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카메라가 회수되고 난 빈 연습실에서 재경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같이 연습하던 연습생들은 하나둘 자러 들어가면서 재경만 남았다. 힐끗 시계를 보니 시침이 새벽 3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재경은 지친 몸을 거울에 기댔다. 등에서 뿜어져나오는 열기에 거울에 옅은 김이 서렸다가 천천히 사라졌다. 목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고 있는 동안 재경은 방에 두고 온 핸드폰을 떠올렸다.
핸드폰을 들고와봐야 연습에 집중이 안 될까봐 그런건데 별 효과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가져오는 건데. 지금이라도 가져올까 싶어 문을 바라보는데 옆에 앉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재경과 함께 마지막까지 연습하던 정우였다.
“내일은 어쩌려고 무리해.”
“너는.”
“나야 남는 게 체력이고.”
저렇게 자신만만하니 뭐 알아서 하겠지 싶었다. 솔직히 자신을 끌고 나와놓고 적당히 연습하다 들어가면 한마디 할 생각도 있었고 말이다.
“미션 나오면 알아서 달려들어라.”
뭐가 나올지도 모르지만 일단 팀으로 하는 거면 알아서 들이대라고 하니 정우가 태연히 그러겠다고 했다. 그것으로 대화가 사라지자 재경은 멍하니 앞을 보았다. 거울을 등지고 있으니 사람보다 연습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너튜브 많이 보나?”
재경이 자기랑은 상관없는 듯 여겨지는 건성거리는 말투에 중얼거렸다.
“보기야 많이 보겠지.”
“비하인드도? 굳이 찾아볼까?”
“자기 픽인 애라면 꼭 보겠지.”
재경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내 영상은?”
“조회수를 물어보는 거라면 그렇게 높진 않아.”
“그래?”
재경의 얼굴이 조금 환해졌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그래도 1차에서 통과했으니 아예 바닥은 아닐 거라 예상했다.
“그래도 너튜브를 보지 않고 투표했을 리는 없잖아.”
재경의 나름 타당한 말에도 정우는 별거 아니란 듯 대꾸했다.
“정확한 정보가 없으니까 자기 마음대로 예측해보고 상상하는 건 알겠는데…….”
상상이라는 말에서 재경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단순 배열로 투표를 얻는다고 생각하는거야? 이게 무슨 등차수열도 아니고 1등이 100, 2등이 90, 3등이 80 규칙적으로 표를 얻을 거 같아?”
정우의 비웃는 말투가 거슬렸지만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오히려 상위권 싸움에 하위권은 적은 표수만으로도 쉽게 등수가 바뀔 수도 있었다. 어디까지나 순위가 나오지 않고 표수가 나오지 않았기에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가능성 중 하나였다.
“뭐, 그래도 54명 안에 드는 정도의 표는 얻었겠지.”
그러니 연습실에 남아있는 거지만 정우의 말이 괜히 재경의 기분을 긁었다.
‘그래, 넌 인기 많다 이거지.’
안 나와도 알 수 있는 게 있다. 정우의 인기가 상당할 거라는 거. 그래서 저런 여유가 있나 싶지만 곧 자신의 억측에 불과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되돌아오기 전에 이 방송을 다 챙겨볼걸. 말도 안 되는 후회를 곱씹던 재경이 말이 없자 정우가 툭 내뱉었다.
“정 신경 쓰이면 직접 조회수 확인해보던가.”
진짜 너 별볼 일 없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는 말이었다. 재경의 근거없는 자신감을 눌러버리려는 것과 같아 괜히 기분이 상했다. 어쩌면 자기가 확인하지 않을 걸 알고 말하는 걸 수도 있었지만 그 의심은 금방 접었다.정우가 제게 굳이 거짓말할 이유가 없었다. 재경은 푹 한숨을 내쉬며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넘겼다. 그래, 차라리 이정우 말을 믿는 게 마음 편하지.
“갈거야?”
정우의 물음에 재경이 잠시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힘이 들어가는 게 조금 더 연습해도 될 거 같았다.
“두 번만 더 춰보고 들어가게.”
“그래 열심히 해. 내일부터 다른 사람 도와주려면 오늘 많이 해둬야지.”
정우의 말에 재경이 와락 얼굴을 구겼다. 얘가 지금 무슨 헛소리를.
“내가 왜 도와주냐?”
“왜긴, 그게 네 일이잖아.”
“그게 언제부터 내 일이 됐는데?
“가장 파트가 적은 보컬을 받은 대가?”
“와…….”
이러려고 그 파트를 준거였어.
“너 솔직히 말해봐. 이러려고 날 끌고 들어왔냐? 어?”
“어. 저번처럼 부탁해.”
정우의 뻔뻔한 대답에 재경의 눈이 가늘어졌다.
“싫다면?”
“리더의 권한으로 파트 바꿀거야.”
“이미 정해진 걸?”
“무대에 올라가기 전까지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거지.”
“너 진짜 치사한 거 알지?”
“팀원이 팀장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네.”
팀장이라고 해봐야 같이 무대 설 애들 모은 거밖에 없으면서. 재경이 작게 투덜거렸다.
“더 숨어있었어야 했는데.”
* * *
재경이 씻으러 들어간 사이 정우가 핸드폰을 켰다. 익숙하게 너튜브 앱에 들어가서 몇 번이나 본 영상을 틀었다.
방송으로는 다소 밍밍하게 만들어놨지만 너튜브에 광고 짱짱하게 집어넣고 한 시간으로 만들어놨다는 건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재경을 비롯한 A조 9명을 5분 내외로 나오면서 같이 연습하는 내용까지 합해서 60분이었다.
당연히 재경이 그동안 감춰왔던 모습을 아낌없이 풀어준 덕분에 A조의 조회수는 다른 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았다.
