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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아이돌-27화 (27/125)

27화

결과적으로 제 구멍 제가 팠다. 소운만 봐주다가 8명의 연습생 모두를 봐주게 되었고 재경의 성격상 디테일하게 잡아가니 매일 밤늦게까지 연습실에서 나가지 못했다.

노래는 노래대로 한 음절 한 음절 가르쳐주고 춤은 춤대로 조금이라도 부족한 연습생에게 일대일 마크를 하니 그 맛있던 밥도 무슨 맛인지 느끼지 못할 정도로 바쁘게 살았다.

덕분에 남은 열흘의 기간은 눈 깜짝할 새에 지났고 내일은 리허설과 생방송 후 각자 집으로 돌아가면 된다.

재경이 털썩 침대에 몸을 던졌다. 베개에 얼굴을 비비며 재경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피곤해.”

처음에 합숙할 때만 해도 카메라를 피하니뭐니 했는데 나중엔 다 소용없었다. 당장 카메라를 의식하기엔 신경쓸 게 많았다. 그나마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PR 말고는 없다는 게 유일한 위로였지만.

“내가 내 발등을 찍었지. 왜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있냐고.”

자기가 뭐라고. 지금껏 이렇게 누구를 도와준 적이 없었는데.

재경이 두 주먹으로 침대를 때리고 발을 동동거렸다. 멍청해. 멍청해. 서재경 멍청해.

먼지가 풀풀 일어날 몸부림이 끝나고 재경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더는 누구한테도 관심을 주지 말아야지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룸으로 들어온 한찬형이 재경의 앞에 섰다.

재경이 무슨 일이냐는 듯 바라보자 한찬형이 크흠, 헛기침과 함께 쥐고 있던 걸 내밀었다.

“이거 먹어.”

한찬형이 건네는 걸 얼떨결에 받아든 재경이 제 손에 놓인 걸 보았다. 우유였다.

“이걸 왜 줘?”

“고마웠다고.”

“뭐가?”

“춤 봐주고 노래 봐준 거 고마웠다고.”

“너만 봐준 거 아닌데?”

“아니…… 그냥 받아라.”

한찬형이 뭔가 더 말하려다 말고 가버렸다. 대충 손을 휘저으면서도 우유를 가져가진 않았다. 정말 고맙다는 의미로 주는건가 보다.

재경이 우유를 보았다. 분홍빛의 딸기우유였다. 어쩐지 아까 연습이 같이 끝났는데 안 들어오더라. 같은 연습생에게 뭔가 받은 건 처음이었다.

재경의 입가에 저도 모를 미소가 떠올랐다.

*   *   *

메이크업을 받고 있는 재경의 귀에 온갖 소란스러운 소음이 빨려 들어왔다. 긴장을 못 이겨 한숨을 쉬는 소리부터 목을 풀기도 하고 춤 연습을 하느라 옷자락이 날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제 잠을 못 자서…….”

“나 화장이 다 뜨는 거 같아.”

“목이 갈라지면 어떡하지?”

모두 각자의 걱정을 끌어안고 한껏 긴장감을 감추지 못한 소음 사이로 재경은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재경으로는 그들의 감정에 공유할 수 없었다. 무대는 이미 수없이 올라가봤다.

대신 재경은 다른 이유로 싱숭생숭했다. 19살로 돌아온 후 재경은 다신 무대에 서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제 발로 오디션장을 찾아오고 무대에 오르겠단 뜻을 내비쳤다. 이게 뭔가 싶어 자조 어린 마음이 들다가도 엄마에게 끌려가지 않아 안도했다. 전부 모순이었다. 하나도 맞지 않았다. 이런 기분을 평소에도 느꼈지만 오늘은 유독 강하게 올라왔다.

재경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다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그와 동시에 나타난 그의 까만 동공에 막 붓을 가져다 대던 여자가 흠칫 놀랐다.

동공이 크고 흰자가 깨끗하다. 맑지만 초점 없이 흐린 시선이 아스라한 느낌이었다.

