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아이돌-24화 (24/125)

24화

“노래에 맞춰 춤을 추십시오. 포인트 안무가 꼭 들어가야 합니다.”

PD의 말을 듣는 재경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가만히 있어야지.’

자율적으로 움직인다면 당연히 재경은 꼼짝없이 있을 것이다. 그런 재경의 반응을 정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 더불어 하준과 소운도. 자신들끼리 눈을 마주치며 소리 없는 대화가 오갔다. 지금껏 재경이 어떻게 나오는지 눈치챈 세 사람의 눈동자에 의미심장한 대화가 오가는 동안 pd의 설명이 이어졌다.

“아…….”

“각 팀당 나올 수 있는 인원은 한 명입니다. 99명이 모두 알고 있는 춤이라 해도 나오는 건 9명이라는 소리겠지요? 한 명씩만 들어갈 수 있는 이 원안에 선 사람이 춤을 출 수 있습니다. 더불어 이 미션은 그 조에 속한 9명이 전부 통과해야 자리 우선권이 주어집니다.”

재경이 어깨를 축 늘어진 걸 본 세 사람이 웃음을 삼켰다. 남들이 어떤 생각인지 모른 채 재경이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단체전이면서 개인전이라고 한 거였구나. 재경이 끝까지 나서지 않는다면 조는 성공하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아니 뭐 이렇게 다양해.’

무슨 벽에 공을 붙여놓질 않나. 오늘은 릴레이다. 이러다 숨바꼭질하는 건 아닌지 몰라.

‘무슨 춤을 춰야 적당히 넘어갈 수 있을까.’

그런 노래라면 조원도 나오지 않을 거 같은데 문제는 그럴 노래가 나올까 싶었다. 재경이 포기의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었다가 자신을 보고 있던 정우와 눈이 마주쳤다.

“왜 그렇게 봐?”

“걱정돼?”

“…응.”

심란한 속을 꽁꽁 감출까 고민하는 것도 잠깐이었다. 이 정도는 정우에게 말해도 될 것 같아 재경이 바로 제 기분을 얼굴에 드러냈다.

“큭.”

잔뜩 울상을 짓는 모습에 정우가 놀랐다가 급히 제 입을 막았다. 웃음을 참은 게 분명한 듯 그의 눈이 휘어지자 재경은 웃지 말라는 듯 그의 어깨를 주먹으로 쿵 내렸다.

막상 얄미워서 한 행동인데 뒤늦게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가 싶었다. 내가 이정우를 때렸어? 재경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움직인 자신의 주먹을 신기한 듯 보았다. 그러다가 멍하니 정우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난 진짜 심각해.”

“춤 잘 추잖아.”

“그래도. 남들 앞에서 추는 거…… 안 좋아해.”

춤이 좋냐 싫냐가 아니라 남들 앞이라는 게 중요한가 보다.

“카메라 앞이라서?”

“그것도 그렇고…….”

재경은 어느새 제 옆에 와서 도란도란 대화라도 나누려는지 자리 잡는 정우를 향해 슬쩍 몸을 틀었다.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자 볼이 밀려 올라갔다. 그 상태로 막 입을 열려던 재경은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도로 다물었다.

재경은 그냥 나서기 싫은 거라고 말하려다 붙어있는 다른 사람이 있어 말을 아꼈다. 춤을 아무리 열심히 춰봐야 칭찬받은 적 없어서 그렇다고 말하기 부끄러웠다.

오래 췄으니 그 정도 추는 건 당연하다는 말을 들었을 뿐 자기만의 색도 없고 어정쩡하다는 말을 많이 들으니 점점 동작이 작아졌고 결국 그것밖에 못 추냐고까지 들었다. 이대로 대화가 끊기나 싶어 재경이 전방을 향해 몸을 돌리려고 할 때 정우가 그의 팔을 잡았다.

“춤추기 싫은 건 아니지?”

