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아이돌-30화 (30/125)

30화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숙소에 오는 날 탈락자가 결정되는 순위권부터 발표할 것입니다. 탈락하신 분은 집으로 돌아가고 합격자는 남았다가 함께 숙소 이동할 것이니 핸드폰 잘 가지고 있으세요.”

재경은 복잡한 마음으로 일어났다. 짐을 들고 집에 가기만 하면 됐다.

“아차차.”

최 PD가 까먹은 게 있다는 듯 제 이마를 때렸다.

“잊은 게 있네요.”

그의 능청스러운 반응에 재경처럼 일어났던 몇몇이 도로 자리에 앉았다.

“2가지를 깜박했네요. 우선 3차까지 순위는 전부 비공개 처리됩니다.”

“…뭐?”

재경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를 내고 말았다. 정우가 그를 바라보는 시선도 느끼지 못한 채 재경은 PD가 한 말을 따라 했다.

“비공개?”

순위를 가르쳐주지 않는다니?

“물론 전부 비공개는 아닙니다. 탈락한 연습생에 한해서 순위가 나오겠지만 합격한 연습생들의 순위는 가려집니다. 그건 앞으로도 합숙 생활을 하는데 있어 서로 간의 경계를 짓지 않기 위함입니다.”

만약 1차 순위권에서 1등한 이가 있다면 연습생들은 그를 경계하거나 달라붙을 것이다. 순위권에 따른 반응을 모두 처내겠다는 것이다.

물론 재경으로서는 전혀 달갑지 않은 말이었다. 당장 재경은 정우가 최종 1등인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몰랐다. 자신이야 이번에 탈락할 게 목표지만 만약 아니면?

“더불어 공정성 여부나 투표수 조작에 대한 여부는 걱정하지 마세요. 방송을 통해 투명하게 공개할 거니까요.”

PD의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몇몇 단체를 끌고 왔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번에 새로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걸 다 알고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은 우리가 신이 아닌 고로 뒤늦게 넣었습니다. 그것의 정체는 2화 방송 후 알려드리지요.”

그들에게 주어진 휴식 기간은 열흘. 모레 1화 방송 후에 일주일 뒤 2화 방송이 된다. 그리고 순위 발표는 그 다음날이었다. 2화를 방송하고도 시간을 넉넉히 주지 않은 이유는 모르지만 어차피 99명의 연습생이 딴 시간을 보여주는 건 1화 180분이었다. 그러니 누구도 불만을 보이지 않았다.

아쉽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래도 각자 노력한만큼 서비스 시간을 가져갔다. 나머지는 그 방송에 나올 제 모습이었다.

최 PD가 말한 2화 방송 후는 합숙소에 들어오기 전날 밤을 의미했다.

“그럼 수고하셨습니다.”

연습생들에게 눈을 마주치며 인사한 최 PD가 사라지자 재경이 가방을 든 채 일어났다.

생방송이 끝나고 바로 호텔로 와서 화장은 그대로 남아있지만, 옷은 갈아입었다. 세팅한 머리를 대충 검은 모자 속에 욱여넣었다.

‘화장은 집에 가서…….’

그동안 함께한 기록을 남기는 연습생들 사이에서 재경은 무심히 걸음을 옮겼다. 여기에서 재경이 남길 건 없었다. 그저 조용히 누구의 눈에 띄지 않고 가는 게 최선이었다.

“형.”

재경은 저를 부르는 게 분명한 익숙한 목소리에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몇 날 며칠 들어왔던 소운이 뒤따라오기 전에 여기를 벗어나는 게 우선이었다.

“형. 왜 이렇게 빨리 걸어요. 제가 부르는 거 못 들었어요?”

달려왔는지 재경의 앞을 막아선 소운이 다리를 짚고 거칠게 숨을 쉬었다.

내가 돌아보지 않았다고 달려온 걸까?

