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언제 자려고?”
재경이 침대에 누우며 아직까지 앉아있는 정우에게 물었다. 씻고 잘 준비를 다 했지만 여전히 핸드폰과 연습장을 다리 위에 얹어둔 상태였다.
“자야지.”
“어차피 지금은 아무것도 못 바꾸잖아. 그럴바엔 내일 개운한 정신으로 해. 가뜩이나 못 잤을텐데.”
재경이 가시가 담긴 말을 휙 던졌다. 그러자 연습장에 무언가를 끄적이던 정우가 재경에게 고개를 돌렸다.
“새볔같이 일어나 내 얼굴 찍느라 못 잤을 거 아냐. 아니 근데 숨겨놓은 캠은 어떻게 찾았어?”
“숨기는 걸 봤으니까.”
정우는 별거 아니었다는 듯 태연히 대답했다.
“잠깐 잠이 깼는데 네가 서랍 구석에 넣는 걸 우연히 봤어. 그게 뭔지 궁금해서 본거야.”
“그걸 발견했으면 도로 집어넣어야지. 날 왜 찍어.”
재경은 점점 흥분이 차올라 아예 침대에서 머리를 들었다.
“재밌어 보여서.”
“와…….”
재경은 너무도 뻔뻔한 정우의 대답에 더 따질 기운이 빠졌다. 하긴 자신도 다른 사람을 허락없이 찍었으니 더 뭐라고 할 게 아니었다.
“내가 마피아인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
“응.”
“어떻게?”
“그냥.”
“말해주기 싫냐?”
재경은 대충 넘겨버리려는 정우의 말에 귀찮냐는 투로 물어봤다. 그러니 정우가 잔잔한 미소와 함께 다른 말을 꺼냈다.
“푹 자둬.”
정우의 인사가 마치 내일부터는 못 잘수도 있단 협박처럼 들렸다. 재경은 다 모른 척하고 있다가 나중에 바뀐 안무만 익힐까 하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디테일을 잡지 않았어. 원래는 일주일동안 디테일하게 잡아가고 군무에도 신경쓰려고 했잖아.”
개인 연습이 충분히 되어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그러면서 전부 맞춰보고. 그러나 어디까지나 동선 파악과 함께 안무 순서를 확인하는 것에 불과했다. 재경과 정우, 태연과 하준이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한편 최우주와 양채준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꼭 다른 안무로 변형할 필요는 없어. 네가 말한 한 동작을 바꾸는 걸 반대하는 건 아니고.”
재경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입은 계속 움직였다.
“분위기를 살릴 방법은 많다고. 의상도 있고 표정이나 편곡도 있잖아. 웃지 않고 춤을 췄으니까 작은 미소만 지어져도 훨씬 부드러워져.”
정우는 핸드폰이 다리 위에서 미끄러지는 것도 모른 채 재경의 말에 귀기울였다.
“어쩌면 이 컨셉으로 가는게 더 맞을수도 있어. 우리 모두 10대잖아.”
20살인 하준도 만 19세다.
“그렇다고.”
물론 정우가 동의하지 않으면 재경 혼자만 떠드는 것에 불과할 말이었다. 그저 재경은 조금이라도 일을 줄이려고 한 말이지만 선택하는 건 정우의 마음이었다.
“나 잔다.”
재경은 자신의 얼굴을 뚫어질 듯 보는 정우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너 혹시…….”
그런 재경에게 할 말이 있는지 정우가 막 입을 열 때였다.
“나 오늘 여기서 잘래.”
태연이 베개를 들고 들이닥쳤다. 그의 씩씩거리는 얼굴에 재경이 반쯤 상체를 일으켰다. 태연이 베개를 배에 대고 쿠션 삼아 재경의 침대로 다이빙했다. 그 상태로 발버둥을 치는 걸 재경이 닿지 않게 몸을 뒤로 물렀다.
“말이 안 통해. 안 통해서 미치겠어.”
태연이 정우를 보고 하소연하려는듯 한숨을 폭 내쉬었다.
누구와 문제가 있는지 알 거 같아 재경이 슬쩍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는 태연의 말을 흘려들으며 방을 나갔다.
“양채준 진짜…….”
닫히는 문 사이로 태연의 뒷담화가 울렸다. 이번에 팀을 꾸린 건 정우의 마음이었다. JT엔터에서 온 3명이 들어있는 건 어디까지나 팀장의 권한이었다. 나머지는 어디 하나 소속사가 겹쳐지지 않은 것도 정우가 의도적으로 그러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같은 소속사끼리 만나 다른 연습생의 흉을 보는 건 정말 아니었다. 재경의 표정이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
잊어야 하는데 왜 자꾸 그들과 한 팀으로 뛰던 때가 떠오르는지.
- 형 미안한데 저한테 말 걸지 말아주세요.
태연은 아예 자신의 옆에 다가오는 것조차 싫어했다. 물론 태연만의 잘못이 아니었다. 낙하산으로 들어간 재경을 반겨할 멤버는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적당히 넘어가면 좋은데 하필 양채준에게서 자꾸 자신이 보였다.
재경은 무거운 발을 이끌어 태연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 다시 전화할게요.”
마침 전화중이던 양채준이 재경을 보더니 급히 통화를 마무리했다.
“미안.”
“아니요. 안그래도 전화 끊으려던 참이었어요.”
양채준이 괜찮다는 듯 핸드폰을 대충 던지고 재경을 향해 섰다. 자신의 방인데도 어디 앉지도 못하는 모습에 재경이 빈 침대에 앉았다.
“네 방인데 뭐 그렇게 불편하게 서 있어.”
