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이제 진짜 생방송을 앞둔 연습에 한창이었다. 몸에 익을 정도로 춤을 추고 목이 상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계속 연습을 이어갔다. 다들 생방송을 앞에 두고 흥분을 다스리려 노력한다면 그렇지 않은 연습생도 있었다.
‘큰일이네.’
재경이 후드의 모자를 쓰며 아닌 척 주변을 둘러보았다. 미션에서 꼴찌를 하는 바람에 생방송에 올라갈 자리가 안 좋았다. 그건 재경에게만 좋을 뿐 다른 이에겐 그렇지 못했다. 때문에 재경을 뺀 조원 모두가 표정이 좋지 못했다.
물론 속을 알 수 없는 정우는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하준까지도 기운이 빠진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들에게 이번 생방송 무대는 국민에게 보여주는 첫인상과 다름없었다.
재경은 카메라가 어디를 비출지 모른다고 위로해줄까 하다가 말았다. 그건 미래를 알고 있는 재경도 알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리고 보통 중앙을 비치는 게 기본이었다. 하물며 그 프로그램을 보기라도 했다면 모를까 재경은 결과만 알고 있었다.
…실은 JT 말고 다른 최종합격자도 잘 모르고.
‘나 진짜 하나도 모르네.’
여기 들어올 줄 알았으면 열심히 봐뒀을텐데.
“형 저 한 번만 봐주실래요?”
소운의 물음에 재경이 그를 보았다. 기운은 없지만 한번이라도 더 연습하려는 소운이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에 재경이 의외인 듯한 심정으로 소운을 보았다. 가장 먼저 마음을 다잡은 게 17살의 막내라니 대견하게 보였다.
소운과 재경의 대화를 들은 시선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모두가 소운의 독무를 봤다. 동작 하나하나 허투루 넘기지 않으려고 애쓰는 그 모습에 연습생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여기서 포기할 순 없다는 생각에 몇몇은 앉아서 소운과 춤을 맞춰봤다. 노래가 끝나자 소운이 거친 숨을 가라앉히지도 않고 재경에게 말했다.
“어때요?”
“음….”
재경이 제 볼을 살살 긁었다. 뭐라고 대답할지 고민스러웠다. 처음보다 나아졌지만, 눈에 띄게 예쁜 춤사위는 아니었다.
그냥 적당?
원래라면 괜찮다고 해야 하지만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든 잘해보려고 하는 아이의 노력을 가볍게 여길 수 없었다. 재경이 심각한 눈으로 소운의 춤을 떠올렸다. 다른 연습생도 덩달아 긴장해서 재경의 입을 바라보았다.
“소운아.”
“네.”
“너 꼭 여기서 데뷔해야 하지?”
“…하고 싶어요.”
소운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1차도 통과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미션은 얼마나 땄는데?”
“2개요.”
기본으로 주어지는 1분까지 합치면 총 3분이다. 재경은 미션에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아서 1분도 따지 못했지만, 소운이라고 많은 것도 아니었다.
“하아.”
재경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숙이느라 소운의 표정은 못 봤지만 안절부절못하는 몸짓이 시야에 턱턱 걸렸다.
“우리 얼마나 남았지?”
“열흘 정도요.”
재경은 다시 소운을 보았다. 그리고 소운과 비슷한 표정의 연습생을 보았다.
‘내가 나서도 될까?’
딱히 거창한 방법이 떠오르는 것도 아닌데 괜히 책임감을 느끼는 이유가 뭔지. 그렇다고 자신이 나서기엔 망설여졌다. 아이돌로 활동한 경험이 있다고 해봐야 제가 생각한 방법이 답인 것도 아니었다.
고민에 빠진 채 무심코 고개를 들었던 재경이 어? 하는 시선으로 반쯤 열렸던 문을 보았다. 지나가던 전상국이 잠시 멈추더니 재경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비릿하게 웃었다. 대놓고 비웃고 건들거리는 자세로 사라지는 게 카메라엔 안 잡혔지만, 재경은 똑똑히 보았다.
재경은 방금 전상국이 지나간 자리를 보며 소운에게 물었다.
“…B조는 위치가 어디야?”
