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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아이돌-28화 (28/125)

28화

리허설이 끝난 후 재경은 초점을 잃은 채로 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중간에 누군가 재경의 팔을 잡아준 거 같은데 그게 아니었다면 넘어졌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모든 게 상관없을 정도로 재경은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아오 떨려. 저 엄청 떨렸어요.”

소운의 목소리에 재경의 눈동자에 서서히 초점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정우가 재경을 잡았던 팔을 놔주었다. 재경은 자신을 지탱하던 것도 못 알아챈 채 소운과 눈을 마주쳤다.

소운은 재경을 보자마자 엄살을 부렸다. 이제껏 재경은 뭐든 다 속 시원히 답해주고 제 상황을 꿰뚫어 봤다. 그래서인지 엄마라도 만난 듯 소운이 칭얼거렸다.

“저 카메라 보면 긴장할 거 같아요. 어떡하죠? 차라리 카메라 보지 말까요?”

재경이 소운의 얼굴을 지그시 보았다. 떨린다는 게 정말인 듯 소운의 이마에 땀이 맺혀있었고 입술이 바짝 말라 있었다. 그게 귀여워 재경이 작게 웃고 말했다.

“떨리면 떨리는 대로 카메라를 봐. 오히려 카메라와 눈 한 번 못 마주치는 게 안 좋아. 자기와 눈이 마주친단 생각이 들어야 마음이 움직이거든.”

아이돌이 카메라를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시선을 마주하는 이유였다. 소운이 긴장해서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마주 잡으며 비장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요.”

“그렇다고 너무 뚫어져라 보진 말고. 없어 보여.”

“히잉.”

소운이 그렇게 말할 줄 몰랐다는 듯 야속하다고 떠드는 걸 대충 흘려넘겼다. 재경은 농담에도 진지하게 반응하는 소운에게 조금 더 자세하게 말했다.

“카메라가 부담스러우면 일단 웃어.”

“어색해서 입꼬리 떨릴 텐데요?”

“연습생이잖아. 누가 너한테 능글맞게 웃으랬어? 떨려도 괜찮아. 오히려 순수해 보여서 더 효과 있을지도 모르고.”

재경의 말이 먹혔는지 소운이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굳이 소운을 건드릴 필요가 없어 재경이 그에게서 한걸음 멀어졌다.

소운에게 조언을 건넸지만, 그의 사정도 좋지 않았다. 허리를 살짝 굽히고 주먹으로 얹힌 듯 불편한 명치를 꾹 눌렀다. 꽉 조이는 것 같기도 하고 가벼운 멀미가 일었다. 제 이상한 몸 상태의 원인을 알 것 같아 재경은 명치를 지그시 누르며 눈을 감았다.

‘왜 이렇게 찌질하냐.’

이깟 무대가 뭐라고 그냥 추고 내려오면 되는데 리허설 하나에도 바르르 떨렸던 자신이 한심했다.

아직 자신은 무대에 가진 압박을 벗어던지지 못했다. 매번 시험대에 선 것만 같은 부담은 몸을 굳게 하고 목소리를 막아버렸다.

재경을 통해 재기하려는 엄마, 갚고 갚아도 끝도 없이 늘어나던 빚, 그리고 자신을 위축하게 하던 책망의 시선들. 그 모든 것이 얽혀서 재경의 몸을 꽁꽁 묶어버렸다. 발목에 족쇄가 채워진 듯 한걸음 내딛기가 쉽지 않았다.

“서재경.”

“어…… 어?”

재경이 한템포 늦게 자신을 부른 이를 돌아보았다. 정우가 생수병을 내밀고 있는 모습에 재경이 얼떨떨하게 받아들였다. 무의식적으로 받아든 물의 뚜껑을 따고 마셨다.

“마침 목말랐는데 고마워.”

