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미션이 황당하다 싶으면서도 다음 사람은 어떤 옷을 입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재경은 연습할 수 있는 시간을 가늠하면서도 이번엔 누가 들어올지 지켜보았다.
“저 왔어요.”
“허…….”
수줍은 듯 들어오는 양채준을 보고 재경이 기가 막힌 듯한 탄식을 흘렸다. 당장 다리가 벌어질까 걱정되는 애(민태연)도 있는데 센터를 맡은 애는 날개를 달고 왔다.
뒤에 후광 대신 날개에서 떨궈져 나온 잔깃털이 양채준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천사네.”
막 카메라 앞에서 방정맞게 뛰어다니던 태연이 즐겁다는 듯 눈을 빛내며 양채준의 주변을 맴돌았다. 양채준은 수줍은 듯 두 손을 맞잡고만 있었는데 그의 날개에서 이탈한 깃털과 솜이 웃던 태연의 입속에 들어갔다.
목을 부여잡고 기침하는 태연과 그런 태연에게 미안해서 등을 두드려주며 더 많은 솜먼지를 만들어내는 양채준까지 가관이 아니었다. 심지어 양채준의 날개는 그의 몸집 두 배보다 커서 주변에 있는 걸 다 건들고 있었다. 그 웃지도 못할 광경에 재경은 이게 벌칙이었나 싶었다.
슬쩍 카메라를 보니 스태프들이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이미 다 알고 있는데도 재밌나보다.
‘오늘 연습은 건너뛰라는 의민가?’
그렇게 생각한 재경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답답한 마음에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제발 정상적인 옷 좀 입고 와라.”
재경의 바람이 통했는지 하준이 실크잠옷을 입고 나타났다. 당장 자도 좋을만큼의 부드러워 보이는 옷이지만 재경은 괜히 제 가슴을 쓸어내렸다.
“저건 괜찮아.”
무난하다. 적어도 움직이는데 크게 문제는 없어보였다. 그런 재경의 속내를 알아챘는지 하준이 뒤에 숨겨온 베개를 옆구리에 꼈다.
“이거 옷 벗을 때까지 들고다녀야 한대.”
나 중간에 아무 데나 누워도 되겠다며 하준이 해맑게 웃고 있으니 재경은 이제 포기했다. 정우도 남았지만 이젠 뭐를 입고 와도 상관없겠다.
“어차피 시간은 있으니까.”
앞으로 미션까지 해결하려면 부지런히 익혀두는 게 좋다 여겼는데 오늘 하루는 정말 어쩔 수 없단 생각이었다. 재경은 아예 연습실 바닥에 주저앉아 태블릿을 들었다. 우선 안무를 다 익혀야 여기서 변형을 할 수 있으니 외울 때까지 볼 생각이었다.
“어?”
“어어?”
스태프와 연습생 누구랄 것 없이 놀란 소리에 재경이 뒤늦게 고개를 돌렸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정우를 향한 감탄사였다. 바닥에 앉아있던 재경은 바로 보이는 정우의 다리부터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길게 뻗은 다리가 바지의 핏을 살려주고 있었다. 상체를 감싸는 짙은 남색의 슈트가 인물의 분위기를 제대로 받쳐주었다. 어쩌면 슈트가 괜찮아서가 아니라 정우가 그 슈트를 살리는 걸 수도 있고.
어제 입었던 그 정장과 비슷하면서 느낌이 조금 달랐다. 어제의 정장은 차분하고 무난한 것에 비해 오늘은 맞춤으로 제대로 준비한 느낌이었다. 19살인데도 슈트를 기가 막히게 소화해내는 걸 보고 재경이 혀를 내둘렀다. 시간이 걸린다 싶더니 자신들과 다르게 머리까지 만져준 모양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머리까지 완벽한 정우가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저절로 모든 이가 정우에게 집중했다. 카메라마저 정우에게 포커스를 맞추고 있자니 재경 역시 반쯤 넋놓고 정우를 바라보다가 화들짝 놀랐다.
