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아이돌-31화 (31/125)

31화

“형.”

막 가게로 들어선 재경이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머리 위로 팔을 쭉 뻗어 흔드는 소운이 재경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트레이닝복이 아닌 청바지에 맨투맨티를 입은 소운은 십대의 싱그러움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형 보고 싶었어요.”

소운이 두 손을 맞잡으면 재경을 향해 억지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게 며칠 전 기다린다는 메시지 다음으로 보낸 이모티콘과 똑같아 미소가 나왔다. 재경이 눈치껏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커피숍 내부를 둘러보았다.

같이 방송을 보기로 해서 만나는데 방송이 시작될 때까지 1시간도 안 남았다. 더구나 약속장소는 카페였기에 재경이 의아한 투로 물었다.

“왜 여기서 만나는거야?”

“아, 여기서 모여서 가기로 했어요. 아무래도 방송 보기엔 집이 제일 좋을 거 같아서요. 하준이 형이 혼자 산대요.”

소운이 유리판 아래 비치는 메뉴판을 가리키며 뭐 먹을 거냐고 손가락으로 톡톡 가리켰다. 재경은 눈으로 대충 훑은 뒤 고개를 저었다. 자기는 먹지 않겠다는 의미를 보내며 소운에게 마저 말을 걸었다.

“넷이서 보는거야?”

그날 소운이 만든 단톡방은 네 사람뿐이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몰랐다. 같은 방을 쓰는 한찬형도 있었고 또 다른 멤버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재경은 단톡방에 ‘갈게.’와 ‘어디로 가면 돼?’ 2개 말고는 다른 건 말하지 않았다.

“네. 아마도?”

소운이 확실하지 않은지 말끝을 흐렸다.

“제가 장소를 알아보면서 몇 개 가게를 추렸는데 하준이 형이 자기 집이 어떠냐고 해서 바꿨거든요. 근데 하준이 형이 친한 사람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래.”

괜히 온다고 했나. 재경이 매일 하던 후회를 다시 한번 곱씹었다. 방송이 아니니까 조금 편하게 있다가 가면 될거라 여겼다. 학교에 나가고 알바를 알아보면서도 굳이 약속을 취소할 필요가 없어서(후회와 별개다) 나왔는데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싶었다.

그 윤하준이 데뷔 전에 어떻게 살았는지 보고 싶지도 않고.

“정우 형. 여기요.”

그때 소운이 자기에게 했던 대로 막 카페에 들어온 정우에게 팔을 흔들었다. 정우가 긴 다리로 성큼 걸으니 몇 걸음 만에 거리를 좁혀왔다.

“시켰어?”

“아직 고르고 있었어요.”

“넌 뭐 마셔?”

정우가 곧장 재경이 골랐을 메뉴를 물었다. 재경이 시키지 않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왜? 가서 마실 거 없어.”

“상관없어.”

재경은 거기 가서 불편하게 집어넣기보단 아예 안 먹기를 택했다.

돈도 없고.

정우가 재경을 물끄러니 보더니 소운에게 제 카드를 내밀었다.

“사람수 대로 시켜서 들고 가자.”

“형이 사게요?”

“아니. 집에 있는 사람들한테는 돈 받을거야. 너랑 재경인 내가 사줄게.”

“오, 진짜요?”

“난 됐어.”

소운이 반갑게 카드를 받아들였지만 재경은 부담스러워 거절했다. 그런데 정우보다 소운이 먼저 재경에게 엄한 듯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형 사주는 거 거절하면 벌 받아요.”

어린아이를 가르치듯 손가락까지 꼽은 소운이 조용히 말을 덧붙였다.

“형이 안 먹는다고 제거까지 취소하면 어떡해요.”

그런 이유가 있었구나. 재경이 얼떨떨한 눈으로 보고만 있자 소운이 알아서 시켜오겠다며 가버렸다.

“난 진짜 괜찮은데…….”

음료수를 사주지 않아도 좋다고 말을 덧붙였지만, 정우는 재경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왜 그렇게 봐?”

“너는…….”

“나 뭐?”

“…아냐.”

저렇게 운을 띄우고 말끝을 흐리는 게 얼마나 나쁜 건지 모르나. 재경이 등을 뒤로 밀며 정우에게서 고개를 돌릴 때였다.

“그날 인사하고 가지.”

“그날? 그날이 언제, 아…….”

정우가 말한 날이 언젠지 바로 알아들었다. 생방송을 마치고 호텔을 나갈 때를 말하는 거였다. 재경도 실은 그날 나가기 전 정우가 어딨는지 살펴봤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나도 너 찾다가 나갔다고 말하기가 그랬다. 재경은 “그냥…….” 이라고 대답하고 입을 다물었다.

손에 쥔 건 핸드폰이 다고 소운이 메뉴판을 보고 주문하는 시간이 의외로 길어지니 재경은 점점 불편함을 느꼈다. 이제 정우를 피하지 않겠다고 했으니 그에 맞게 대해줘야 하는데 막상 말하려고 해도 생각나는 게 없었다.

소운이 주문한 게 나오는 걸 보고 재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속 서 있던 정우에게 가자, 말하고는 그를 지나쳤다. 소운이 테이크 아웃잔이 담긴 캐리어를 든 채 다가왔다.

“빨리 가요. 아, 떨려.”