재경의 얼굴에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 고개를 들며 턱을 괴던 손이 허공에 붕 떠버렸다.

“왜 그래?”

“아니…….”

재경이 뒤늦게 목을 가다듬는 척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 춤추기 싫은 거 아니지?

첫 무대를 거하게 망치로 내려왔을 때 정우가 재경에게 건넨 말이었다. 분명 지금의 정우는 그때와 다른 상황인데도 같은 말을 해왔다. 그때 자기는 뭐라고 했더라?

- 그건 아니야.

“그건 아니야.”

“그럼 됐네.”

재경이 고개를 돌려 정우와 눈이 마주쳤다. 제게 보여주는 신뢰의 눈빛에 재경은 눈을 피하지 못했다.

- 그럼 됐어.

그때도 정우는 같은 말을 하고 갔었다. 그런데 그때는 왜 정우가 빈정거린다고 생각했을까.

“주사 맞는다고 생각해. 아니면 맛없는 반찬을 먹어야 하는 애가 됐거나.”

“그게 뭐야.”

투덜대듯 건넨 대답이지만 정우의 말이 깊게 와닿았다. 아싸리 빨리 끝내고 빠지는 게 제일 좋겠다.

“노래 나오자마자 달려나가. 내가 밀어줄게.”

“모르는 노래면 어쩌라고.”

“내가 민 거로 하고 돌아오면 되지.”

그런 게 먹히겠냐 싶지만 누군가가 제게 맞춰서 계획을 짜주는 게 꽤 괜찮아 보였다. 재경은 못 이기는 척 ‘너보단 많이 알걸?’이라며 센 척했다.

‘그래, 연습생으로 떠돌아다닌 시간이 얼만데.’

정우가 그 다음은 자신이 나가겠다면서 통과되면 앉아서 푹 쉬자고 말해왔다.

“자, 시작합니다.”

최 PD가 집게손가락으로 허공을 빙 돌리자 준비해둔 노래가 스피커를 향해 터지듯 흘러나왔다. 노래의 첫 음과 함께 나오는 걸 듣자마자 재경이 벌떡 일어났다.

‘이거.’

재경이 연습생으로 처음 연습했던 노래였다. 정우가 등을 밀어주기까지 하니 날아가듯 달려갔다. 빠르게 달려가 반경 1m로 그려진 흰 원 안에 들어가 잠시 리듬을 느꼈다. 오래되어 가물가물하지만 몇 가지 동작이 떠올랐다.

몸의 유연성이 돋보이고 웨이브가 많이 들어간 걸그룹의 노래긴 하지만 기본기를 다지기 좋다는 의미로 재경이 처음 배운 곡이었다. 처음이란 특별함 때문인지 머리로 떠올린 것보다 몸이 더 많이 기억하고 있었다.

재경이 곧바로 발하나를 내밀며 부드러운 골반 웨이브를 그렸다. 걸그룹이라 살랑거리는 느낌이 들도록 하는 동작인데 힘을 빼고 적당히 둥글리니 제법 비슷하게 나왔다.

‘동작을 축소하되 포인트만 뽑으면 되니까…….’

그땐 한창 웨이브를 크게 그리는 춤이 유행이었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보면 촌스러울 춤이지만 재경이 추는 건 그렇지 않았다. 팔을 흔들어 허리를 쓸어내려 주고 엉덩이에서는 웨이브가 끝나는 지점이니 아주 살짝만.

“쟤 어쩌면 좋으냐.”

하준이 안타깝다는 어조로 말했다. 그는 재경의 춤이 틀렸다거나 못 췄다는 의미로 안타까워한 게 아니었다.

“그러게요. 재경이 형…… 어쩌지?”

소운마저 재경을 보고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그리고 재경을 밀어 보낸 정우는 심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겨우 한걸음 가까워졌는데 두 걸음 멀어지게 생겼다. 하준은 아예 팔짱을 낀 채 재경의 춤을 감상했다.

