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2라운드 무대에 올라서는 것과 동시에 두번째 합숙이 끝나는 날 재경은 바쁜 시간을 보냈다. 아침에 일어나서 긴 시간 메이크업을 한 후 리허설을 했다. 특히나 신경쓰는 파트에서 정우와 눈을 마주치면서도 최우주와 짝인 된 양채준의 시선에 집중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대기실에 내려와 다른 팀의 무대를 보는 동안 재경은 계속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우리 차례야.”
정우가 팔을 잡아끌 때는 반쯤 정신을 놓고 그가 가는데로 걸어갔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가 신호에 맞춰 올라가세요.”
스태프의 말도 흘려들은 재경은 무대의 세팅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계속 생각에 빠졌다.
‘진짜 웃으라고…….’
정우가 하도 지적하는 게 거슬려서 받아쳤지만 솔직히 재경도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무대에서 실수할 때는 많았지만 재경이 의도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엔 자신이 할 수 있는데 더 안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라 찝찝했다.
정우의 말을 힌트 삼아 고민했다. 굳이 좋아하는 사람이 고백할 때가 아니더라도 비슷한 상황을 떠올리면 될 거 같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 떠오를 게 없었다.
연습생으로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시간의 연속이었고 아이돌이 되었을 땐 힘들고 벅찬 나날이었다.
할머니와 살 때를 떠올려야 하나 싶을 정도로 계속 과거를 거슬러가던 재경이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왜 웃어야 하지?’
정우가 처음 시범을 보일 때 웃어서 그런 거 같았다. 자신을 소개하라는 의미에서 상대방에게 호감을 보이고자 그런 것이지만 재경은 사정이 달랐다. 잘 보일 마음이 없었다. 재경은 앞에서 얼쩡거리는 장신의 남자를 보았다. 정우가 재경의 시선을 눈치채고 물었다.
“생각났어?”
“어.”
“역시 내가 고백하는…….”
“닥치고 올라가.”
재경이 정우의 등을 주먹으로 치고 계단위로 밀어버렸다. 거칠게 밀어버린 게 아니라 정우는 재경에게 기대서 올라갔다. 정우를 받치게 되어버린 재경이 그가 얄미웠지만 무대에 올라가자 바로 표정관리에 들어갔다.
무대 시작에 앞서 일렬로 서자 심사위원을 했었던 마스터들이 홍보팀의 면면을 보고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여기 많네요.”
“그러게요. 저도 인터넷 봤어요. 아주 핫한… 연습생이 여기 많이 모여 있어요.”
“우리가 기대하는 친구들도 있고요.”
“여기 큰일이네. 무대를 적당히 하는 걸로는 성에 안 차겠는데요?”
한 마스터의 말에 재경이 슬쩍 정우를 보았다. 얘 때문에 무대를 잘해야되네, 생각했다.
“서재경 연습생,”
그러다 불현듯 제 이름이 불리자 재경이 고개를 들었다.
“어딜 봐요?”
“어… 이정우 연습생 때문에 더 잘해야 하는구나 해서…….”
“응 아니야. 이정우 연습생만이 아니잖아요. 서재경 연습생 탐내던 팀장이 많았는데 뭐.”
마스터는 그 안에 재경도 포함된 듯한 말을 던졌다. 옆에서 다른 마스터가 윤하준 연습생도 있다고 말을 덧붙였다. JT 3명은 반칙이지. 등의 말도 나오면서 마스터들이 저들끼리 떠들었다. 그러다 다시 재경을 보고 떠오른 게 있다는 듯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방송 보니까 서재경 연습생이 첫 무대 서기 전에 대기실에서 졸았던데요?”
“그때 왜이리 어리둥절해하나 싶었어.”
“안그래도 나도 그게 일부러 그러나 했다니까요.”
중간 점검때 아무 말 안 한 이유가 있었구나. 방송에서 자신이 중간부터 노래를 한 이유를 보여준 것이다. 재경은 그때 이야기에 쑥쓰러운 듯 마스터들과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제 이야기가 나오니 불편하고 또 어쩔 줄 몰랐다. 다행히 이후로 몇 마디 더 주고받더니 대표 마스터가 마이크를 들었다.
“무대 볼게요.”
내 이름을 불러줄래, 의 노래의 원곡자는 7인조 보이그룹이었다. 미디엄 템포로 격한 안무가 들어가지 않았지만 대신 그루브한 리듬에 맞춰 웨이브가 많이 들어갔다.
그것을 태연은 싹 갈아버렸다. 지겨울 수 있는 웨이브를 삭제하고 원래도 작은 동작을 더 축소했다. 처음의 컨셉에서는 딱 맞는 안무이기는 했다. 작은 디테일을 살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었다. 배경으로 올라온 벚꽃나무와 벚꽃이 휘날리는 영상은 봄의 시작과 같았다. 새로운 시작과 함께 설레임을 느낄 수 있는 분위기로 바뀌면서 무대를 꾸미는 모두의 얼굴에 한줄기 미소가 배어들었다.
첫 시작은 하준이었다. 중앙에 선 하준을 향해 조명이 모여들자 특유의 부드러운 눈웃음과 함께 몸을 움직였다.
날 보고도 못 본 척 지나치는 네 뒷모습
그런데 어쩌지
나한테는 네 속이 다 보이는데
가사에 맞춰 하준의 움직임에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역시나 긴장하지 않고 무대를 즐기는 그 덕분에 다소 뻣뻣했던 다른 사람들의 몸에 힘이 빠졌다. 그 다음 이어지는 단체 군무와 함께 정우가 하준의 자리로 들어가 수려한 춤을 선보였다.
