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캐리어를 끌고 오는 다른 연습생들에 비해 재경은 오늘도 가벼운 가방 하나가 다였다. 이게 고스란히 방송에 탄 걸 생각하면 바꿔야겠지만 재경은 한숨을 한번 내쉬고 말았다. 어차피 캐리어도 없고 오늘 탈락하면 도로 와야 하니 번거롭기만 하다고 생각했다.
‘오늘 탈락하면…….’
재경은 제가 나왔던 방송 시간을 따져봤다. 길게만 느껴졌지만 다른 연습생에 비하면 짧은 시간이었다. 원래라면 오늘 떨어질 거라 단언해야 하지만 방송에서 자신이 나왔을 때 소운과 정우가 말해 주던 인터넷 반응이 조금 걸렸다.
‘아니야. 예민하게 굴 거 없어.’
생각해 보면 소운이 방송되었을 때도 귀엽다는 반응이 올라오지 않았나. 재경은 억지로 생각을 끊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카메라가 보이기 시작하니 영역에 들어서고 있다는 걸 알았다.
안으로 들어가니 한쪽에 주륵 모여 있는 캐리어와 함께 메이크업을 받는 연습생들이 보였다. 하나같이 오늘 발표식을 앞두고 긴장한 얼굴이었다. 재경은 그들의 심정을 모르는 척 캐리어 사이에 제 가방을 내려놓고 가까운 줄에 가서 섰다.
“이쪽으로 오세요. 어머!”
여자의 목소리가 익숙하단 생각이 든 순간 재경은 인상을 찡그리려는 걸 겨우 참았다. 생방송 때 메이크업을 해줬던 그 사람이었다.
“어서 앉으세요. 어서.”
의자를 탈탈 터는 척하며 손짓하는 민소이를 보며 재경은 울며 겨자 먹기로 의자에 앉았다.
“최대한 느리고도 빠르게 해 볼게요.”
느리게 한다는 건지 빠르게 한다는 건지. 재경은 최대한 겉으로 표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며 눈을 감았다. 얼굴에 와닿는 솜의 감촉에 재경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느낌을 받았다.
매일같이 받아온 메이크업이었다. 눈을 뜨면 자신이 아닌 다른 얼굴이 되는 과정을 셀 수 없이 겪었다. 제 어둑했던 민낯이 인위적인 색으로 덮이고 그늘진 눈가는 아이새도우로 가려졌다. 남는 건 거짓 얼굴로 점철된 하얀 피부의 메인보컬이었다.
“데일리 메이크업으로 갈게요.”
민소이는 마음 같아서는 아예 붙잡고 뮤지컬 분장이라도 해주고 싶은 걸 꾹 누르듯 말했다. 그녀는 재경의 피부는 촉촉할 정도로만 가볍게 손대고 눈썹 정리와 입술에 혈색을 주고 물러났다.
“눈화장도 할까.”
손을 떼고 보니 눈이 조금 아쉬워서 하는 소리에 재경이 벌떡 일어났다.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잊지 않고 인사까지 건넨 재경이 뒤도 안 돌아보고 사라지니 민소이는 한숨을 겨우 삼키며 다음 연습생을 불렀다. 그녀의 원 픽은 서재경이지만 다른 연습생도 좋았다.
“눈이 예뻤던 그 친구구나.”
민소이는 금방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수줍어하는 연습생의 얼굴을 환하게 밝혀주었다.
한편, 재경은 직사각형의 형태로 늘어선 의자를 보았다. 이미 와서 자리 잡은 연습생들은 저마다 무리를 지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의자 앞으로 띄엄띄엄 자리 잡은 카메라까지 확인한 재경이 가장 구석진 자리에 가서 앉았다. 아니, 않으려고 했다. 누군가의 지갑이 아니었다면.
'여기에 왜 지갑이 있지?'
사적인 물건은 따로 보관함에 넣고 온 참이었다. 특히나 핸드폰은 꼭 넣어달라는 스태프의 말에 재경은 제 모든 걸 넣고 왔다. 그렇다고 지갑을 가져오지 말란 법은 없으니 상관없었다.
재경이 아쉬운 대로 그 옆에 앉았다. 앞에 다른 사람이 앉으면 이 자리도 썩 나쁘지 않아 보였다.
“역시 여기 앉을 줄 알았어요.”
재경이 제 앞에 드리운 가디건에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했다. 이소운이었다.
“형, 핸드폰 불나게 울렸을 텐데 어떻게 한번을 답 안 보내 줘요.”
재경은 대답 안 하는 사이 소운은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더니 옆에 앉았다.
“너, 여기 앉게?”
“네.”
“왜?”
“네?”
“다른 자리도 많잖아.”
“재경이 형이 여기 앉았잖아요. 다들 자기 무리랑 있는데요?”
“그 무리라면 나 말고도 또 있잖아.”
재경은 소운이 자신이 아닌 저 앞으로 갔으면 했다. 자기와 다르게 소운은 데뷔하고 싶으니 이런 구석에 있는 건 불리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운은 재경의 말을 따르는 대신 어딘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먼저 왔다더니 왜 이제 와요?”
“잠깐 어디 좀 갔다 왔어.”
하준과 정우였다. 하준이 소운이에게 인사를 건네면서 재경에게도 인사했다. 그리고 정우는 말없이 재경의 옆에 앉았다. 그러니까 아까 지갑이 있어서 재경이 앉지 못했던 그 구석진 자리였다.
