신을 비췄다. 계속 분위기를 주도하더니 중하랑이 리더가 되는데 누구도 이견을 표하지 않았다.

“그럼 가장 중요한 센터를 뽑을 건데요. 하고 싶은 사람?”

재경은 누가 센터를 하든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보았다. 그런데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서로 눈치를 보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이런, 어쩔 수 없네요. 이럴 땐 추천하는 방법을 쓸 수밖에 없겠죠.”

중하랑이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며 볼펜으로 센터를 콕콕 찍었다. 그러자 이승권이 곧바로 손을 들며 말했다.

“서재경을 추천합니다.”

“네? 아니, 저는 센터할 생각이 없는데요.”

재경이 곧장 제 의사를 표현했지만 중하랑이 볼펜을 좌우로 흔들었다.

“일단 추천제니까 다른 사람 의견도 들어볼게요.”

“나도 서재경 연습생이 좋을 거 같아요. 예전에 미션할 때 춤췄던 게 떠올라요. 그때 노래에 맞춰 달려 나가서 춤춘 거요.”

재경이 제 발에 도끼 찍었던 그 미션이었다.

“여기서 춤을 잘 추는 사람이 안정적으로 센터를 맡아주는 게 나을 거 같아요.”

“저도 센터에 욕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번만큼은 특별히 서재경 연습생에게 양보하겠습니다.”

재경은 전혀 원하지 않는 추천이 잇따르고 있었다. 전부 자신을 가리키고 있으니 재경은 마지막 동아줄이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중하랑을 보았다. 재경의 도와달라는 눈빛을 읽은 중하랑이 웃음기를 지우고 진지하게 대꾸했다.

“여기서 제일 춤을 잘 추는 서재경 연습생이 센터를 할 수밖에 없어요.”

“춤은 연습하면 되는데요.”

“그거야 연습하면서 보면 되는데 당장… 너뿐이야.”

존댓말과 반말을 오가며 중하랑이 재경의 어깨를 툭툭 내려쳤다. 마치 센터에 재경이 들어올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재경은 자신이 없는 사이에 자기들끼리 뭘 짰나 싶어 둘러보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저는 진짜 센터를 하기가…….”

“그러니까 지켜보라고. 네가 할 수밖에 없다니까? 그다음 메인보컬을 뽑아볼게요.”

“추천입니까?”

누군가의 물음에 재경은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  *  *

밖으로 나온 재경이 때마침 옆 방에서 나온 정우와 눈이 마주쳤다. 정우가 들어간 방에 붙은 곡명을 보고 어떤 곳이 마지막까지 남았는지 확인했다. 여기로 들어갔구나.

파워풀하면서도 고난도 안무가 많아 중하랑 연습생이 피한 이유를 알았다. 어쨌든 중하랑 연습생이 걸그룹 노래로 오게 되면서 정우에게는 좋은 일이 되었다.

“정말 이해가 안 되어서 그러는데…….”

재경의 힘없는 목소리에 정우가 재경과 그가 나온 문을 번갈아 보았다. 재경은 정우가 자신을 보지 않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보통 자기가 센터하고 싶고 메인보컬하고 싶지 않아? 응? 왜 다들 싫다고 그러지?”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가 안 되는 시간이었다. 이곳은 누구보다 눈에 띄어야 하는 오디션이었고 서바이벌이었다. 누군가 올라가려면 다른 사람을 누르고 가야 하기에 서로 센터하겠다는 경쟁도 치열해야 했다.

센터만이 아니었다. 메인보컬도 킬링 파트도 전부 위로 올라가기 좋은 아이템인데 방금까지 재경은 그것을 바닥에 떨군 채 주울 생각이 없는 회의만 주구장창 하고 나왔다.

“게임을 해도 맨손으로 싸우는 것보다 아이템을 장착하는 게 낫잖아. 상태창도 보고 다른 사람보다 더 멋진 갑옷도 입고. 응? 그런데 왜 자기가 안 입고 남한테 입혀주려고 난린데.”

어느새 재경은 정우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이 혼잣말을 떠들어댔다. 그냥 하소연이었다. 다 하기 싫다고 하는 통에 그놈의 추천제를 계속 써대며 가만히 있으려는 재경을 자꾸 끄집어냈다.

열심히 떠들다가 제풀에 지친 재경이 입을 다물자 가만히 듣고만 있던 정우가 물었다.

“그래서 네가 센터고 메인보컬이야?”

“…….”

재경의 입이 조가비처럼 다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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