재경은 별말 없이 소운을 지그시 바라보다 태연한 표정을 가장하고 거짓말을 했다.

“몰랐어.”

소운이 상관없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는 호흡이 진정되었는지 굽혔던 허리를 폈다. 그보다 더 중요한 말이라도 있는지 소운이 마지막으로 후우, 숨을 내쉬더니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연락처요. 우리 지금까지 번호도 교환 안 한 거 몰랐죠?”

재경이 소운의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아이돌일 때 광고로 협찬 받아쓰던 S사의 핸드폰 시리즈 초창기 버전이었다. 쓸데없는 생각으로 시간을 보낸 재경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랬구나.”

여기서 앞으로 만날 일이 없으니 연락처따위 교환안해도 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연락처를 교환한 후 차단하면 그만이었다. 소운의 핸드폰을 가져와 번호를 찍은 재경이 전화하라고 적당히 받아주고 인사했다.

“형도 푹 쉬어요.”

소운이 반갑게 손을 흔들고는 다른 연습생을 찾으러 갔다. 문가 근처에 선 재경이 소운과 눈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습관처럼 안을 훑었다. 누군가를 찾기 위해서인지 몰랐다. 그저 연습생들의 모습을 눈에 담은 후 미련없이 돌아섰다.

*   *   *

사즉필생 소우니님이 서재경님을 초대하였습니다.

사즉필생 소우니 [푹 쉬고 있죠? 벌써 보고 싶어서 단톡방 팠어여] 오후 10:01

사즉필생 소우니 [인사하는 곰이모티콘] 오후 10:01

하준. Yoon [잘했어.] 오후 10:02

사즉필생 소우니 [우리 내일 모레 같이 첫방 볼래여?] 오후 10:02

하준. Yoon [좋아.] 오후 10:10

이정우 [ㅇ] 오후 10:10

사즉필생 소우니 [재경이 형만 괜찮으면 장소는 제가 찾아볼게여] 오후 10:12

하준. Yoon [ㅇ팻말을 든 펭귄이모티콘] 오후 10:12

재경이 가만히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소운에게만 연락처를 줬으니 대충 그의 연락만 올거라 짐작했는데 단톡방을 팠을 줄이야. 계속 위로 올라가는 대화 속에서 재경은 톡방을 나가는 대신 그냥 화면을 껐다.

반응하지 않는 게 가장 좋았다. 돌아오지 않을 메아리에 불과한 일이 반복된다면 계속 말을 걸던 상대방도 어느 순간부터 연락을 끊을 것이다.

재경은 호텔에서 나왔을 때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저 해가 질 때까지 천천히 거리를 거닐었다. 목적지가 없는 사람처럼 걷다가 지칠 때면 버스정류장에 앉아 잠시 쉬었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재경은 무대에 섰을 때 느낀 감정을 모두 털어내고 싶었다. 절대 서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무대. 리허설을 마쳤을 땐 몸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정우의 위로 끝에 올라간 무대에서는…….

“아직 정신을 못 차린거지.”

즐거웠다. 마치 제집에 온 것처럼 편안했었다. 분명 무대가 망칠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왜 즐겁다고 생각했는지 자기도 몰랐다.

어쩌면 평생 무대에 설 것만 생각하고 연습해왔으니까 보람되게 끝내서 그렇지 않았을까?

“한심해.”

재경은 이리저리 방황하는 제 마음이 한심했다. 이렇게 줏대 없으니 멍청하게 사기나 당하지. 제가 진 빚이 아니어도 중간에 이상하다는 걸 알아채지 못하고 엄마가 저지르는 일을 방관한 꼴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거리를 돌고 나서 집에 왔을 때 재경은 긴장감을 누르려 마른 침을 삼켰다.

‘아무도 없겠지?’

자기도 없는 집에 엄마가 올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조금 했다. 재경은 천천히 열쇠를 집어넣었다. 옛날 집이라 도어락도 없이 열쇠로 잠그는 낡은 집인데 열쇠를 돌리는 그 짧은 순간이 길게 느껴졌다.