소운이 연신 떨리고 긴장된다며 계속 말을 걸어 하준의 집으로 가는 길이 어색하지 않았다. 그리고 빌라가 모여있는 곳으로 들어가더니 가장 안쪽의 건물로 들어갔다.

재경이 어색한 눈으로 근처를 둘러봤다. 숙소는 아니었다. 아무리 회사가 크고 좋았어도 처음 시작하는 아이돌에게 좋은 숙소를 내어주지 않았다. 그렇게 된다면 다음 아이돌에게도 그 다음 아이돌에게도 계속 비슷한 환경을 내줘야 하는 사정 때문이었다.

그런데 빌라들이 하나같이 크고 좋아보였다. 가족이 다 같이 사는 곳인가? 싶은 마음으로 따라가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가니 문이 하나였다. 이 또한 이상하단 생각했지만 재경은 순순히 정우를 따라갔다.

정우가 초인종을 누르자 기다렸다는 듯 하준이 나왔다.

“왔어? 재경이도 오랜만이야.”

재경이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가자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역시나 박건후와 민태연이 있었다. 같은 소속사에 있는 박건후, 민태연을 만나면서 인원이 늘어나는 것도 어떻게 생각하면 이해못할 것도 아니었다.

“일부러 부르지 않았어. 그냥 자연스럽게 처들어오더라고.”

재경의 시선을 눈치챈 하준이 먼저 변명을 내뱉었다. 재경은 상관없다는 듯 소파 끄트머리에서 앉았다.

“재경이 형이다.”

민태연의 호들갑스러운 인사에 재경이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언제부터 형이라 불렀는지 호칭이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이미 민태연을 포함해 전 멤버들을 원망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었기에 재경은 어색하게 받아줬다.

“그럼 난…… 재, 크흠 재경아.”

박건후가 동갑이라고 재경의 이름을 불러왔다

“재크재경이야? 제크재경? 제크재경아?”

민태연이 때를 놓치지 않고 박건후가 더듬은 걸 그대로 따라 했다. 물론 바로 응징당했다. 헤드락에 걸려 켁켁거리는 민태연이 살려달라는 듯 손을 뻗었지만 재경은 못 본 척 무시했다.

“시끄러워.”

정우가 옆에 앉으며 민태연과 박건후에게 주의를 줬다. 그리고 카페에서 가져온 커피를 내밀었다. 재경이 그것을 받아들인 채 티비에 자세를 고정했다. 혼자 보기 싫어서 오긴 했는데 영 어색하기만 했다.

“그럴 수 있지. 이런 건 떠들썩하게 봐야 제맛이라고.”

하준이 간식을 가져오며 하는 말에 재경이 뜨끔했다. 저도 충동적으로 간다고 한 이유가 이거지 않나. 어쩌다보니 제 옛 멤버들과 함께하게 된 것도 얼떨떨한데 하준이 자신의 속을 들여다본 듯 말해서 더 흔들렸다.

“같이 보면서 다른 애 얼굴 나오면 놀려주고 어? 창피해하는 애 놀려주고 어?”

“…….”

하준과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했던 재경이 그를 외면했다. 그냥 놀릴 생각으로 애들을 모은 모양이었다.

“시작한다. 시작해요.”

바닥에 앉은 소운이 소파에 등을 기댄 체 테이블을 두드려댔다. 긴장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재경도 살짝 떨리는 마음으로 티비를 보았다.

제발 나는 밋밋해라. 나오다 말아라. 1분이 아니라 59초만 나와라, 따위의 주문을 외우면.

choose a boy 노래가 bgm으로 깔렸다. 180분간의 방송이라 했는데 생각보다 이르게 방송이 시작된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민태연이 핸드폰을 뭔가를 봤는지 설명해줬다.

“이거는 안 들어간데. 9시부터 정확히 180분 들어가나봐.”

“그렇구나. 소개하는 건 별개네.”

참 시간 철저해. 박건후의 혼잣말에 재경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전에 생방송을 치렀던 무대를 잠깐 보여주고 총 99명의 연습생이 나왔음을 자막으로 알렸다. 그리고 최 PD가 그들에게 했던 대로 시청자에게도 같은 설명을 깔끔하게 정리해서 띄워줬다. 각자 열심히 한 만큼 시간을 주었다는 것.

그리고는 화면 왼쪽 상단에 시간은 나타내는 작은 시계 표시가 떴다. 룰을 전부 소개하고 난 후 본격적으로 방송이 시작되었다.

“어?”

재경이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각자 정해진 분량을 말했는데 예선을 치룬 내용이 들어갔다. 그럼 저것까지 다 포함해서 세는건가? 싶었다.

“아, 맞아. 우리 예선 때도 카메라 있었지.”

“역시 나올 줄 알았어.”

정말로 공평하게 방송을 짜려고 노력했는지 99명의 얼굴이 순차적으로 나오고 있었다. 한 사람당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예선에서 부른 노래의 두 소절 가까이 방송으로 내보내고 있었다.

‘1분이라며…….’

재경이 배신당했다는 듯 울컥한 얼굴로 방송을 보았다. 그때 카메라 테스트라고 그래놓고 고스란히 1화에 들어갔다니. 재경은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혔다는 얼굴로 멍하니 TV를 보았다.

정확히는 최PD가 소개하는 시간이나 심사 외에 1분의 PR이라고 했지만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말았다. 아니, 심사야 나와야 하는 부분이니 알겠다고 쳐도 저 테스트용은 너무한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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