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재경이 좀처럼 숙인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서재경.”
정우의 조용한 목소리로 재경을 불렀다.
“지금 합격했다고 설마 데뷔할 줄 아는 건 아니지?”
“…뭐?”
재경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정우를 보았다. 그리고 그가 한 말을 곱씹어 보았다.
“지금 남은 인원은 54명이야. 앞으로 45명이 더 탈락한다는 소리야. 그런데 지금 합격했다고 데뷔조에 든 거 같아?”
“어…….”
정우의 말은 틀린 게 아니었다. 이제 고작 첫 번째 발표식이었다.
“아직 끝이 아니야.”
정우는 아직 긴장을 놔선 안 된다는 듯 말하지만 듣는 재경은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끝이 아니었다. 어차피 마지막에 남는 건 9명이고 자신은 절대 그 안에 속하지 않기만 하면 된다. 앞으로 발표식은 몇 번 더 있으니 벌써 실망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재경은 바로 다음 미션을 생각해 보았다.
지금까지야 99명이 있으니 모두를 담을 수 없기에 미션을 통해 방송에 나가는 시간을 얻어갔는데 이젠 그런 조건은 사라질 것이다. 거기다 재경은 혼자가 아니었다.
재경이 자신을 둘러싼 연습생들을 하나둘 짚어봤다. 여기서 누구 하나 붙어다녀 봐야 좋을 게 없었다. 그렇다고 피해 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싶었다. 재경의 고민은 깊어져만 갔다.
“아쉽지만 헤어져야 할 시간입니다. 우리가 비추고 있는 이 연습생들은 많은 국민이 발견하지 못한 보석이었습니다. 지금 잠시 여러분이 보이지 않는 곳에 있겠지만 곧 다시 찾아와 밝게 빛날 테니 잊지 말고 기다려주십시오.”
최PD의 말을 들은 재경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보석. 재경은 무대의 좌석에 앉은 연습생들을 보았다. 실망하고 안타까워하던 그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이번이 마지막은 아니라는 듯 그들의 얼굴에 미래를 위한 다짐이 엿보였다. 그 표정에 재경은 눈을 뗄 수 없었다. 자신도 소속사에서 퇴출당할 때 실망하지 말자며 다음을 기약할 때가 있었다.
엄마의 기대를 받으며 무대에 꼭 서겠다고 희망을 품었던 그런 시기가…….
“재경이 형.”
“어?”
옆에서 팔을 잡아 오는 소운으로 인해 재경이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무슨 생각 해요?”
“아니, 그냥.”
“합격자들 대회의실로 모이래요.”
그제야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난 연습생들이 보였다. 재경이 소운을 따라 일어났다.
“형 이번에도 가방 가져왔어요?”
아… 가방.
* * *
합격한 연습생들에 한해서 2주간의 합숙을 해야 하는 걸 부모님께 알리도록 시간이 주어졌다. 각자 설레는 마음으로 핸드폰을 들고 저마다 통화 버튼을 눌렀고 정우 역시 곧바로 제 아버지에게 전화했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상대방이 전화를 받는 걸 확인하자마자 정우가 말을 걸었다.
“저예요.”
- 결과는?
“합격했어요.”
정우는 무덤덤하게 대답했고 수화기 너머 상대방 역시 그렇구나, 라며 담담하게 받아쳤다. 감정표현이 극히 적은 부자는 결과 외에 수고했다는 등의 인사는 없었다.
- 순위는?
“1차 발표식에서는 순위 안 나와요.”
- 네 화제성이 제법이던데 모니터링해 보마.
“…네.”
아버지의 말에 정우는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럼에도 미처 감추지 못한 미소를 손가락으로 쓸 듯이 감췄다. 이제 고작 한 번 발표식을 치른 것뿐인데 아버지에게 아주 조금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 지켜보마.
“네, 아버지.”
간단한 통화가 종료되자 정우가 핸드폰을 다시 보관함에 넣고 돌아섰다. 그러자 멀지 않은 곳에서 통화 중인 재경을 발견했다.
“네, 죄송합니다.”
재경이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2주 뒤부터 바로 할 수 있어요.”라고 대답했다. 확실하진 않지만 부모님과 하는 통화 같진 않았다. 오늘부터 2주간 합숙하게 될 건데 말하지 않아도 되나 싶지만 금방 생각을 지웠다. 정우는 재경의 통화를 더 듣는 대신 자리를 벗어났다.
* * *
재경은 모든 연습생이 모이기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각자 자기 가족들에게 통화하고 기뻐하느라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스태프들도 마지막 확인작업을 하고 있으니 가만히 있다 보면 될거란 생각이었다. 의자에 한쪽 다리만 올린 채 팔로 기대고 턱을 기대고 있으니 정우가 재경의 팔을 톡 건드렸다.
“왜?”
“기분은?”
지금 기분이 어떠냐는 질문이었다. 재경은 다시금 합숙하게 된 제 처지를 생각해봤다. 알바는 아까 발표식이 끝나자마자 전화해서 사정을 설명했고 가방은 숙소에 놓고 온 참이었다.
“그냥 그래.”
다른 연습생들은 합격했다는 것에 상기된 얼굴을 감추지 못하는 사이에서 재경은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좋은 건 아니었다. 남들처럼 안도하거나 다음 무대를 이어갈 수 있다는 희망이 없었다.
“넌?”
재경은 제 감정을 더 이야기하는 대신 정우에게 되물었다. 자기야 자기 자신의 사정을 잘 알고 있으니 궁금할 게 없지만 정우야말로 딱히 좋아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나는…….”