재경이 다시 물을 마시며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했다. 속이 복잡하다는 걸 굳이 밝히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순간 기분이 아주 조금은 나아졌다. 정우 때문이었다. 그저 물을 건네주려고 부른 것뿐인데 타이밍이 좋았다. 그가 부르지 않았다면 과호흡이 오지 않았을까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떨려?”

“내가? 내가 왜 떨려.”

재경이 빈 물통을 매만지며 기가 찬 듯 굴었다. 자신은 지금껏 수도 없이 무대에 섰다. 그런데도 리허설에서 동요했다고 혼자 한심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이게 뭐가 떨린다고…….

“너도 연습생이야.”

“…뭐?”

재경이 정우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나도 연습생이라고? 나 VOB로 데뷔한…….

“너 19살이고 아직 데뷔 안 한 햇병아리라고.”

정우가 재경의 손에서 물통을 가져가는 동시에 그의 빈손을 잡았다. 약한 떨림이 느껴지던 손을 힘주어 꼭 잡았다.

“네가 노래를 잘 부르고 춤을 잘 춘다고 해서 이미 아이돌은 아니잖아. 그러니까 너 역시도 떨릴 게 당연해.”

재경은 제 손을 감싼 커다란 손을 보았다. 자기보다 큰 손이 단단하게 잡아왔다. 그리고 그 손 역시 떨리고 있었다.

“나는 네가 옆에 있으니까 열심히 할 자신 있어. 너도 내가 있다는 거 잊지 마.”

“네가 뭐라고…….”

“이게 우리의 첫 무대야.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같이 올라갈 거니까 서로에게 맞춰가자. 나는 너한테 너는 나한테.”

정우의 말을 들으며 재경의 시선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알고 하는 말도 아닌데 얘는 왜…….’

정우는 자신을 몰랐다. 그런데 그의 말이 제 마음을 다 들여다본 것처럼 들어왔다.

재경은 번쩍 정신이 들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25살이 아니라 19살의 서재경은 오늘 처음 무대를 올라간다. 어색해도 괜찮고 실수해도 괜찮다. 모두가 자신에게 완벽한 모습을 바라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이제 시작이었다. 지금부터 자신만의 무대를 만들어가면 되었다.

“그러네…….”

재경이 아까와 다르게 탁 풀린 미소를 지었다. 그것을 본 정우가 따라 웃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무대에 올라가고서도 흔들렸을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달래준 게 정우라니 참 상황이 아이러니했다.

한편 재경과 정우 사이에 흐르는 청춘 드라마와 같은 대화를 들은 이들이 있었다. 바로 A조였다. 하준이 제 팔을 감싸 안으며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소운과 한찬형은 토하는 시늉을 했다.

“쟤가 말이 많은 애가 아닌데 한 번 길게 하니까…… 좀 느끼하네?”

한찬형이 처음 알았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 하준은 소운을 보며 제 눈을 가리켰다.

“소운아, 내 눈에 있는 쌍꺼풀 정우 줄까? 가뜩이나 멘트 느끼한 애니까 내 버터력을 넘겨줘야 할 거 같아.”

“그래도 정우 형은 잘 어울릴 거 같아요.”

“…그래.”

이상하게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어 하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우가 재경에게 물었다.

“생방송 끝나면 바로 갈 거야?”

“그래야지.”

이 방송을 끝으로 한 달간의 숙소 생활이 끝나는 것이다. 아침에 짐을 싸놨기에 재경은 옷만 갈아입으면 바로 갈 생각이었다.

“어디 살아?”

“서울.”

“그럼 주말에 뭐해?”

“집에 있겠지.”

정우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재경에게 말했다.

“그럼 나올래?”

“오랜만에 집에 가는 건데 뭐하러 나와. 집에 있을래.”

정우는 재경을 보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 조연출이 나타나 무대에 올라가라고 전해왔다. 재경이 정우의 어깨를 탁 쳤다.

“가자.”

