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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아이돌-42화 (42/125)

42화

“나랑 이야기 좀 하자.”

하준이 자신을 따라 나가자는 손짓에 정우가 잠깐 룸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하준의 재촉에 정우가 돌아서 그를 따라갔다.

“뭔데.”

하준은 대답 대신 정우에게 음료수를 건넸다. 정우가 음료수를 바라만 보다가 이내 그것을 받아들고 옆에 앉았다. 아무래도 하준이 대화가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정우가 음료수를 따서 한 모금 머금자 하준이 진득한 미소를 지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이 하자는 것에 다 따라오는 동생이었다.

“이렇게 있으니까 우리 연습생일 때 생각난다.”

“지금도 연습생인데.”

“JT연습실에서 운동화 닳아가도록 연습할 때 말이야. 그때도 이렇게 너한테 음료수 주곤 했는데.”

“할 말 있을 때만 줬잖아.”

“그야 당연하지. 내가 돈이 어딨다고 널 사주겠어.”

연습생치고 부모님이 주신 용돈이 제법 높았지만 하준은 늘 자신을 가난한 연습생 취급했다. 자신이 받은 용돈으로 몇 명이 함께 살아야 한다며 검소하게 살았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재경은 음료수를 받아마실 때마다 하준에게 그 열배 이상으로 사서 돌려주곤 했었다. 그렇게 사서 줘봐야 하준이 마시는 건 하나인 걸 알면서도.

“너가 나한테 반해서 연습생이 되겠다고 한 게 엊그제 같은데.”

“…그런 말 좀 하지마.”

정우가 정말 싫다는 듯 정색했다. 하준이 연습생이 되고 한 달 후에 정우가 들어가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부모님 때문이었지 하준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데 하준은 종종 자신이 좋아서 연습생이 되었다고 정우를 놀려대곤 했다.

그러나 정우는 연습생으로 들어가서 적응하는데 하준이 도와준 것 때문에 그가 놀려도 그냥 흘려들을 때가 많았다.

정우는 음료수를 마시며 하준의 장난기가 가라앉길 기다렸다. 음료수를 다 마시면 일어날 생각도 있었다. 그리고 정우의 생각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하준이 슬그머니 웃으며 본론을 꺼냈다.

“너 재경이가 왜 그러는지는 알아?”

정우도 재경의 행동을 떠올렸다.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카메라의 위치와 함께 사각지대에 가서 앉으며 눈에 띄는 걸 사렸다. 일단 옆에 붙어있다보니 눈치로 알 거 같아서 그에 맞춰줬지만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재경과 둘이 만났었다면서 안 물어봤어?”

이것 때문에 따로 불렀다는 걸 알았지만 정우가 딱히 대답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안 물어봤어.”

“왜?”

“그냥.”

물어보다가 혹시 기분 나빠지면 다시 예전처럼 거리를 벌리려고 할 까봐 말을 아꼈다.

“넌 궁금하지도 않냐?”

“…궁금해.”

정우가 솔직히 답했다. 이왕이면 재경과 이 오디션을 넘어서 개인적으로 친해지고 싶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재경은 오디션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피하고 다니면서 정우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정우는 기분 상한 티 하나 없이 재경에게 딱 달라붙어 다녔다. 나중엔 지쳐버린 재경이 포기하고 받아줄 정도로.

옆에서 전부 지켜본 하준이 새삼스럽다는 듯한 눈으로 물었다.

“그런데 물어봤다가 싫어할 거 같아서.”

“그렇다고 안 물어보다니… 궁금한 티도 안 내고 잘 붙어있네. 그렇게 걔가 마음에 들어? 다른 애들도 많아.”

하준은 지금 남아있는 연습생 몇몇의 이름을 불렀다. 전부 화제성을 얻은 연습생이었다. 하지만 정우는 다 마신 음료수 캔을 만지작거리며 언급된 이름들을 대충 흘려들었다. 그리고는 엉뚱한 말을 꺼냈다.

“종종 아버지가 연습실 문에 기대서 연습생을 살펴보잖아.”

“그렇지. 데뷔조에 들 애들을 직접 뽑으시지.”

하준이 얼떨떨하지만 일단 정우의 말을 받았다.

JT엔터는 흔히 대형이라고 불리는 3대 기획사 중 하나였다. 소속된 연예인도 많고 거액의 돈을 들인 아이돌 몇 팀이 나와서 망해도 꿈쩍하지 않을만큼 탄탄한 회사였다.

그러나 JT에서 나온 아이돌은 대부분 성공했는데 그건 체계적인 수업과 동시에 대표의 까다로운 기준을 다 통과해야지만 데뷔조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정우는 JT의 대표이자 제 아버지가 종종 연습실에 들리는 걸 언급했다.

“그때 나도 옆에서 봤었거든. 처음엔 잘하는 사람을 살펴보는 건가 싶었는데 눈에 띄는 애를 찾아보는 거래.”

“그래? 나 되게 열심히 했는데.”

하준이 가벼우면서도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재경이를 보니까 알겠어. 아, 얘 되게 눈에 띄는구나.”

거기다 실력은 덤이고.

막 귀찮은 얼굴에 하기 싫은 티를 팍팍 내는데 정작 하면 누구보다 잘했다. 그것 역시 정우의 호기심을 끌긴 했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어?”

“어. 같이 데뷔하고 싶을 정도로.”

“아주 제대로 찍었네. 제대로 찍었어.”

하준이 질렸다는 듯 고개저었다.

“잘 해봐라.”

이왕이면 정우가 정말 믿고 의지할 친구를 만나면 좋겠다는 생각에 뒷말을 붙였다.

