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아이돌-48화 (48/125)

48화

아침에 소형캠을 넘겼는데 그 짧은 사이에 자막까지 알차게 집어넣은 영상은 제법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잘 연출되었다.

“어떻게 밤에 찍을 생각을 다 했어?”

하준의 기막힌 물음에 재경이 슬쩍 몸을 틀어 제 뒤에 앉은 놈을 의식했다. 재경도 처음엔 소매 등에 넣고 몰래 찍어볼 생각을 해봤다. 하지만 바로 포기했다.

‘이정우의 눈을 피할 수가 없어.’

재경은 지금의 이정우 뿐만 아니라 미래의 이정우도 잘 알고 있었다. 리얼리티를 몇 번 찍으면서 멤버들의 몰래카메라를 번번이 알아채는 바람에 그 시도 자체를 무로 돌려버린 걸 많이 봤다. 그냥 보면 무표정에 아무것도 관심이 없어보이는데 가끔 놀라도록 예민하게 굴 때가 있었다.

그래서 다들 잘 때 움직였다. 눈 뜨고 있으면 들키니까 눈 감을 때 찍지 뭐. 이런 생각이었다. 한편으로는 리얼리티에서 언제 반응이 좋았는지 경험해봐서 알았다.

‘최PD가 말했던 새로운 모습에도 부합하고.’

어두운 영상이라 잘 보이지 않기에 밑의 자막으로 어떤 상황인지 추론하는 내용이 나왔다. 물론 재경은 언제인지 다 알기에 남들보다 편하게 감상했다.

아무도 없는 복도를 지나 누군가의 방으로 들어가고 있으니 연습생 모두 숨을 멈춘 채 영상에 집중했다. 그러다 캠에 잡힌 손에 누군가 나직한 침음을 흘렸다.

손이 어딘가를 향하더니 문득 밝은 화면에 빛이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자는 하준의 얼굴이 드러났다. 재경의 손이 하준의 얼굴 옆에 있던 핸드폰을 켠 것이다.

“나부터였니?”

하준이 옆의 재경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웃으면서 하는 말이지만 재경은 시치미 떼고 앞을 보았다. 하준의 자는 모습과 함께 그의 주변에 있는 물건들을 비쳐주었다. 핸드폰을 비롯해서 안경과 이어폰 등. 깔끔하게 치울 거 같지만 하준은 자신이 손닿는 주변에 물건을 두는 습관을 알기에 재경이 그것을 비춰주었다.

그리고는 곧장 하준의 핸드폰에 뜬 배경화면을 캠으로 찍었다. 화면 한가득 찍힌 고양이를 보여주고는 손가락으로 고양이를 가리킨 재경이 작게 속삭였다.

“이름이 '너도집사' 래요.”

조곤조곤한 목소리에 다른 팀원들도 하나둘 재경을 돌아보았다. 그들의 시선에 재경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하준의 자는 모습을 한번 더 찍은 재경은 곧바로 룸메이트인 최우주의 자는 얼굴도 보여주고 다른 방으로 갔다. 다음이 누구일지 눈치챈 태연이 경악스러운 눈빛을 지었고 양채준은 아예 제 얼굴을 가려버렸다. 자신들의 자는 모습을 찍었을 줄이야.

“재경이 형 진짜 못 됐어.”

태연의 원망을 재경은 야멸차게 무시했다. 역시나 바로 재경이 곧바로 찍은 사람은 태연이었다. 이불은 저 멀리 날아가 있고 배를 까고 자는 모습에 연습생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태연이 분한 듯 발을 동동 굴렀는데 영상에서 이어지는 모습에 언제 분했냐는 듯 얌전해졌다.

“배탈난다.”

재경이 태연의 옷을 내려주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 자상한 모습에 태연의 분노가 사그라든 것이다. 재경은 그다음으로 양채준까지 찍고 나와 원래의 제 방 앞에 섰다.

“후우.”

지금과 다르게 긴장한 듯한 반응이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재경의 작은 속삭임이 들렸다.

“예민해서…….”

마지막 팀장인 정우를 찍는데 앞서 깰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내비쳤다. 그래서인지 방에 들어갈 땐 더욱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흐릿하게 이불이 올라와 있는 곳으로 간 재경이 조심스럽게 정우의 핸드폰 화면을 밝혔다. 밝히자마자 손으로 가리긴 했는데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오는 미약한 빛에 정우가 잠이 깨려는 듯 눈을 비볐다. 재경이 당황한 듯 캠이 흔들리며 정우의 모습이 제대로 담기지 않았다. 그 위기의 순간에 모두가 집중해서 화면을 보았다. 정우가 깨서 다 들켰을지 아니면 다시 잠들지 모를 숨막히는 상황이었다. 정우가 아예 뒤척이기 시작하니 재경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더니 불쑥 손을 내밀었다.

“자라, 자."

재경이 주문처럼 말하더니 정우의 가슴을 토닥이며 허밍으로 자장가를 불러줬다. 그런데 정말 정우가 다시 잠이 들자 재경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쫄려서 못 보겠어.”

태연이 자기가 나올 때보다 더 두근거리는 표정으로 말했다. 재경은 이제 정우의 핸드폰의 화면을 켰다. 배경화면을 보려는데 비밀번호가 잠겨져 있고 배경이 블러처리되어 있었다. 이것저것 누르려나? 아니면 그냥 포기하려나 다들 궁금해하던 찰나

“정우야. 비밀번호 뭐야?”

대놓고 질문하는 마피아 덕분에 연습생들이 일순 쩡하고 얼어붙었다. 다시 재울 땐 언제고 비밀번호를 왜 물어봐. 싶은데 정우가 잠결처럼 비밀번호를 알려줬다.