“이거 네 지갑이었어?”
“응.”
자리 맡아둔 게 정우라는 걸 깨닫고 재경이 황당한 기분을 느꼈다. 아니, 누가 여기에 지갑을 놓나 싶었는데…….
재경이 가만히 정우를 보다가 앞을 바라보니 하준은 앞자리의 의자에 앉아 다른 연습생과 대화를 나눴다. 자연스럽게 이 무리에 들어있는 거 같아 재경은 편하지 못한 마음으로 앉아있었다.
여기서 이들과 떨어지는 방법은 하나뿐이라 생각하며.
“오랜만입니다.”
최PD의 인사와 함께 촬영이 시작되었다.
* * *
“미리 말씀드린 대로 오늘은 탈락자가 발표되는 날입니다. 탈락한 연습생에 한해서 순위가 발표될 것이고 합격자는 순위 미공개로 다음 무대를 준비하게 될 것입니다.”
최PD의 설명에 연습생들의 얼굴에 다양한 표정이 떠올랐다. 긴장, 불안, 초조…… 일부는 언뜻 자신감을 내비치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카메라가 돌아가면 굳은 얼굴로 바뀌었다.
“그래서 지금부터 호명되는 이름은…… 탈락자가 됩니다.”
최PD의 설명에 연습생들 사이로 동요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들 사이에서 묵묵히 앉아있는 재경은 제가 기억하던 오디션 프로그램을 떠올려보았다. 순위와 함께 합격자가 발표되곤 했는데 이건 반대로 탈락자를 불렀다.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어차피 발표식 자체가 좋은 것만은 아니었으니 금방 의문을 지웠다.
“그런데 보통 합격자를 발표하지 않아요?”
소운이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소리에 앞에 앉은 하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우리가 예상할 수 있었던 건 아무것도 없었잖아. 그러니 지켜보자. PD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려주시겠지.”
하준의 말대로 지켜보는 것밖에는 답이 없었다. 점차 동요가 가라앉기 시작하자 최PD는 연습생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탈락자는…….”
최PD가 잠시 말을 멈춘 사이 고요한 침묵이 감돌았다. 카메라와 함께 스태프가 움직이는 소리만 들리는 정적이 감도는 와중에 탈락자가 호명되었다.
“김준규 연습생.”
이름이 불린 연습생은 그대로 고개를 푹 숙였다가 일어나 무대로 올라갔다. 그다음 호명에 따라 연습생이 하나둘 무대로 올라가면서 재경은 그들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들이 소리 없이 내뱉는 숨엔 진득한 감정이 흘러나왔다. 열심히 했음에도 눈에 띄지 못한 아쉬움과 나는 안되는구나, 싶은 자괴감. 그리고 못내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게 그들의 억눌린 눈빛에서 느껴졌다.
재경은 문득 최PD의 머릿속이 궁금해졌다. 차라리 합격자를 보여준다면 놀라면서도 기뻐하는 장면을 찍을 수 있었다. 지금 탈락하는 연습생이 보내는 슬픈 감정이 과연 이 프로그램에 도움이 될까 싶었다.
5명이 모이면 한명씩 말할 기회를 주었고 무대에 자리한 좌석에 가서 앉았다.
한 사람씩 호명할 때마다 재경은 제 가슴을 꾹 움켜쥐었다. 이번에 탈락해야지만 자신이 원하던 계획대로 흘러가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최PD로부터 불려야 할 텐데.
“그다음 탈락자는…….”
길게만 느껴질 것 같았던 발표는 점점 끝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재경은 심난함을 달래기 힘들었다. 초조함에 손톱을 꾹꾹 누르고 있자니 옆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당장 재경은 정우에게 보지 말라고 할 여유가 없었다.
‘내 이름을 불러.’
5명씩 9조를 이루던 발표가 마지막 한 조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5명의 탈락자만을 앞두고 이젠 재경만이 아니라 모두의 긴장감이 최고조로 올라왔다.
재경은 눈을 감고 제 이름이 불리길 바라고 또 바랐다. 이곳에서 한 달의 시간을 버텼고 그 실장이란 남자의 마수로부터 벗어났다. 이제 이 발표식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 알바 갈 준비를 하면 된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며 재경은 두 손을 모았다.
“마지막 탈락자는…….”
최PD의 입에서 마지막이라고 할 때 재경이 번쩍 눈을 떴다. 제발. 제발. 제발.
“서……하권 연습생.”
“아…….”
누군가의 입에서 나왔는지 모를 탄식이 울렸다. 하준의 근처에 앉아 있던 한 남자가 힘없이 일어나고 있으니 재경은 차마 그를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저렇게 슬퍼하는 연습생의 앞에서 떨어지지 않았다고 실망한 제 표정이 보일까봐 그랬다.
그러나 당장 재경도 제 사정이 있었다.
‘나는 남은 건가.’
54명 안에 들었다. 그건 다음 라운드를 준비해야 하고 동시에 방송에 더 나온다는 뜻이었다. 재경은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내가 합격했다고?’
불안했던 게 현실이 되었다. 아니길 바랐지만 은연 중에 합격하면 어떡하지, 싶은 걱정이 있었다. 재경은 처음 계획이 무너지면서 초조함에 계속 제 손을 번갈아 가며 쥐었다.
‘이제 어떡해야 하지?’
앞이 깜깜했다. 또다시 아이돌이 되어 무대에 서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