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아이돌-40화 (40/125)

40화

“…우리 같은 방이야?”

“어.”

정우가 캐리어를 끌고 와 다른 침대 옆에 두었다.

“어떻게 우리가 같은 방이야?”

“내가 정했는데?”

“뭐? 어떻게?”

“2인 1실이라서 내가 홍보팀 인원 나눠서 냈어.”

정우가 제 사원증을 들었다. 홍보팀장.

“나한테 말 한마디 없이?”

“내 권한인데?”

“아니, 그래도…….”

“정 억울하면 네가 제비뽑기로 팀장하지 그랬어.”

재경이 황당한 눈으로 정우를 보았다. 우연히 한 조가 되는 것도 억울할 지경인데 오늘은 진짜 이정우 때문에 환장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숨어다녔는데도 잡히고 같은 조가 된 것도 모자라 방도 지 마음대로 나눴단다.

결국 재경은 참다못해 확 내질렀다.

“그렇게 내가 좋냐!”

징글징글하게 들러붙네 정말.

재경의 외침에 정우가 캐리어를 열던 행동 그대로 멈췄다. 잠깐 재경이 한 말을 곱씹던 정우가 그대로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추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냐. 왜.”

“대놓고 자기 좋냐고 말하니까 웃겨서.”

“웃겨? 그게 웃겨?”

재경은 침대에 앉은 그대로 정우의 등을 발로 꾹꾹 눌렀다.

“너 진짜 나한테 왜 그러냐. 나랑 팀 못해서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어? 어? 떼어줄까?”

재경은 정우의 넓은 등을 힘껏 밟는데도 몸이 앞으로 밀리지 않는 게 더 얄미워서 중간에 관뒀다. 그리고는 아예 침대에 몸을 기대고 누워있자니 피곤함이 풀리며 노곤노곤해졌다.

오늘은 발표식을 하고 팀을 이루고 콘셉트 회의를 하느라 하루가 유난히 길었다. 가물거리는 눈을 천천히 감고 있으니 침대가 기울어지며 누군가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밥 먹고 자.”

“…귀찮아. 그냥 잘래.”

재경이 신경쓰지 말라는 듯 고개를 베개를 가져와 베고 있자니 정우가 배를 찔러댔다.

“너 지금 꼬르륵 소리 나.”

“괜찮아. 한 끼 굶어도 안 죽어.”

아까까지만 해도 호텔밥이니 뭐니 했던 게 무색하게 재경이 대충 손을 휘저었다. 지금은 잠이 제일 고팠다.

*  *  *

이른 저녁에 잠이 든 재경이 멍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간접조명에 비친 그림자를 보던 재경이 슬쩍 눈동자만 돌려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2시.

“……배고파.”

졸려도 먹고 잘 걸 그랬나. 쏙 들어간 배를 어루만지고 있으니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무드등이 켜졌다.

재경이 고개만 살짝 돌려 안으로 들어오는 이에게 물었다.

“어디 다녀와?”

“연습.”

“설마 이 시간까지?”

정우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트레이닝 상의를 끌어당겨 얼굴에 맺힌 땀을 닦았다. 저렇게 연습을 해도 모자랄 판에 잠을 자버린 게 미안해졌다.

“나도 연습해야 하는데.”

재경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정우가 그를 힐끗 바라보더니 수건과 갈아입을 옷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게으름을 피워버린 것 때문에 화났나 싶어서 재경이 멋쩍은 듯 제 머리를 긁적였다.

그사이 씻고 나온 정우가 머리를 대충 수건으로 훔치며 들고왔던 검은 봉지를 꺼냈다. 전자렌지의 앞에 가서 뭔가 움직이고 있자니 재경은 그냥 모른 척 잘까 아니면 궁금하니 슬쩍 볼까 싶은 고민했다.

‘컵라면? 삼각김밥?’

심지어 삼각김밥은 6개나 됐다. 저걸 혼자서 다 먹으려고 사왔나 싶은 순간 정우가 재경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

“나도?”

“저녁 안 먹어서 배고프잖아.”

정우는 앞에 앉으라고 손짓하고는 끓은 물을 컵라면에 부었다. 그 태연한 행동에 재경이 배를 어루만지다 일어났다. 단순히 한 끼 굶은 정도면 어떻게 버텨 보겠는데 그전에도 잘 먹던 게 아니라서 정우의 제안을 밀어내기 아쉬웠다.

재경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삼각김밥 하나를 들었다.

“내가 먹은 건 돈 줄게.”

“마음대로.”

정우는 이러나저러나 상관없다는 듯 제 삼각김밥을 뜯었다. 그 모습에 부담을 지운 재경이 저도 삼각김밥을 뜯어서 막 입에 넣으려던 찰나였다.

“재경아.”

“응?”

재경이 삼각김밥을 넣으려다 말고 정우를 바라보았다. 정우는 자신이 재경을 불러놓고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더니 곧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한 입만.”

*  *  *

새벽에 삼각김밥을 먹고 연습하느라 결국 늦게 잔 재경과 정우는 방송으로 나오는 알람 소리에 일어났다.

재경은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뒤척이고 있으니 정우가 먼저 일어나 화장실에 들어갔다.

“아… 괜히 먹었나.”

재경이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괴로운 듯 신음을 흘렸다.

“그냥 나갈 거야?”

정우의 물음에 재경이 고개를 저었다. 재경은 세수를 한 듯 정우의 젖은 앞머리를 반쯤 뜬 눈으로 보았다. 방에는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지 않지만 복도에 나간 순간부터는 달랐다. 남자들도 꾸미기 전과 후가 다르다는 게 비춰봐야 좋을 게 없었다.

“양치만 하고 나갈래.”