“적당히 치고 빠지고 싶어 하는 애가 막상 시키면 다 잘해요.”

“하아, 재경이 형. 그렇게 춤 이쁘게 추면 어떡해.”

“저 정도면 제작진이 고민할 차례 아니야? 재경이 서비스 시간 없잖아.”

“그럴걸요.”

“쟤는 PR 1분밖에 없으면서 카메라에는 왜 저리 많이 잡혀.”

하준이 혀를 찼다. 그 와중에 소운은 재경의 춤을 따라 해보려고 손을 들었다가 포기했다. 자신은 아무리 해도 재경과 같은 느낌이 나지 않았다.

“재경이 형 노래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춤 진짜 잘 추네요. 저게 10년 짬밥인가?”

“뭔가 맛깔스럽게 춰.”

“맞아요. 근데 재경이 형 밥도 되게 맛있게 먹어요.”

소운이 고개를 주억거리는 동안 노래가 끝났다. 최 PD가 ‘서재경 연습생 성공.’이라고 외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방에 통과된 게 기쁜 재경이 가쁜 숨을 정리하지 못한 채 정우를 돌아보았다.

‘주사 맞기 싫어서 한 번에 끝내…….’

재경의 얼굴에 떠올랐던 미소가 점점 잦아들었다. 뒤늦게 주변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바닥에 그려진 11개의 원 중에서 서 있는 건 자신과 저 끝에 있는 한 명뿐. 최 PD는 재경이 성공했다고 했지 다른 연습생을 부르지 않았으니 이 판의 통과자는 한 명이다.

재경은 제게 쏠린 시선을 느끼며 의아한 시선을 감추지 못했다.

‘다른 사람은 왜 안 나왔지?’

자기 혼자만 나오지 않아서 다행인 걸까 아니면 2명밖에 안 돼서 슬퍼해야 할까. 재경이 혼란스러운 표정을 애써 다잡았다. 그걸 본 하준이 한숨을 내쉬며 재경은 못 들을 말을 중얼거렸다.

“저것도 연습생 오래 한 너나 잘 알지 남들은 잘 몰라.”

연습생 생활 제법 오래 했다는 하준조차 노래만 기억할 뿐 동작 전체는 몰랐다. 10년도 더 된 노래였고 재경의 삼엽충 시절 때문인지 알고 있지만 다른 이는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더불어 걸그룹 노래이기도 해서 더욱. 더더욱.

어쨌든 재경은 모두의 관심을 받아가며 춤을 췄다는 걸 깨닫고 천천히 정우를 돌아보았다. 넌 알고 있었냐는 물음을 던지고 싶은데 이미 정우의 얼굴에 미안함이 가득 찼다.

‘망했어.’

자신을 찍은 카메라가 몇 대일 것이며 스태프와 연습생 몇 명이 돌아봤겠는가. 재경이 한숨을 감추고 짜증을 삭혔다.

‘남들 앞에서 추는 거 안 좋아한다니까.’

싫은 반찬 먼저 먹으려던 아이는커녕 재롱잔치 했다. 이정우의 말만 듣지 않았어도 처음에 나가지 않았을 텐데. 통과자는 옆으로 따로 모이라는 손짓에 가면서도 터덜터덜 걸어가던 재경이 정우를 힐끗 노려봤다. 아까 미안한 듯 보던 정우가 입만 벙긋거리며 무슨 말을 했다.

‘잘했어.’

재경이 입술을 삐죽거리다 휙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사이 시작된 노래에 맞춰 조마다 한 명씩 뛰어나갔다. 정우는 재경을 신경 쓰느라 나가지 못했다. 합격자 자리에 앉은 재경이 자기 때와는 다르게 9명이 전부 나간 걸 보며 폭 한숨을 쉬었다. 슬슬 이상하게 꼬이는 건 그때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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