재경의 눈을 홀린 듯 바라보던 그녀가 다시 붓을 갖다 대려다 손끝이 떨려와 포기하고 내려놨다. 그저 메이크업 베이스를 바르는 것뿐인데 왜 이렇게 손이 떨리는지. 흑백이 또렷한 눈동자가 다시금 감기는 눈꺼풀에 사라지려는 게 아쉬워 그녀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 감을까요?”

“아, 괜, 찮아요.”

재경의 상냥한 물음에 메이크업 아티스트, 민소이가 다소 맹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여자가 제대로 말도 못 하고 머뭇거리다 겨우 퍼프를 들고 있으니 옆에서 다른 정우를 화장해주던 친구가 고개를 저었다.

“저 얼빠가 또 넘어갔네 넘어갔어.”

재경의 피부에 감탄하던 민소이가 친구를 향해 눈을 흘겼다.

“잘생겼는데 어떡해.”

그녀는 마른 침을 삼키며 아까까지 꾹 눌렀던 감정을 조금씩 내보였다.

“피부가 정말 좋네요. 모공이 하나도 없어요.”

퍼프에 남자용 피부에 맞는 파운데이션을 묻혀 피부에 살짝 묻혔더니 흰 피부에 살색의 얼룩이 묻은 듯 어울리지 않았다. 하얀색 고체 파운데이션을 섞어 색을 조절해서 다시 볼에 살짝 묻혔다. 아니, 남자애 화장하는 거라며. 그런데 왜 난 색을 밝게 빼고 있는거지?

온갖 혼란스러운 기분에도 손은 부지런히 파운데이션을 섞었다. 다시 피부에 대봤더니 그제야 잘 어울리는 걸 보고 퍼프를 들었다가 파운데이션 전용 붓으로 바꿨다. 퍼프로 톡톡 두드리기보다 붓으로 세심하게 쓸어야 할 것만 같았다.

‘피부가 도자기 같아.’

소이는 제 앞에 앉아있는 연습생의 이름을 잊지 않으려 몇 번이나 되뇌었다. 정말 보면 볼수록 눈이 가는 예쁜 남자였다. 그런데 진짜 보면 볼수록 감탄이 나오는데 계속 속으로만 삼켜야 할까?

결국, 소이는 참지 못하고 재경을 향한 감탄을 내뱉었다.

“어쩜 이렇게 속눈썹도 길고 눈매가 다이아몬드형이에요? 진짜 이런 눈이 있네요. 코에 보형물 넣은 거 아니죠? 입술에 필러 맞았어요? 이런 말 실례인거 아는데 너무 예뻐서 그랬어요. 아니, 이 이렇게 이쁘죠? 남자 얼굴이 이렇게 이쁠 일이야? 이래도 돼? 대체 신은 왜 여기에만 금가루를 뿌렸지? 혹시 생일이 언제예요? 나랑 같은 날 아녜요? 그래서 신이 여기에만 신경 쓰느라 날 잊은 거 아니냐고.”

점점 커지는 목소리에 다른 메이크업 아티스트, 김보연의 웃음이 터졌다.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주변에 카메라 몇 대가 빨간 불이 들어온 채 돌아다니고 있는데 혼자 난리가 났다. 재경이 놀라서 눈만 동그랗게 뜬 채로 깜박거리고 있으니 소이가 앓는 소리를 흘렸다.

귀여워. 귀여워 미치겠어.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워.

“저 오늘부터 팬 할게요. 문자투표도 할거에요.”

“…괜찮아요.”

재경은 멋쩍은 듯 손을 저으며 소이를 말렸다. 문자투표라니, 자신은 떨어져야 하는데 절대 안 된다. 그러니 이미 재경에게 감긴 소이는 다른 말이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눈 다시 감아주세요. 그리고 저 진짜 팬 할거에요. 하루 한 번 영양제 먹듯이 문자 투표할 거니까 말리지 마세요. 잔뜩 귀여워해 줄 거고 제 통장 털어줄래요. 그냥 데뷔까지 따라다닐 테니까 전 신경 쓰지 마세요.”