“센터요.”
“하.”
전상국이 센터에서 춤을 출 걸 생각하니 재경이 헛웃음을 지었다. 괜히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흥분을 삭히던 재경이 무섭도록 빠르게 표정을 지웠다.
열받아. 열받는다. 전상국이 말한대로 납작 엎드려졌다고 생각하니 화가 끓었다. 재경이 싸늘하게 가라앉은 채로 입을 열었다.
“내가 생각한 건 별거 없어요. 솔직히 먹히리란 법도 없고.”
“어?”
하준이 놀란 듯 되물었다. 다른 연습생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재경이 먼저 적극적으로 나올 줄 몰랐다.
“그런데도 내 말대로 할래요?”
“어? 어어, 상관없어. 네가 신도 아니고.”
“맞아요. 재경이 형이 미래에서 오지 않은 이상 기대도 안 해요.”
소운의 농담에 재경이 뜨끔했다.
‘미안.’
미래에서 왔긴 한데 아는 게 없어. 정우가 뭐든 좋다는 듯 굴었고 소운 역시 꽉 주먹을 쥐었다.
“저 지금 열흘간 자지 말라고 해도 안 잘 수 있어요.”
“…그럼 죽어. 소운아.”
“그만큼 열심히 할거에요.”
재경은 졌다는 듯 웃었다. 전상국 때문에 부글 끓었던 속이 소운의 해맑은 다짐에 가라앉았다. 재경의 시선이 다른 연습생에게 돌아갔다.
“우선 노래는 단체곡이니만큼 티가 안나긴 할거에요. 그래서 상대적으로 춤에 많은 연습시간을 할애하고 있고…….”
그거야 여기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노래가 안 먹히진 않아요. 우리의 소리는 먹힐지라도 힘있게 부르는 만큼 얼굴에 표가 날테니까 노래 연습하는 시간 줄이지 마세요.”
재경은 무리하지 않는 한도 내에 레슨 트레이너를 찾아가서라도 열심히 배우라고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하나 더. 전부 춤 연습에 매달리는데 잠자는 시간을 쪼갠다고 우리만 앞서가는 건 아니에요. 차라리 다른 걸 이용해야 해요.”
재경이 조원의 얼굴을 하나하나 보았다. 8명의 연습생이 모두 제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칼군무요.”
정우가 바로 알아들었다. 그렇지만 못 알아들은 사람이 있어 재경이 조곤조곤 설명했다.
“전부 하나인 것처럼 추는 거에 초점을 맞추죠. 물론 개별로 잘 추는 사람에겐 손해일 수 있어요. 자신을 죽이고 다른 이와 맞추는 거니까요. 그래도 전체 단체곡으로 만들어진 곡이니만큼 개인이 뛰어나게 보일 동작은 없어요. 차라리 누구보다 군무에 녹아 들어가는 게 좋아요.”
여기서 개별로 가장 잘 추는 건 재경이었다. 그런데 그가 먼저 손해볼 것도 아랑곳않고 말하니 모두가 감동해서 바라보았다. 재경은 갑자기 자신을 짠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모른 채 말을 이어갔다.
“이미 다 같은 안무를 연습하고 있으니 군무와 다름없지만요. 아까도 말했듯이 이게 정답은 아니에요. 다만 여기서 더 나아지는 방법인데 할 수 있겠어요?.”
가만히 듣던 하준이 말했다.
“그거면 충분해.”
나머지는 하준의 몫이었다. 하준은 가장 먼저 같은 조지만 그 안에서 개별적인 활동을 하던 조원들의 시간을 맞췄다. 이제 같이 노래와 춤을 연습할 수 있도록 시간을 배분한 뒤 하준이 재경을 불렀다.
“재경아.”
“네.”
“미안하지만 여기서 노래랑 춤을 네가 제일 잘해서 그런데 도와줄 수 있어? 특히 칼군무가 되려면 네가 전체적으로 봐줘야 할 거 같아.”
하준은 지금껏 나서지 않고 제 몫만 하던 재경을 중심으로 이끌었다. 재경이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하준을 보았다. 흔쾌히 제 말을 받아주고 그에 맞춰 추진력도 좋다.