*  *  *

방으로 돌아온 재경은 곧장 갈아입을 옷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씻고 나서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은 재경은 젖은 머리는 대충 두어 번 털고는 곧장 침대로 들어갔다.미션 때문에 격렬한 안무를 맞춰본 건 아니지만 신경을 날카롭게 세우고 있던 탓인지 온몸이 노곤노곤 녹아들어갔다. 푹신한 침대에 얼굴을 반쯤 묻은 그대로 재경이 하품했다.

아직 저녁 연습을 하려면 잠깐 쉬고 나가야 하는데 한번 누우니 일어나기 싫었다.

“좋다.”

아이돌로 호텔에 수시로 드나들 땐 이 침대의 푹신함도 모르고 살았다. 몇 시간 자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이런 작은 변화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바빴다.

“호텔 침대가 이렇게 좋은 거구나.”

재경이 침대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다시금 하품을 한 재경이 가물거리는 눈을 비볐다. 잠깐만 자고 일어날까 혼자 생각하던 재경이 핸드폰을 가져왔다. 스포 위험 때문에 계약서까지 받았지만 가족간의 연락은 자유롭게 허용해 준 덕분에 핸드폰이 있었다.

핸드폰의 화면을 켜서 알람을 설정하려던 재경이 문득 통화버튼을 바라보았다. 지금껏 엄마는 단 한번도 연락이 오지 않았었다. 재경이 먼저 연락을 해볼까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굳이 긁어부스럼 만들까봐 망설여졌다.

“그냥 놔두는 게 좋겠지.”

전화하면 오디션에 대한 걸 꼬치꼬치 물어볼 수도 있으니 재경은 그냥 알람만 맞추고 화면을 껐다.

“그 실장과의 계약도 깨졌는데 내가 오디션까지 떨어지면 뭐라고 할지 뻔하지.”

아쉬워하고 전부 재경의 탓으로 돌리다가도 또 다른 기획사를 찾아다닐 것이다. 재경은 남은 시간은 어떻게 버텨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벌컥 문이 열렸다.

재경이 놀라서 반사적으로 침대를 짚고 일어나자 안으로 들어오던 정우가 멈칫했다. 서로를 확인한 후에 재경이 다시 침대에 엎어지니 정우가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왜 그렇게 놀라.”

“갑자기 들어오니까 그렇지.”

그렇게 말한 재경이 아무렇지 않은 척 핸드폰을 내려놨다. 방금까지 고민했던 걸 정우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반응이라도 본거야?”

“반응?”

재경이 정우의 말에서 한 단어를 따라했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인터넷 반응을 말하는 거 같은데 재경은 합숙하지 않을 때에도 자신에 대한 건 찾아보지 않았다.

물론 미리 인터넷으로 검색해본다면 좋겠지만 재경은 그것을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악플에 시달리던 것 때문에 재경은 인터넷에 자신의 이름을 검색하지 않았고 그게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런 재경이 신기한지 정우가 되물었다.

“생방송도 안 봤다면서 그런 거 안 찾아봐?”

정우가 아예 재경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 자연스러움에 재경이 밀어낼까 하다가 그냥 고개를 돌려버렸다.

“…딱히 유명하지도 않은데 뭐 볼 게 있다고.”

“이름을 치면 몇 개 영상도 나올텐데.”

“직캠정도야 나중에 봐도 되니까.”

그냥 대충 흘려넘길 생각에 한 말인데 무슨 일인지 정우가 재경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혹시 문자 온 거는 봤어?”

“문자?”

그제야 재경이 문자메시지 창을 들어갔다. 쌓여있는 문자들을 살펴보다가 익숙한 번호를 발견하고 들어가니 예전에 보낸 메시지가 있었다.

재경은 슬그머니 찾아온 불안감을 억지로 누르고 메시지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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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경이 핸드폰을 든 채로 벌떡 일어났다. 그 격한 반응으로 메시지조차 이번에 봤음을 알아챈 정우가 조용히 제 침대로 넘어갔다.

재경은 다시 한번 메시지를 보고는 기가 막힌 듯한 탄식을 흘렸다. 그리고 다시 메시지를 읽고는 허공을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최PD가 말한 그거였구나.

‘이런 비하인드를 올릴 거였다면 내가 방송에 안 나가려고 발버둥 칠 이유가 없었잖아.’

재경이 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답답한 듯 머리를 헝클고 다시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재경이 계속 정신 산만하게 굴고 있자니 정우가 턱을 괸 채 웅얼거렸다.

“궁금하면 보면 되잖아.”

“그건…….”

재경이 막 흥분해서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자기라고 가서 보는 게 제일 확실한 걸 모르나. 하지만 알아도 할 수 없는 게 있었다. 재경에게 인터넷은 보이지 않는 칼에 목을 들이대던 것과 같았다. 이젠 아니라고 해도 여전히 인터넷에서 제 반응을 보는 건 심장이 뛰고 손발이 떨려왔다. 재경은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대신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는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재경의 분위기가 가라앉는 과정을 의도치 않게 지켜본 정우의 시선이 불룩 솟은 이불을 바라보았다. 아까만 해도 그럭저럭 부드러웠던 분위기가 자신 때문에 이렇게 된 것만 같았다. 정우는 잠시 고민하다 재경에게 다가갔다. 생방송을 보지 않았다고 할 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정우는 심난한 눈으로 불룩 솟은 이불을 향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어떻게든 재경을 달래야…….

정우의 손이 중간에 멈췄다. 지금 그가 달랜다고 재경이 통할까?

정우의 표정이 점점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는 재경이 머리끝까지 덮은 이불을 야멸차게 걷어 버렸다.

“뭐야.”

“연습 가야지.”

“…뭐?”

“내 팀은 게으른 거 안 봐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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