“안 자는거 아니야?”

태연이 황당해서 나온 말처럼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다. 재경은 배경화면이 아무것도 없는 검정임을 보여주고는 캠의 전원을 껐다. 마피아로써 제 할 일을 모두 끝낸 것이다.

이제 저기서 유일하게 나오지 않았던 재경이 마피아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최PD가 마이크를 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재경을 포함해 모두가 왜 그런가 싶을 때였다.

“어?”

태연이 화면을 가리켰다.

또 한번 으스스한 배경음과 함께 캠이 켜졌다. 이번엔 재경도 놀랐다. 자신은 더 찍은 게 없었기 때문에.

‘뭐지?’

의아해하는 동시에 화면에 한 사람의 얼굴이 나타났다. 캠의 카메라부분을 제게 돌린 덕분에 정우의 얼굴이 고스란히 담겼다.

“이정우?”

재경이 소리내서 부르는 이름에 뒤에 앉은 정우가 그의 어깨를 톡톡 쳤다. 마치 그래 나야, 하듯이.

정우가 재경이 숨겨놓은 캠을 찾아서 전원을 킨 것도 모자라 그것을 이리저리 관찰하다가 아예 커튼을 걷어버렸다. 새벽녁이라 많은 빛이 흘러들어오지 않았지만 확연히 밝아진 내부에 방의 모습이 잘 들어왔다.

정우는 조심스러워하던 재경과 달랐다. 평범하게 걸었고 굳이 소음을 죽이려 하지 않았다. 아예 대놓고 재경이 자는 앞의 의자에 앉을 때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기함할 건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정우가 캠을 테이블에 올려놓더니 자유로운 두 손으로 재경의 자는 얼굴을 건드려댔다. 볼도 눌렀다 늘리고 머리카락도 쓰다듬고 손도 들었다 놓고 살짝 벌어진 입술도 콕 찌르고.

그런데 재경은 일어날 줄 몰랐다.

“너…….”

재경은 자신을 건드린 정우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정우는 아까 재경이 하듯 어깨를 으쓱였다. 재경은 분한 듯 고개를 놀려 영상을 보았다. 여전히 자신을 콕콕 건들고 있었다.

“아, 기대 이상의 영상들이 나오고 있지요.”

이건 자신들이 작정해도 못 찍을거라며 최PD가 흐뭇해했다.

“홍보팀의 마피아는 서재경 연습생이었습니다.”

홍보팀의 순서가 끝나자 재경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팀원들이 보는 시선은 꿋꿋하게 최PD만을 바라보았다.

모든 팀의 마피아와 함께 점수가 집계된 후 최PD가 다시금 그들 앞에 섰다.

“이 미션에 걸린 혜택이 무엇인지 궁금하겠죠? 바로 무대선택권입니다.”

재경은 예상했던 게 그대로 걸려들자 제 눈을 막아버렸다.

‘컨셉을 물어볼 때부터 이럴 생각이었어.’

그리고 홍보팀은 원하는 무대를 따내지 못했다.

*  *  *

“사무실은 빼앗겼고…….”

하준이 인사팀을 힐끗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소리에 태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 팀을 모으는 미션에서 정장을 입었던 탓에 이번 무대에 회사원처럼 정장을 생각한 팀이 제법 있었다.

이소운이 마피아인 걸 밝힌 인사팀은 홍보팀 바로 앞이었는데 눈앞에서 사무실 배경의 무대를 빼앗겼다.

하준은 남은 것중에서 그나마 낫다고 생각하고 집어온 무대를 보았다.

“우리 막 절제한다고 동작도 작게 줄였는데… 이 벚꽃 설레는 감성에 어울릴까?”

하준의 물음에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일에 집중한 회사원의 은근한 섹시함이 돋보이길 바랬는데 벚꽃 흩날리는 아래서 분위기 잡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상황이 심각해진 걸 알게 되니 이젠 하준도 입을 다물고 고민에 빠졌다.

그다음으로 입을 연 사람은 정우였다. 그는 재경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네가 기다려보라는 게 이거 때문이었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일주일밖에 안 남았어.”

재경은 정우에게 벚꽃의 단어를 톡톡 두드렸다. 정우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알아. 시간이 없는 건 아니니 다시 정해봐야지.”

“다시 정하다니? 안무를 완전히 바꿀 생각이야?”

“분위기는 맞춰야지.”

“불가능해.”

재경이 손을 저었다. 그러나 정우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이대로 밀고 갈 수 없다는 단호함이 엿보였다. 어느새 험악해진 분위기에 하준이 방관자의 자세로 돌아가고 나머지는 재경과 정우의 대화에 끼어들지 못했다.

“일부만 바꾸는 걸로 해.”

재경은 일단 정우에게 적당한 타협안을 내놨다. 기본의 안무에서 변형한 것이기 때문에 새로 다 바꾸는 건 큰 의미가 없었다. 정우도 알아들었는지 수긍했다. 그러나 그 역시 완전히 물러나진 않았다.

“전부 바꾸지 않는 대신 분위기를 살릴 수 있도록 아예 한 동작을 통째로 드러내는 것 정도는 괜찮을 거 같은데.”

“그래라.”

재경은 따져묻기도 귀찮아서 대충 흘렸다. 그러고 정우에게서 고개를 돌렸다가 양채준과 눈이 마주쳤다. 언제 옆에 있었지. 싶은데 양채준이 웃으며 재경에게 더욱 몸을 붙였다.

태연과 양채준 사이의 일도 있구나.

재경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조금 편하게 보낼 줄 알았던 일주일이 첫 무대보다 더 빡빡하게 흘러갈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