“알겠어요.”
재경이 연습실의 가운데로 걸어갔다. 전상국이 그렇게 비웃고 간 이유가 있었다. 자신이 구석에서 춤출 걸 알고 좋아했겠지.
‘아직 아니야.’
재경은 괜한 승부욕에 불타올랐다. 센터보다 더 잘 추면 된다. 다른 연습생이 그의 뒤로 일렬로 나열하자 재경은 거울에 비친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제 모습이 적나라하게 찍힐 위치에 들어왔다. 그걸 알지만 지금은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할 때가 아니었다.
‘1분.’
제게 있어 믿을만한 건 방송에 나갈 1분 외에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확한 박자에 떨어지도록 할게요.”
재경이 자세를 취하자 하준이 알아서 노래를 틀었다. 연습생 모두가 거울을 보며 비장하게 팔을 들었다.
“아,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저 누구 가르치는 거 해 본 적 없어요. 그러니까 어색해도 이해해 주세요.”
소운이에게 간단한 조언을 하던 것과 상황이 다르니까 자신도 버벅댈 것이다.
하준이 걱정말라며 재경에게 그런 거 신경쓰지 말라고 했다.
* * *
“저 좀 잘하지 않았어요?”
“응. 어디가? 어떤 부분이? 방금 흐느적거린 거 말고 또 춘 거 있어?”
“…아니에요.”
소운이 시무룩하게 손을 내렸다. 처음에 봐줄 땐 상냥했는데 가차 없는 평가에 눈썹이 아래로 휘어졌다. 그러나 재경은 다음 사람을 봐주기 바빠 소운을 버리고 갔다.
“찬형이 너는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그냥 춘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하나 힘을 줘야 해.”
“힘주고 있는데?”
“응.”
응이라지만 전혀 아닌 말투였다.
“…어떻게 힘주라고?”
“얼굴 빼고 다.”
한찬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얼굴 빼고 다 힘을 주라는데 왜 이렇게 눈코입에만 힘이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재경이 곧장 다른 사람에게 갔다.
“여기 아주 조금만 디테일이 들어가면 될 거 같아요.”
“이렇게요?”
“음. 손목 조금 더 꺾고 발끝 자꾸 벌리지 말고 무릎 굽히지 말고 입 벌리지 마세요.”
“…….”
“조금만 바꾸면 되니까 한 번만 보고 다음 안무 넘어가면 되겠네요.”
어디선가 KO패 당하는 종소리가 들렸다.
“나는 봐줄 거 없어?”
“형은 잘하시잖아요.”
“그, 그래도 관심 좀.”
하준이 이미 가버린 재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사정은 정우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재경은 정우의 춤을 보지도 않고 그의 옆에 자리했다.
“나는 할 말 없어?”
“너는 적당히 해.”
“잘 춰서?”
“잘생겨서.”
“…….”
“어지간히 눈에 띄어야지. 칼군무라는데 혼자 얼굴로 튀면 어떡해. 너는 왜 그렇게 생겨서…….”
“내 탓이야?”
둘의 대화를 들은 하준이 춤을 추다 말고 배를 잡고 옆으로 쓰러졌다.
“하준이 형 안 출거면 노래 좀 꺼주실래요?”
하준이 노는 꼴을 못 보겠는지 재경이 바로 그를 물고 늘어졌다.
“어, 어어.”
웃느라 쓰러졌던 하준이 제게 주어진 역할에 입술을 삐죽이며 일어났다. 한순간 방심하면서 구간마다 노래를 재생해야 하는 주크박스가 되어버렸다.
“다들 손끝까지 맞춰야 하고 팔 올리는 타이밍 재요.”
팔의 각도까지 틀어지면 안되니까 춤추다 흥분하지 마시고 괜히 조미료 곁들이지 마세요.
재경은 차분한 목소리로 모두를 싸잡아 잔소리를 늘여놨다.
“잘해보겠다고 누구 하나 튀는 순간 끝이에요. 하준이 형, 1분 33초부터 틀어주세요.”
하준이 부랴부랴 노래의 중간으로 향하면서 연습생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따랐다. 도움이 돼서 좋은데 이상하게 하준이 원망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