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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아이돌-52화 (52/125)

52화

마스터의 질문에 재경은 제 솔직한 마음을 감추고자 아메리카노를 들먹였다. 원래도 잘 마시지 않고 힘들다고 마실 것도 아니지만 그냥 그렇게 대답했다. 아니면 재밌었다고 대답할 거 같았다.

어느새 두 번째 무대를 마친 재경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벌써 두번째였다.

재경은 무대에서 춤을 추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아이돌로 데뷔하고도 트라우마로 계속 실수가 반복되던 때와 달랐다. 그러나 그것을 오로지 즐길 수 없기에 재경은 그걸 외면하려고 더욱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 한 손이 재경의 주먹을 감싸왔다. 주먹의 떨림을 잡아주고 이내 살을 파고든 손톱을 떼어냈다.

재경이 제 손을 바라보니 손을 잡았던 정우가 그 위로 카페에서 사온 음료를 얹어줬다.

“목마르다며.”

아메리카노였다. 재경이 얼떨결에 그것을 쥐기는 했지만 눈만 멀뚱멀뚱 뜬 채 바라보았다.

“안 마셔?”

“어…….”

어쩐지 아까 무대가 끝나자마자 사라지더라니 이걸 사온거였다.

일단 생각하고 사다준 성의가 고마워서 재경이 엉거주춤 빨대를 물었다. 그 상태로 정우를 향해 눈을 위로 뜨니 마실 때까지 보고 있을 작정인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재경은 어쩔 수 없이 숨을 들이키듯 안의 음료를 빨아들였다. 미성년자라서 커피를 안 마신 것보단 돈이 없어서 아예 배제하던 거였다. 그렇다고 아메리카노가 맛있는 것도 아니니 입맛을 들이지 못했는데 이렇게 먹게 되었다.

그런데 음료수가 들어온 순간 재경이 눈썹을 찡그렸다. 자신이 생각한 맛이 아니었다.

달달한 음료가 목을 타고 넘어가지 재경이 빨대를 놓고 정우에게 물었다.

“이거 아이스티잖아.”

“아메리카노는 20살 되면 마셔. 커피나 술은 다 나이 되면 마시는거야.”

재경도 딱히 커피를 좋아하지 않지만 정우의 잔소리가 황당하게 들려왔다.

“훈장이야 뭐야.”

그래서 중얼거리고 있으니 정우는 제가 생각해도 웃겼는지 작게 웃으며 자신의 음료수를 마셨다. 재경과 마찬가지로 아이스티인가 싶은데 미묘하게 색이 달랐다.

“너는 뭐 마시냐?”

“아메리카노.”

뻔뻔한 대답도 모자라 정우가 재경이 들고만 있는 음료수를 마시라며 톡톡 쳤다.

“가자.”

호텔이 있는 숙소로 가서 짐을 가지고 나와야 모든 활동이 끝이었다.

*  *  *

“이번에도 수고하셨습니다.”

최PD의 인사에 연습생들이 후련하다는 듯한 반응들을 보였다.

“1등을 한 홍보팀 축하드리고요. 각자 3만표의 득표수로 좋은 결과 있길 바랍니다.”

재경은 아까 순위 발표에서 1등읗 했을 때보다 지금 더 심란한 듯 굴었다. 자신이 받은 3만표를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은 마음이지만 그것을 입밖에 내뱉진 않았다. 그저 이번에 무대에 올라선 모두가 3만표보다 더 많은 표를 받길 바랄 뿐이었다.

“이번에는 휴식 기간이 조금 짧습니다. 3일 후에 다시 들어와서 연습하다가 발표식과 방송을 함께 보겠지만 이제부터는 특히나 시간싸움인 걸 알아주시고 푹 쉬다 오세요.”

최PD가 두 번째 합숙까지 잘 마무리했다며 모두에게 같은 종이가방을 안겨주기도 했다. 재경도 그것을 받아들고는 곧바로 몸을 돌렸다.