“무슨 모델 워킹하는 것도 아니고…….”
재경은 정우를 보고 잠깐 시선을 빼앗긴 게 억울한지 더욱 불만스럽게 툴툴거렸다. 쟤는 뭐 저렇게 깝깝하게 감싸놨는지. 아직 데뷔도 안 했으면 적당히 어색하고 적당히 애매해야 하는 거 아닌가? 쟨 왜 혼자 연예인이야?
재경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태블릿을 보았다. 아예 옆에 종이까지 두고 대형을 옮겨봤다.
연필을 입술에 톡톡 두드리며 고심하는 재경의 앞에 반질거리는 구두가 나타났다.
‘아 뭐야.’
재경이 뒤늦게 알아낸 것 때문에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정우를 올려다보았다.
“너 구두야?”
“어.”
정우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제 발을 내려다보았다. 종일 연습하기에 구두는 맞지 않았다.
“너도 연습하긴 글렀네.”
뒤늦게 본 하준도 잠옷에 맞춰 폭신한 슬리퍼를 신고 있으니 결국 이 안에서 연습이 제대로 되는 건 자기뿐이었다.
“미션이 이상하네. 아무리 그래도 연습할 수 있게 해줘야 하지 않나?”
재경이 불만을 감추지 않았다. 카메라에 어떻게 비치냐는 관심 밖이었다. 그보단 이번에 설 무대 준비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게 더 신경 쓰였다.
“내 눈엔 재경이가 더 이상하네?”
정우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얼굴을 들이민 하준이었다. 하준이 재경의 손에 있는 종이를 가리켰다.
“왜 그렇게 연습에 목을 매. 그렇게 1등하고 싶었어?”
“…….”
“그랬구나. 우리 재경이 1등하고 싶었구나.”
하준이 이제 알았다는 듯 재경의 머리를 토닥이고 가버렸다. 재경은 하준이 만지고 간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것도 알지 못한 채 멍하니 있었다. 하준의 말대로 자기도 모르게 계속 연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게. 나 왜 이러지?’
대충 하다가 뒤로 빠질 생각도 못하고 연습, 연습, 연습. 왜 그랬을까. 이번에 오디션에 들어오면서 뭐하나 준비한 것 없이 와놓고는 정작 무대를 준비한다니 온통 그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엄마한테 잘 보이려고 춤추는 것도 아니면서.
재경이 흐린 시선으로 제 종이를 보고 있자니 정우가 그의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해줬다.
“잘하고 있어.”
잡으러 다닌 보람이 있네.
“뭐가 잘하고 있냐는거야.”
재경이 괜히 답답한 마음에 정우의 손을 탁 처냈다. 자신을 놀리는 듯한 기분이라 좋게 받아지지 않았다.
“어차피 떨어질거지만 그전까지 다른 사람한테 부담주지 않으려고 하는 거잖아.”
“…뭐, 그게 그럴 수도 있고.”
재경이 작게 헛기침을 하며 아무것도 아닌 듯 흘려넘겼다. 방금까지 안 좋아지려고 했던 기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재경의 표정이 다시 나아지는 걸 본 정우가 남몰래 미소를 지었다.
* * *
한데 모인 연습생들이 저마다 옷을 바라보았다.
“재경인 괜찮은데 나머지가 문제네. 이러고 춤을 추기가 애매하잖아.”
하준이 난감한 얼굴로 한 말에 모두가 동의했다.
“채준이 뛰어다니면 우리 다 재채기하느라 춤 못 출걸.”
태연이 공중에 떠다니는 솜을 밀어내며 말하자 양채준이 슬그머니 제 날개를 매만졌다. 하준이 보기에도 채준의 날개가 제일 많이 걸렸다. 거기다 또 한 사람.
“우주 넌… 팔을 못 벌리겠고.”