리허설 때와 다르게 무대를 환하게 비추는 조명의 강한 빛 사이로 걸어가는 재경이 자리를 찾아갔다. 노래가 시작되는 전주에 맞춰 재경의 얼굴에 서렸던 꽁꽁 감춰 뒀었던 감정이 슬쩍 존재를 내비쳤다.

매일 너와 만날 시간을 기다렸어.

거울로 둘러싼 감옥에서 날 구해줘.

날 구해줄 수 있는 건 너뿐이야.

내 손을 잡아줘.

내게 네 마음을 줄래

나만이 너의 boy야.

내 이름을 불러줘.

네게 보이는 바로 나야

*   *   *

“3번 카메라 줌.”

“풀샷.”

음악 프로그램의 안 PD가 매서운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99명의 남자를 한 카메라 안에 담는 건 짧은 순간이면 족하다는 듯 바로 카메라 줌 지시로 넘어갔다.

99명의 남자가 커다란 무대를 꽉 채웠다. 별다른 장식이 없어도 그들의 유기적인 움직임과 존재로 꽉 채우고 있었다. 이번에 새로 프로그램을 들어간다는 동기의 부탁에 마련된 무대가 제법 눈길을 끌었다.

다양하게 찍히는 화면 속에서 안 PD의 시선이 매섭게 빛났다. 연습을 많이 했어도 날카로운 안 PD의 예리한 눈길을 피해가지 못했다.

“1번 넘겨.”

바로 생방송에 송출되는 무대의 센터를 비추던 화면을 뺐다. 그는 미션을 통해 자리를 정했다는 말은 흘려들었다. 어차피 짧은 시간 99명을 모두 담을 수 없다.

- 위치야 네가 잡았지만, 생방송에 담는 건 내 마음이야.

공평하게 기회를 주겠다는 동기의 포부를 비웃으며 안 PD는 철저하게 실력으로 가려내겠다고 단언했다. 별로라고 생각하면 바로 화면을 바꾼다.

동정심 따위 없었다. 아니면 밀어버리는 냉철한 판단력이야말로 안 PD의 신념이었다. 막 시선을 돌린 안 PD의 눈에 하나의 화면이 걸려들었다.

안 PD만이 아니라 화면을 보고 있는 다른 제작진도 하나둘 그 화면에 시선을 돌렸다.

“4번 카메라 날개 쪽 잡아봐.”

“5번 카메라 반대쪽으로 돌려.”

떼창과 군무 속에서 유난히 튀는 무리가 있었다.

누구보다 춤이 하나로 보이게 잘 맞춰 들어가서 제법 보기 그럴싸했다.

“줌.”

“와. 여기만 아이돌이네.”

누군가의 중얼거림이 곧 모두의 생각이었다. 또다른 사람이 말했다.

“완전 칼군무인데요?”

손끝 하나까지도 계산된 듯 절도있게 맞아떨어지며 심지어 부드러운 춤에서도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물결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얼마나 열성적으로 노래를 부르는지 몰랐다.

“분명 다 같이 열심히 하는데…… 이상하네.”

오디션 프로그램이라는 것도 알고 그 첫 무대니만큼 전부 눈에 띄려고 열심히 하고 있었다. 이 음악방송은 사전녹화도 없었다.

리허설 한 번에 바로 생방송까지 직진.

99명이 설 무대를 만드느라 리허설과 생방송까지 짧은 시간에 찍어야 하는 상황인데도 안 PD는 그들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어떤 상황이든 흔들리지 않고 제게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어야 이 바닥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

안 PD의 눈동자가 매섭게 돌아다니며 곳곳에 숨은 보석을 찾아냈다. 차례대로 잡히는 화면을 주시하다 리허설 때와 다른 카메라의 번호를 불렀다.

“4번 더 뒤로 잡아봐.”

안 PD는 잘 보이지 않는 자리에 숨은 금을 발굴하듯 카메라를 더욱 깊숙이 집어넣었다.

“저 두 연습생에게 맞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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