찰칵.

열쇠가 돌아가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현관문을 당겨 연 재경은 한달 만에 제 공간으로 발을 들였다. 어두운 시위에 간간이 지나가는 전조등 불빛이 비치는 내부는 생활감이 없었다.

그 사이 엄마가 한 번도 들리지 않았는지 재경이 나오기 직전의 모습 그대로뎠다. 계약을 안 한 게 엄마에게 상처가 되었는지 일부러 자신을 보러오지 않은 것이다. 그녀는 재경이 어떻게 하면 실망하고 상처받을지 알고 있었다.

몇 달에 한번 올지라도 재경이 꼭 왔으면 하는 날에 특별한 일이 없다면 와서 있어주었다. 그러면 재경은 아무렇지 않은 척 하던 일을 이어가지만 붉어진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좋은 티를 냈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할머니가 채워주던 온기를 잊지 못해서 외로운 것보단 빚을 지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이런저런 핑계로 엄마를 끊어내지 못했다. 혼자 자던 이불에서 둘이 잘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재경은 자신의 엄마가 엄마 노릇을 안해도 그 온기를 놓지 못했다.

할머니가 없는 이 세상 재경에게 남은 건 엄마뿐이었다.

“예상했잖아.”

오디션 프로그램이 아니라 사기맞을 계약을 맺길 원했고 재경은 거부했다. 그럼 그에 맞게 엄마도 재경을 거부하는 게 맞았다. 아들이 하고자 하는 걸 든든히 바쳐주는 다른 집과 다른데 하나하나 비교해봐야 실망만 하는데 재경은 오늘도 혼자 기대하고 실망했다.

재경이 가방을 한곳에 던져두고 바로 걸레를 찾았다. 한 달 동안 쌓인 먼지를 닦아내야 몸을 누일 수 있다. 엄마를 보면 무슨 말을 할지 몰라서, 그래도 엄만데 나오는 날에 맞춰 기다리고 있진 않을까 싶었던 복잡한 마음은 방을 닦듯 지워나갔다.

*   *   *

잘 준비를 마친 재경이 이불을 들춰 안으로 들어갔다. 이불을 깔았지만 바닥의 요철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겨우 냉기를 면한 상태라 누우면 제 체온을 빼앗길 것 같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딱 얼어죽지 않을 정도로만 냉기를 막아주는 집에서 더한 걸 기대할 수 없었다. 한 달을 호텔에서 살았다고 그새 몸이 더 좋은 걸 원하고 있었다.

손끝에 거칠고 낡은 질감의 이불이 푹신하고 부드러웠던 호텔 침구와 확연히 비교되었다. 여기가 내 공간이고 내가 있을 자리였다. 알고 있으면서 쉽게 마음을 정리하지 못했다.

각자의 침대에서 잤을 뿐인데 그래도 한 방에서 4명이 지내서 그런지 유독 쓸쓸하고 외로웠다. 아예 맛보지 않았다면 모를까 제게 악의적인 시선을 보내지 않는 사람들간의 교류는 재경이 겨우 눌러놓았던 체념을 휘저어놨다.

재경은 몸을 옆으로 누워 핸드폰을 들었다. 197개가 쌓인 유일한 단톡방에 들어갔다. 제가 들어가면서 숫자가 사라진 대화를 눈으로 훑던 재경은 키패드를 눌렀다.

사즉필생 소우니 [재경이 형 기다릴게요] 오전 12:03

사즉필생 소우니 [두 손을 맞잡고 눈을 빛내며 우는 복숭아 이모티콘] 오전 12:04

[갈게.] 오전 01:59

두 글자 쓰는데 몇 번이나 망설였는지. 그래도 결국 보냈다.

하루만. 그냥 하루만 같이 있고 싶었다. 재경은 내일 아침 후회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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