정우가 영상 속 재경을 바라보았다. A조로 모여서 가장 먼저 했던 프로필 촬영이었다. 다소 큰 가디건에 어색할 땐 언제고 촬영에 들어가자마자 달라지는 모습에 A조 모두가 놀랐던 일이었다.
원래도 노래를 잘해서 은근히 재경을 의식하던 연습생이 많았다. 그런데 카메라 앞에서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하는 걸 보면서 제대로 그들의 눈에 박혔다는 걸 알았다.
소운에게 춤을 가르쳐줄 땐 일부러 카메라를 의식해서 옆으로 벗어났다. 그러나 다른 카메라로 거울에 비친 것까진 계산하지 못했다. 박자를 잘게 쪼개서 한동작 한동작 자세히 가르쳐주는 것에서 재경의 실력이 엿보였다.
잘했다. 그냥 다 잘했다.
“아이돌로 활동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어설픈 자신과 다르게 재경은 무엇이든 다 능숙하게 했다. 그냥 서 있어도 눈에 띄는데 가진 바 실력도 좋았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영상에 정우가 턱을 괴었다. 이부분은 특히나 많이 돌려보았었다.
- 정장이 잘 어울리는 사람인데 교복을 입혀놓은 거 같아요. 저기서 조금 더 톤을 올리고 적극적으로 해도 좋을 텐데 좀 아쉬워요. 뭔가 힘입게 들어가지 않으니까… 그래도 목소리는 좋네요.
촬영할 때부터 어딘가 불만인 듯싶던 유민혁이 간접적으로 자신을 까고 있었다. 뭐, 모든 연습생이 서로를 응원하는 것만은 아니니까. 그런데 놀란 건 그다음에 이어진 재경의 말이었다.
- 지금은 저게 더 좋은 거 같아요. 막상 무대에 올라가면 달라질지 모르지만 지금은 트레이너에게 자기 목소리를 보여 주는 시간이잖아요. 크게 들뜬 모습보다는 앞으로 있을 레슨에 맞춰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하니까요.
등을 돌리고 있어 재경의 표정이 보이진 않지만 그의 목소리가 귀에 콕콕 박혀왔다.
- 저 노래에 가장 잘 맞겠다 싶은 목소리를 내는 걸 거예요. 경쾌하진 않지만 가사 전달이 잘되고 있잖아요.
“나한테는 조금도 관심없다는 듯이 굴었으면서.”
“뭘 굴어?”
씻고 나온 재경의 물음에 정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방금까지 보던 너튜브를 껐다. 그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재경이 다른 의심하지 못한 채 제 침대에 올라갔다.
“왜 아직도 안 잤나.”
“잠이 안와서.”
“그래놓고 내일 졸지 마라.”
재경은 두어 시간밖에 못 자는 걸 확인하더니 작게 하품하며 이불을 끌어올렸다. 머지않아 고른 숨소리를 내쉬는 재경을 확인한 정우가 핸드폰을 들어 인터넷으로 들어갔다.
[자게] 내 16년 무근 때가 이제야 술술 풀리는 거 가타 [93]
솔까말 연습생마다 주어진 시간이 다르다는 거 ok. 구구애들 다 보여주기 힘드니까…… 그나마 악편으로 희생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피디 인성 ㅇㅈ해 그런데 문제가 뭐다?
재경오빠 분량이 실종이다!!! 다른 애들 열심히 분량 확보할 때 재경오빠 넌 뭐했어요ㅠ
그런데 너튜브에 올라온 영상에 모든 한을 풀었다 잠깐이지만 오빨 원망했던 거 미안해ㅜㅜㅜㅜ 이렇게 살아 숨쉬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앞으로도 오빠는 오빠 원하는대로 사세여 내가 찾아갈게여
댓글[43]
그대는유죄요: ㅈㄴㄱㄷ 제목만 보고 넘길뻔했네 휴 전 이미 감겼어여
└aphijj: 확실히 매력이 있긴 해요
마션: 보컬 댄스 빠지는게 없네ㅠ 그래서 내가 빠졌나?
└작성자: 그걸 재경이 재경했다고 하는 겁니다
[익게] 그래 이거야 처음부터 이걸 보고 싶었어
방송 의식을 좀 하는 거 같은데 그게 나오겠다고 하는 게 아니라 수줍어서 숨는거니까 봐준다
└방송 의식 오지네
└└선넘
└제발 가만히
└└진정성이 없어 이러면 톱스타밖에 안되겠지
[익게] 아 잘해서 킹받아
└기본적으로 급식들이 보컬이 다 좋구나
└잘한다 탑9가자
[익게] 힐링된다
└목소리 치인다
└방음벽 쿠션 누르는거 ㄱㅇㅇㅠㅠㅠㅠㅠㅠ
[익게] 재경아 넌 이미 데뷔각이다 천년돌 될 우리 재경이 많관부^^ 흥미 없는 척 하는 사람들도 어라? 얘 잘추네? 안 그렇게 보였는데 재밌네? 하면서 재밌다 웃기다 귀엽.. 어,,? 할 미래가 보인다 입덕부정하면서 호로록 빨려나갈 미래가 보인다 보여
거기다 댓글까지 살펴본다면 이번 재경의 통과는 별로 놀랄 게 아니었다. 어쩌면 A조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건 재경이 아닐까 하는 예상도 들었다.
정우는 조용히 핸드폰을 슬쩍 돌려 재경의 얼굴을 확인할 정도로만 빛을 비췄다. 고른 숨소리가 들려오며 달게 잠을 자는 재경의 표정이 편안해 보였다. 저 얼굴이 다음 발표식에 붙으면 어떻게 변할지.
정우는 새벽 내내 재경에 대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