부드러움 속에 살아있는 몸선이 드러났고 보일 듯 말듯한 그의 미소가 점점 노래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정우의 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태연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살랑 손을 흔들었다. 윙크까지 건네며 사라지는 모습에 특유의 사랑스러움이 묻어나왔다.
날 원한다면 내 이름을 불러
언제든 네게 돌아설 준비가 되어있어
재경은 가사에 맞춰 손등으로 턱을 살짝 쓸어버리며 자연스럽게 카메라와 눈을 마주쳤다. 한쪽 눈을 가늘게 뜨며 카메라를 응시하던 재경이 곧바로 돌아섰다.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아서 돌아선 듯 걸어간 재경은 곧장 제 자리로 들어가 동작을 맞췄다.
내 이름을 불러줄래
이윽고 센터이면서 킬링파트를 맡은 양채준이 나와서 화려한 몸동작을 선보였다. 짧은 순간 치고 나오는 그 타이밍이 잘 맞아떨어지며 무대의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그리고 정우와 재경이 계속 실랑이하던 그 구간이 다가왔다. 2절이 시작되기 전 재경과 정우가 마주섰다. 역시나 재경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정우는 여유로운 미소를 선보였고 그대로 카메라에 잡혔다. 그러던 정우는 자신을 보는 재경은 잠시 눈을 감았고 다시 떴을 땐,
정우를 향해 장난스러우면서도 새침하게 흘겨보았다. 그리고 그를 비웃었다. 재경은 정우가 고백할 때가 아닌 다른 경우를 생각해보았다. 그가 이 오디션에서 성공해서 아이돌로 활동할 때 재경은 정우에게 상대적으로 기가 눌려있었다. 그러나 과거로 돌아와서는 아니었다. 예선을 치룰 때 마주쳤고 그날 정우는 재경에게 이름을 물어봤었다. 그때 그에게 제 이름을 말한 게 얼마나 속이 시원했는지 몰랐다. 이제 누가 위에 있는 게 아니라 서로 동등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그래서 재경은 당당한 눈빛으로 정우를 응시했다. 내 이름을 불러봐.
‘이런, 한 방 먹었네.’
재경의 눈빛에 실린 뜻을 읽은 정우가 기가 막힌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조언을 받아들인건지 아니면 스스로도 어색한 걸 알았는지 재경은 제게 맞는 표정을 드러냈다. 예쁘지만 감정 없는 웃음이 아니라 그냥 자신을 드러냈다. 분명 재경에게 호감이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좋았고 눈빛이 좋았고 무엇이든 심드렁한 얼굴로 다 잘하는 게 재미있었다.
무엇보다 가만히 있어도 눈이 가는 상대였다. 그런데 지금은 다른 감정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재경을 향한 은근한 소유욕이 들었다. 같이 데뷔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번처럼 함께 자고 함께 밥을 먹는 모든 순간을 가지고 싶었다.
무대위라는 것도 잊고 재경에게 휘말린 정우는 탁풀린 미소를 그대로 내보였다. 그에게도 자연스럽게 나온 미소이기에 앞선 표정보다 더 살갑게 다가왔다.
‘왜 그렇게 웃는거야.’
마치 이렇게 웃었어야지, 라고 시범을 보여주는 듯한 예쁜 웃음에 재경이 속으로 불만을 중얼거렸다. 연습하면서 지겹도록 본 웃음인데 방금은 조금 달랐다.
서로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 것도 잠시 둘은 곧바로 다음 안무와 함께 거리를 벌렸다.
노래가 끝날 때까지 재경과 정우는 다시 만나지 않았지만 서로를 의식하는 시선을 몇 번 주고 받았다.
노래가 끝나고 다시 처음처럼 한 줄로 모여들었을 때 마스터들이 한번에 마이크를 들었다가
“왜 내 눈에는 다 센터로 보이고 다 킬링파트로 느껴지지?”
“처음에 윤하준 연습생이 나올 때 시선이 확 가더라고요. 스타트 잘 잡았어요.”
“중간에 미션 때문에 컨셉을 바꿨다고 하는데 전혀 어색하지 않았어요.”
“나는 그냥 여기 팀원들을 데려가서 드라마 찍고 싶어요. 저기 복학생에 윤하준 넣고 후배가 민태연이랑 양채준, 그리고 같이 어울려다니는 친구로 이정우, 서재경, 최우주인거지. 내 상상 어때요?”
여자 마스터의 말에 다른 사람이 좋다며 받아주었다. 그냥 장난스럽게 한 말이지만 재경은 무대가 괜찮았다는 뜻이라 나쁘지 않게 들었다.
누구 하나 실수했다면 이런 반응이 나올 수 없다. 그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재경은 후련한 마음으로 마스터석을 보았다.
그러다 무심코 눈이 마주친 대표 마스터가 재경에게 물었다.
“서재경 연습생. 지금 무슨 생각이 들어요?”
재경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는 척하며 잠깐 대답할 시간을 벌었다. 그러나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는 게 없었다. 재경은 어떻게 해야 하나 싶다가 뇌를 거치지 않은 듯한 대답을 하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 지금 너무 목말라서 아메리카노를 줘도 마실 수 있을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