“어… 그렇죠.”
양채준이 제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은 듯 웃으며 엉거주춤 엉덩이를 내렸다. 그리고 다시 대화가 끊기자 재경과 양채준은 서로 다른 곳을 보았다.
“아, 태연이 거기 갔어요?”
“어.”
“아… 그럴 거 같았어요.”
양채준이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베개를 끌고와 안았다. 괜히 베개를 만지작거리던 양채준이 재경의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이번에 안무가 바뀌는 것 때문에 조금 의견이 부딪혔거든요. 제가… 재경이 형한테 도움을 청할거라고 했더니…….”
양채준이 재경을 힐끗거리며 중얼거리는데 그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여전에도 태연이가 가르쳐주다가 답답해서 나간 게 떠올라서 그런건데 음, 안무를 짜는 애라 그런지 조금…….”
양채준은 한번 말이 트자 그동안 속에 쌓아두기라도 했는지 말이 끊이지 않았다.
“저도 못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닌데 이럴 땐 괜히 참가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안그래도 이번에 같은 소속사 형들이 다 떨어져서 혼자서 버티기가 힘들어요.”
재경은 양채준의 말에 어떤 긍정이나 동정도 없었다. 그렇다고 말을 안 들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양채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아, 제가 쓸데없는 말을 했죠. 죄송해요. 형.”
“채준아. 너 소속사가 어디라고?”
“저 dp요.”
dp라고 하면 재경이 잠시 다녔던 곳이었다. 물론 얼마 안되기도 했고 당시 보이그룹이 나와서 몇 년간은 데뷔를 못할 거라고 엄마가 억지로 재경을 끌고 나온 곳이었다.
그때가 중학생 때긴 했는데 더 자세한 건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재경이 dp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건 따로 있었다. 재경은 그 생각을 잠시 덮고 양채준에게 말했다.
“일단 자자.”
“여기서 주무시게요?”
“내 방에는 태연이가 있어서.”
재경이 이불 안으로 들어가자 양채준은 할 말이 남은 얼굴로 보았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불을 껐다. 제 침대로 돌아온 양채준의 잘 자란 인사에 재경은 가볍게 대답하고는 그를 등지고 누웠다.
처음 조가 모였을 때 양채준을 보고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났었다. 그런데 스쳐 지나가는 인상이었는지 잘 떠오르지 않았는데 양채준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알았다.
* * *
아침 일찍 모인 그들은 여느때와 같이 동그랗게 모아서 앉았다. 재경마저 그렇게 앉아야 할 거 같아서 앉았지만 대체 왜 이렇게 앉아야 하나 싶은 회의감도 살짝 들었다.
“일단 여기 한 구간을 통째로 바꿀거야.”
정우가 가리킨 곳을 본 재경이 결국 거길 선택했냐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훅에서 반복되는 안무는 건드리지 않았는데 2절로 넘어가는 허리 부분을 바꾸겠다는 것이다. 원래의 안무는 제법 거칠었던 앞의 동작 때문에 조금 쉬어가도록 약한 동작이 주를 이뤘다.
“그리고 나머지는 그대로 갈까 싶은데 어때?”
정우의 생각을 미리 알고 있다는 듯한 태연을 제외하고 모두가 생각에 빠졌다. 가장 먼저 대답한 건 하준이었다.
“어떻게 바꿀건데?”
가장 중요한 게 그거였다. 마침 재경도 궁금하던 찰나였는데 정우가 아예 시범을 보이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경아 나 좀 도와줘.”
“나?”
아니, 왜. 태연이랑 하면 될 걸 나한테 시키는지 싶으면서도 재경이 순순히 일어났다. 하준이 눈치있게 음원을 틀어준 덕분에 정우가 곧바로 그 부분을 선보였다.
“뭐!”
물론 영문도 모르고 선 재경은 당황했지만.
갑자기 거리를 좁혀 다가온 정우는 재경에게 바짝 붙어섰다. 그리고는 재경을 중심으로 빙글 돌았다. 어떤 춤이 아니라 그냥 서로를 탐색하는 것만 같았다.
재경은 제게 떨어지지 않는 정우의 시선이 카메라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표정을 굳혔다가 정우의 웃음에 놀라 눈이 크게 떠졌다. 카메라라고 인식한 게 무색하게 정우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린 것이다. 그 미소에 눈을 떼지 못하고 보고 있으니 보고 있으니 길게만 느껴졌던 한 구간이 금방 끝이 났다.
“어땠어요?”
태연이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재경에게 물었다. 재경은 자신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던 걸 떠올리다가 그 웃음을 되새기는 등 되짚어보고는 대답했다.
“인사하는 거 같아.”
재경은 알아듣지 못하는 다른 사람에게 제가 느낀 그대로 말해줬다.
“그냥 서로 누군지 인사 주고받는 기분이었다고.”
카메라를 통한다면 자신을 보여주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정우는 엄연히 자신이 살아있는 인간이라는 걸 알려주었다. 그래서 재경은 하나로 퉁 친거였다.
물론 그 대답을 들은 태연은 웃음이 터져 뒤로 넘어갔지만.
“아, 미치겠다.”
태연의 웃음이 커질수록 정우의 반응도 움찔거리며 느껴졌다.
“분명 정우 형이 유혹이랬는데.”
태연의 말에 재경은 이상한 개소리를 들은 듯 정우를 쳐다보았다. 정우는 제가 생각해도 황당했는지 아무 말이 없이 기막힌 웃음만 흘렸다. 그 사이 태연이 마지막 마무리를 했다.
“유혹은 무슨. 반갑습니다. 반가워요. 인사 나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