물론 재경은 관심 없었다. 비척비척 일어나 양치하고 나오니 어느새 평소와 다름없이 말끔한 정우가 재경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가자.”

“그러고 나가겠다고?”

“왜?”

재경이 턱에 남은 물기를 손등으로 훔치며 물으니 정우가 잠시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손을 뻗어 재경의 머리를 헝클었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재경이 고개를 뒤로 뺐다가 거울에 제 뻗은 뒷머리를 발견했다. 이거 때문이었나.

재경이 뒷머리를 대충 쓰다듬고 있으니 정우가 먼저 밖으로 나갔다. 재경은 그런 정우의 뒤를 따라가며 후드를 푹 눌러썼다.

하루의 시작이었다.

*  *  *

푹신한 러그가 깔린 홀에서 연습생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후드를 푹 눌러쓴 상태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귀를 기울였다.

“그동안 여러분들을 대상으로 일주일간 투표를 진행한 게 있는데요.”

늘 앞에 나와서 이것저것 설명해주던 PD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김 작가라고 불러달라던 그 여자였다.

“각 연습생에게 잘 어울릴 것 같은 패션을 올려달라고 했고 그것을 취합해서 가장 많이 나온 3가지를 뽑았어요. 여기 세 장의 카드를 드릴 건데요. 원하는 하나를 뒤집어서 나온 옷을 입으시면 됩니다. 반나절만 할게요.”

설명을 들은 재경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따로 시간을 빼는 게 아니라 옷만 갈아입으면 되는 거라 간단하게 생각했다.

“자, 그럼 한 사람씩 저기 작은 부스 안으로 들어가서 한 장의 카드를 뒤집어주세요. 환복하고 나면 자유롭게 다니셔도 좋습니다.”

김 작가의 신난 듯한 외침과 함께 번호순으로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누군가를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으악, 짧은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그리고는 갈아입을 옷을 받아들 때도 심심하지 않게 다양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새 자신의 차례가 오자 재경은 무덤덤한 얼굴로 부스의 천을 걷어 올렸다. 들어가기 직전 안에 놓인 한 대의 카메라를 발견하고는 재경이 안으로 들어왔다. 타로 카드처럼 화려한 문양의 세 장의 카드를 보던 재경은 고민하는 기색 없이 하나를 뒤집었다.

“아…….”

글이 아니라 그림이 적혀 있었다. 라운드티에 반바지. 평범한 의상이라 재경은 그 카드를 들고 그대로 나왔다.

“이거요.”

카드를 보여주자 스태프가 곧장 예쁘게 접은 옷을 내밀었다. 밝긴 하지만 무채색의 티에 검은색 면 트레이닝 재질이라 재경이 만족스럽게 받아들였다. 다른 연습생이 받아들 때 언뜻 비치던 초록색이라던지 가죽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  *  *

환복하고 난 재경이 연습실로 들어갔다. 역시나 안에는 자리 잡은 스태프가 보였기에 재경이 살짝 목인사를 하고는 적당히 한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나의 벽면이 거울로 되어 있으니 재경이 멀뚱멀뚱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무채색의 옷이다 보니 나쁘지 않았다. 더불어 오늘 하루 종일 입고 다녀도 좋을 정도로 편했다. 뽑기 운이 좋았던 건지 아니면 그마나 어울리는 게 평상복인지 싶었다. 다만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옷이 많이 크네."

재경이 드러난 한쪽 쇄골을 어색하게 매만졌다. 티가 얼마나 큰지 엉덩이를 가릴 정도였다. 완전 박시하게 입는 건지 무릎 위까지만 내려오는 반바지가 한 뼘밖에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 소매가 길어서 손이 반이나 가려졌다. 손을 들어 이리저리 돌려보던 재경은 어깨를 한번 으쓱이고 말았다. 좋은 게 좋은 거지.

살짝 어깨가 드러나긴 하지만 뭐 추켜세우는 것도 번거로워서 가만히 뒀다.

“어? 먼저 온 사람이 있네.”

재경이 거울을 통해 누가 들어왔는지 확인했다가 놀라서 휙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같은 팀이 된 최우주가 멋쩍은 듯 쭈뼛거리며 들어오고 있었다. 한 벌로 된 정비공 옷이 그의 남자답게 잘생긴 얼굴에 잘 어울렸다.

“서재경 연습생이죠?”

“네.”

재경은 최우주의 옷을 힐끗 바라보며 다소 어벙하게 대답했다. 지퍼가 있다 말아서 바스트 포인트가 보일락 말락 한 게 아슬아슬했다. 저 옷으로 오늘 연습이 가능하려나?

“나도 왔어요.”

재경과 최우주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했다. 날다람쥐인지 뭔지 한 벌짜리 동물옷을 입은 태연이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아…….”

춤을 춰야 하는데 다리가 벌어지다 말 것 같았다. 재경이 다리를 보고 있자니 태연이 귀엽게 그 자리에서 깡충깡충 뛰었다.

“저 귀엽죠?”

“그렇긴 한데…….”

연습은?

재경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한 채 그냥 시선을 피했다. 이 정도면 다음에 들어올 연습생들은 어떤 옷을 입었을지 궁금해지기 시작해졌다.

‘나는 정말 평범해서 다행이다.’

재경은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옷은 눈에 띄지 않겠지.

하얀 피부에 가느다란 목, 일자로 곧게 뻗은 쇄골에 부드럽지만은 않은 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어깨. 소년인 것 같다가 여자보다 예쁜 쇄골을 가졌다고 여겨지다가 남자다운 어깨선을 가진 거 같다가 알 수 없는 묘한 매력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기는 것도 모른 채 재경은 자신의 복장을 만족스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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