밖으로 나오자 재경을 발견한 양채준이 다가왔다. 재경은 양채준과 더 대화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재경이 형." 불러오는 양채준의 부름에 재경은 한숨을 쉬며 그를 보았다.

“왜 저랑 안 해줬어요.”

양채준의 원망스러운 듯한 말투에 재경이 반쯤 틀었던 몸을 온전히 그에게 돌렸다. 양채준이 같이 짝을 하자고 했을 때 재경이 제비뽑기로 에둘러 거절한 걸 말했다.

양채준은 그것으로도 모자라 대놓고 실망한 얼굴로 재경을 바라보았다.

“이번에 같은 조해서 좋았는데 형은 아니었어요?”

“채준아.”

“네?”

재경은 양채준을 만난 김에 마음에 담아두었던 물음을 건넸다.

“혹시 나한테 배우려고 태연이 밀어냈어?”

“그게 무슨…….”

양채준이 당황한 듯 눈동자를 굴렸다.

“태연이가 이번에 안무 바꿨잖아. 그래서 걔가 제일 잘 아는데 왜 그랬어?”

“형 지금 무슨 말하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그렇게 화제성이 높지 않아. 그런데 뭐하러 그랬어.”

재경의 말에 양채준이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다시 재경을 돌아보았을 때의 양채준은 거짓으로 지어보였던 표정을 지웠다.

“민태연 진짜 입 가볍네. 하긴 내가 걔 자리를 빼앗으려는 걸 아니까 쫄렸겠지.”

카메라가 없는 걸 확인한 양채준은 이죽거리는 표정 그대로 재경을 쏘아보았다. 이것 때문에 촬영이 끝나고 부른 거구나. 재경은 양채준의 달라진 표정에도 덤덤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양채준이 재경의 놀란 모습을 보지 못한 게 아쉬웠는지 잔뜩 그를 긁을 듯 말했다.

“형은 다 받아줄 것처럼 굴다가 마지막에 뒤통수를 쳐요?”

“네가 누군지 기억났으니까.”

“절 알아요?”

“몰랐었지.”

양채준이 자신을 가리켰지만 재경의 말로는 뭐든 시원하게 나오는 게 없어 곧바로 제 말만 떠들었다.

“제법 이름을 알려서 붙은건데 끝까지 잘해주지 그랬어요. 뭐, 그래도 3만 표는 받았으니까.”

양채준은 재경에게 제 속을 조금도 감추지 않았다. 이미 며칠 어울리는 동안 재경의 성격을 파악한 듯 굴었다. 아, 이 형 진짜 만만하구나.

이미 붙을 대로 붙었고 계속 붙어봐야 같은 장면을 지겹게 여겨질 수도 있으니 재경의 이용 가치는 끝이었다. 그가 1등이라도 하면 모를까 당장은 다시 재경과 어울릴 일은 없었다.

이제 필요없게 되었으니 양채준이 흔쾌히 손을 흔들었다.

“그동안 호구 잡혀줘서 고마웠고 다시 만나면 반갑게 인사해요.”

재경은 양채준의 얄미운 말투에도 받아치는 것 없이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혼자 남게 된 재경은 다시 제 집쪽으로 몸을 돌렸다.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걸 알고 분노하기라도 하라는 듯 양채준이 계속 재경을 흔들었지만 분노는커녕 조금도 화가 나지 않았다.

위로 올라가려고 갖은 방법을 쓰는 건 오디션만이 아니었다. 연예계에 들어서는 순간 뜯어먹힐 각오를 하고 달려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잔뜩 뜯긴 재경은 지금 이 순간 자체도 그냥 그런 일이었다.

뭐, 조금 씁쓸하긴 했지만.

*  *  *

다행히 알바는 잘리지 않았다. 2주간 못 나갈 거 같다고 했을 때 불편해하던 사장은 재경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재경이 빠진 자리를 누가 채워야 했기에 한마디 할 줄 알았던 알바생들도 아무말 하지 않았다.

왜 그런지 몰랐는데 생각보다 이유를 빨리 알게 되었다.