정우는 재경이 아닌 앞을 바라보았다. 곳곳에 카메라가 있고 PD의 지시하에 스태프가 바쁘게 돌아다녔다.
“좋아.”
“…그게 좋다는 표정이야?”
재경이 정우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다. 좋으면 좋은 티를 내야지. 뭐가 이렇게 뚱해.
이 자리에서 제일 뚱한 두 사람이 서로를 말똥말똥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재경이 정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재경이 먼저 다가온 행위에 정우가 무슨 짓인가 싶어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미리 말할게. 우리 헤어지자.”
“갑자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처음처럼 단체곡하진 않을 거 아니야. 적당히 인원수대로 나눌 텐데 우리 헤어지자고.”
재경의 얄미우리만치 담담한 말투에 정우의 입매가 비틀렸다. 대놓고 싫다고 하면 더 붙고 싶어지는 걸 모르나?
“그건 봐야 알거 같은데?”
“난 미리 경고했어. 우리 같이 붙어봐야 좋을 거 없어.”
“왜 없어. 방송에도 잘 잡히던데.”
“뭐?”
“아니야.”
정우는 재경이 생방송을 보지 않은 걸 알기에 더 설명하지 않았다. 재경은 정우가 한 말이 뭔지 생각해 보다가 말았다.
어느새 자리 잡은 연습생들은 물론 카메라가 이쪽저쪽을 찍어대고 있었다. 재경은 정우와의 말싸움이 찍히지 않게 그냥 고개를 돌려버렸다.
“두 번째 라운드를 함께 하게 되었네요. 축하합니다.”
최PD의 말에 연습생들이 환호를 보냈고 금세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게 올라왔다. 말 한마디로 분위기를 띄운 최PD는 스태프와 눈빛을 주고받은 후 말을 이어갔다.
“두 번째 무대가 궁금할 텐데요. 바로 이것입니다.”
최PD의 신호에 맞춰 화면에 하나의 조직도처럼 보이는 그림이 떠올랐다. 그게 무엇인지 알아보지 못하는 연습생들이 저들끼리 작게 속삭이는데 곧 그림 위로 글씨가 나타났다.
인사팀, 총무팀, 마케팅팀, 기획팀, 영업팀, 경영지원팀, 홍보팀, 개발팀, 법무팀.
재경이 그것을 돌아보고 있는 사이 옆에 자리한 소운과 하준이 속삭이는 대화가 들렸다.
“그런데 왜 저걸 해요? 인사팀? 총무팀?”
하준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잘 모르겠어. 정장 입는 거 말고 떠오르는 게 없네.”
그리고 정우도 재경의 귓가에 속삭였다.
“너는?”
재경은 별생각 없이 있었던 터라 정우의 물음에 그제야 답을 생각해봤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들어 부서를 세봤다.
“부서가 9개니까 6명씩 모을 거 같아.”
“회사에 가면 볼 수 있는 부서명이죠. 예상되시죠? 바로 그룹 평가가 되겠습니다.”
재경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최PD의 설명이 잇따랐다.
"미션을 통해 6명씩 모여 9개 팀을 만들면 그대로 다음 무대를 꾸미게 될 것입니다."
역시나 팀을 정하는 방법이었다.
“우선 각 팀을 구성할 구심점이 필요하겠죠. 제비뽑기를 통해 팀장을 정하겠습니다.”
최PD의 말이 끝나자마자 스태프가 제비공이 들어있는 통을 가져왔다. 연습생들이 일어나지 않고 알아서 통이 오면 그 안의 공을 꺼내도록 했다. 재경 역시 제 앞으로 온 통에서 공을 뽑았고 안을 열어 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팀장이 아니란 것이 기뻐하던 것도 잠시 옆에서 정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홍보팀입니다."
"이정우 연습생이 홍보팀장이 되었습니다."
재경이 휙 고개를 돌려 정우의 손에 있는 물건을 확인했다.
“너… 팀장이야?”
“…어.”
서로 한 템포씩 느린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것은 놀라서 멍해진 게 상황 파악을 하느라 느려진 반응들이었다. 정우가 종이를 쥐고 고개를 번쩍 들었을 때 재경은 반사적으로 그의 시선을 피했다. 두근거리며 빨리 뛰는 심장을 잠재울 시간도 없이 최PD의 설명이 흘러나왔다.
"팀장이 돌아다니며 숨은 인재들을 찾아내면 됩니다. 만약 마주쳤을 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못 본척해도 좋습니다. 어디까지나 스카우트니까요. 자기 팀과 어울리는 색깔을 가진 멤버들로 모아주시면 됩니다."
재경은 딱 한가지 생각밖에 안 들었다.
이정우, 이정우만 피하자.
* * *
재경은 비품실의 구석에 몸을 숨겼다. 연습생들을 비추느라 바쁘게 돌아다니던 카메라로부터 피할 수 있었다.
갈아입은 와이셔츠가 구겨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팔에 매달린 끈을 매만지던 재경이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재경은 한자리에 5분 이상 머물 수 없다는 규칙을 떠올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다른 비밀스러운 공간을 찾아야 했다. 재경이 주변을 대충 둘러보다 눈에 띄는 서류철을 집었다. 서류철로 눈밑을 가린 재경이 살금살금 고양이 걸음으로 다음 숨을 곳을 물색했다.
어쩐지 옷을 갈아입히고 버스까지 타야 하나 싶었는데 미션이 이뤄지는 장소가 회사란다. 정말 회사를 촬영장소로 빌려서인지 장소가 어색하기만 했다.
그때였다. 근처에서 발걸음이 들리면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