팔을 벌릴 때마다 앞섶이 벌어지는 우주가 제 옷을 잘 그러모으며 수줍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재경은 제 생각을 고스란히 읽어주는 듯한 하준의 말에 격하게 공감했다. 심지어 하준은 잘못하다 정우에게 밟히기라도 하면…
“아무래도 오늘 연습은 노래 위주로 하는 게 좋겠지?”
리더는 정우지만 하준이 자연스럽게 이끌어 나갔다. 물론 정우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대형도 같이 맞춰보면 될 거 같아요.”
재경이 슬쩍 안무를 하진 못하지만 노래에 맞춰 자리에 서 보는 것까지 권했다. 그러자 하준이 좋은 생각이라며 고개를 끄덕이면서 연습할 내용이 정해졌다.
“그럼 시작할까?”
하준의 말과 함께 모두가 전면의 거울 앞에 섰다. 재경은 막상 거울에 서자 자신은 물론 다른 이를 다시 보게 되었다. 전부 각양각색이었다.
날다람쥐 복장에 천사, 정비공에 잠옷과 슈트까지. 그나마 자기가 제일 정상이라고 생각하던 재경이 다시 흘러내리는 옷을 추켜세우고 정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깜짝 놀랐다.
“다들 왜 그렇게 봐요?”
“아니…….”
재경과 눈을 마주친 사람들이 헛기침을 하거나 안 본 척 딴청을 피웠다.
내 옷이 부러워서 그런가?
재경이 슬쩍 제 옷을 매만지며 물었다.
“바꿔 입고 싶어요?”
“아닛.”
“그건 네가 제일 잘 어울려.”
“맞아. 잘 어울려서 봤어요.”
재경은 딱히 그런 시선이 아니었던 거 같은데 싶다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시작해요.”
노래를 틀자 다들 같은 자세를 취했다. 처음 정도는 다 익혀서 살짝씩 반응한 것이다. 각에 맞춰 팔을 뻗는 동작 후 부드럽게 몸을 둥글리는 안무인데 재경이 그것을 작게나마 추려고 상체를 숙일 때였다.
“스탑.”
“어어어어.”
“아니야. 이건 아니야.”
다들 재경을 말리는 듯 다급히 말을 꺼냈다. 그러나 재경은 왜 그런지 몰라 주변을 돌아보았더니 급기야 옆에 있었던 정우가 재경의 몸을 끌어안았다. 갑자기 끌어안긴 재경은 어벙벙한 눈으로 정우를 보려고 했다. 그래봐야 그의 귀와 머리카락 정도지만.
“왜 그러는데. 무슨 문제 있어?”
재경이 이상하다는 듯 묻자 정우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모르는 게 제일 문제야.”
그 사이 하준이 어디서 빨래집게를 구해왔다.
“이거라도 하고 있자.”
정우가 두말 없이 비켜서자 하준이 재경의 앞을 야무지게 잡아 빨래집게를 꽂았다. 재경이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다들 왜 말렸는지 알았다. 옷이 유난히 흘러내리고 크다 싶었는데 속이 보였나보다.
그게 대순가 싶다가도 이내 다들 보기 싫어서 그런가 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이 빨래집게는 어디서 가져왔지?
최우주도 빨래집게를 하나 얻어 여미고 있는 동안 재경은 정우를 힐끔 바라보았다.
“속보여서 가린거야?”
정우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전면 거울을 가리켰다. 실상 거울 한쪽에 둔 카메라와 뒤에 있는 카메라를 가리키는 거였다.
그에 별 생각없던 재경도 알았다는 듯 빨래집게를 매만졌다. 여기 연습생들에게 비치는 거야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카메라에 담긴다고 생각하니 절로 앞섶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고마워.”
“딱히 고마울 것도 아닌데.”
재경의 인사에 정우는 별거 아니라는 듯 앞을 바라보았다.
“어? 형 귀가 빨개졌는데.”
태연이 중얼거리는 소리는 정우가 트는 음원에 가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