“아니…… 정말 그러지 마세요.”

재경이 부담스러워 작게 울상을 지었다. 차라리 빨리 벗어나는 게 낳을까 싶어 눈을 감았다. 메이크업할 때 가만히만 있어 줘도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는 진리를 알고 있었다. 다행히 이후로 재경에게 말을 걸지 않아 편하게 눈을 감고 있을 수 있었다.

“아쉽지만…… 다 됐어요.”

붓질 한 번 더 하고 보내주면 안 되냐는 물음을 못 들은 척 재경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억지로 잡아둔 것도 아닌데 벗어난 기분에 재경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아직 자신에게 눈을 못 떼는 메이크업 아티스트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냥 지나가려던 재경이 무심코 돌아보다 거울에 비친 이정우를 발견했다. 눈을 감은 정우의 눈에 어두운 색의 아이섀도우가 올라갔다. 그 손놀림에 따라 정우의 눈이 달라지는 게 신기해서 재경이 저도 모르게 서서 지켜보았다.

“퇴폐적인 눈 떠보세요.”

아티스트의 사무적인 음성이 들린 것도 잠시 정우의 눈이 떠졌다. 거울을 통해 정우와 눈이 마주친 재경은 살짝 놀랐다가 뭔가 떠오른 듯 시선을 돌렸다.

‘뭐야.’

거울에 비친 정우와 자신의 얼굴을 번갈아 본 재경의 표정이 점점 이상해져갔다. 음영을 넣어 그윽한 눈매가 돋보이는 정우는 차분한 분위기의 느낌을 물씬 풍겼다. 그에 비해 자신은 자연스러운 메이크업이 주가 되어 평소보다 더 흰 피부가 눈에 띄었다.

그냥 정우는 남자같고 자신은 애처럼 화장해줬다. 그게 너무 비교가 돼서 재경이 불만을 드러냈다. 재경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지자 비슷한 생각을 하던 중이었는지 정우가 옅게 웃고는 옆으로 다가왔다.

이젠 말하지 않아도 제일 절친한 친구라도 되는 양 구는 게 웃기지만 재경은 그에게 어떤 핀잔도 던지지 않았다.

아니, 그럴 여유가 없었다.

“리허설 올라가겠습니다.”

한 스태프의 외침에 재경은 연습생들의 물결에 휘말려 무대로 올라갔다. 기실 바닥이 보이지 않고 떠밀리듯 움직인 거라 언제 올라왔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이 춤을 춰야 할 자리에 섰을 뿐이었다.

마이크에 제 숨소리가 흘러가는 걸 들으며 재경이 무대 아래를 보았다.

레슨 때마다 보던 트레이너들과 심사위원까지 나왔다. 그들은 무대 위에 올라간 99명의 연습생을 돌아보며 저마다 감정을 드러냈다. 그들을 중심으로 카메라가 돌고 있으니 표정 관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보컬 트레이너와 눈이 마주쳤을 때 재경은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녀는 재경에게 잘 할 수 있다는 듯 웃어줬다. 그저 연습생들에게 하는 응원인데 그게 뭐라고 재경은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심사위원 중 한사람이 마이크를 들었다.

“지금은 리허설이라 조용하지만 본무대 역시 비슷하겠죠.”

팬덤이 없는 연습생이고 사전 광고도 나가지 않았다. 제작진은 오늘 이 생방송으로 연습생의 존재를 드러낼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다른 팬덤들에 비해 99명의 연습생이 서는 무대를 지켜보고 응원해줄 팬이 없었다.

“오늘 우리가 대표로 팬 해줄거니까 잘해.”

“네!”

연습생들이 모두 한 마음이 된 듯 외쳤다. 그리고는 곧바로 무대가 시작되었다. 모두가 일사분란하게 춤을 추었고 재경 역시 그들 안에서 제 무대를 채워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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