창고를 정리하고 주방에서 일을 해야만 했던 재경이 홀로 나오게 되었다. 얼떨결에 서빙을 맡아서 하는 동안 손님 몇명이 재경을 알아보게 되었다. 그럴 때마다 다른 알바생이나 사장의 눈빛이 달라졌는데 오디션에 나간 걸 뒤늦게 알았던 것 같았다.

결국 홀에서 원치 않는 시선을 받으며 일을 한 재경은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이젠 학교든 알바하는 음식점이든 다 재경을 알아보고 관심을 보였다.

무거운 어깨를 두드리며 집으로 들어온 재경은 문득 불을 안 끄고 나갔나 고민하다가 현관 앞에 놓인 구두를 발견하고 번쩍 고개를 들었다.

“이제 오니?”

오랜만에 본 엄마가 드라마를 보며 사과를 깎아먹고 있었다.

“어, 언제 왔어?”

“아까. 와서 보니까 집에 아무것도 없더라. 너 집에서는 밥 안 먹지?”

“어. 그리고 합숙하고 온 지 얼마 안되기도 했고.”

재경은 어색하면서도 떨떠름하게 받아쳤다. 제 인생에서 유일하게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오랜만에 만난 게 원망스럽기보다 반가운 마음이 더 커서 재경은 서둘러 안으로 들어왔다.

“너 생각보다 이름 알려졌더라?”

엄마의 흘러가는 듯한 말에 갈아입을 옷을 꺼내던 재경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엄마가 사과를 아삭아삭 씹어먹으며 재경을 돌아보았다.

“나는 별거 아닐 줄 알았는데 제법 인기가 있더라고.”

매회차 방송할수록 점점 인기가 많아지고 있었다.

“그거 뭐라더라, 자진하차. 그래 자진하차도 되니?”

“자진… 하차?”

“어. 그렇게 말하던데?”

“…누가?”

“실장님이.”

재경이 순간 옷을 놓칠 뻔할 정도로 크게 놀랐다.

“실장? 실장 누구? 엄마 아는 실장이 한둘이야?”

“누구긴, 너 음반 내줄 사람이지. 안그래도 네가 제법 유명해져서 더 좋아졌다고 하더라.”

“그 사람이랑 계약 끝난 거 아니야?”

“어머, 얘는. 안 그래도 계약 안 하겠다는 거 내가 싹싹 빌었어.”

계속 사과를 씹어대는 통에 발음이 뭉개졌지만 알아듣는 건 문제없었다. 다만 그것을 들은 재경은 입술을 꾹 깨물며 소리치고 싶은 걸 참아야만 했다.

“…자진하차 안 돼. 계약서도 썼고 나도 그만두고 싶지 않아.”

재경은 목소리를 억누르고 말했다.

“그래? 아프다고 하면 안 되나?”

“안… 되지. 그리고 내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데.”

원래는 한 달만 버틸 생각이었지만 재경은 거짓말에 거짓말을 보태기 시작했다.

“끝까지 올라가야지. 그러려고 더 열심히 하는 건데 왜 하차해.”

“뭐, 네가 데뷔할지 안 할지는 봐야 아는 거니까. 하긴 그거로 아이돌이 되어도 좋고 아니면 실장님이랑 계약해도 좋으니까.”

대수롭지 않은 듯한 목소리에 재경은 옷을 꼭 쥐기만 할 뿐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냥 인연을 끊고 살았다면 더 좋았을까? 적어도 이런 불행을 겪진 않을 테니까.

하지만 아직 재경은 누군가를 끊어낼 자신이 없었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람들조차 다 자신을 외면하고 미워하는 세상이었다. 꼽사리 끼었다고 눈치 주던 사람들 사이에서 적어도 엄마는 재경이 가수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잘한다고 칭찬해주었다.

충격 때문인지 자신이 과거로 돌아왔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재경이 망연자실하게 서 있다가 TV에 비친 제 얼굴을 발견했다.

정우에게 잡혀서 벽에 몰린 상황이 화면에 나오고 있었다. 그것을 본 재경이 탁 풀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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