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아이돌-22화 (22/125)

22화

PR촬영이 끝나고 나니 인터뷰를 해야 한단다. 어디로 가라고 말만 전해들은 터라 재경이 알아서 인터뷰 부스쪽으로 향했다. 막 복도를 걸어가던 재경이 누군가를 발견하더니 점점 속도를 줄였다.

오늘은 좀 떨어지는 줄 알았는데 왜 저기 아는 얼굴들이 모여있는지. 벌써 재경을 발견한 윤하준이 반갑게 팔을 흔들었다.

“이렇게 부를 건 뭐야.”

나직이 혼잣말을 중얼거린 재경이 무거운 발을 이끌고 억지로 다가갔다.

“지금 정우 하고 있어.”

윤하준의 친절한 설명이 아니어도 이정우가 보였다. 인터뷰부스라고는 해도 복도 끝에 간이식으로 차려둬서 감춰지는 게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카메라에 찍히는 두 면만 가려져서 이정우가 고스란히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윤하준이 속삭였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인터뷰할거면 그냥 모아놓고 물어보지.”

그건 재경도 같은 마음이라 속으로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이 이정우의 인터뷰까지 다 듣고 있어야 한다니. 재경이 무슨 생각을 하든 상관없이 제작진은 큐카드를 들고 연이은 질문을 건넸다.

“여기 와서 새로 사귀게 된 연습생이 누구인가요?”

재경이 제 이마를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 친구 누구 사귀었어?’라고 초등학생한테 물어보는 것만 같았다. 제게도 비슷한 질문이 들어올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도망가고 싶었다. 이거 안 하고 싶다.

재경이 짜증스럽게 올라왔던 감정을 누르고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어?’

자신을 보고 있던 이정우와 눈이 마주쳤다.

“서재경 연습생이요.”

“뭐…….”

재경이 당황해서 목소리를 냈다가 헛기침을 하는 척 목을 가다듬었다.

‘뭐야.’

뻔뻔하기도 하지. 여기 연습생이 몇 명인데 굳이 당사자가 앞에서 듣는데 이름을 말하다니. 자기 같으면 말 못할거 같은데 이정우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이정우 연습생이 본 서재경 연습생은 어떤가요?”

재경이 움찔했다. 다른 사람이 보는 나라니 갈수록 점입가경이었다. 윤하준의 흥미로워하는 눈빛이 더욱 진해지자 재경이 관심없는 듯 고개를 돌렸다.

‘이정우는 날 좋아하지 않는데.’

자신과 한 카메라에 잡히지 말라고 했었고 실수하면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공항에서 밀려드는 팬들 속에서 버티지 못하고 넘어질 때도 이정우는 자신을 힐끗 바라보고는 갈 길 가버리는 사이였다. 한 그룹에 속해있으면서도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았다. 유독 안 친했고 그 정도를 넘어서 자신을 가장 미워하는 멤버가 이정우였다.

“항상 차분했어요. 오디션이 아니라 그냥 다큐 찍는 거 같았어요.”

윤하준의 급히 입을 막았지만 이미 웃음소리를 들었다.

‘다큐라니… 내가 언제 다큐를 찍었다고.’

재경은 누구보다 열심히 오디션에 대해 생각하고 움직였다. 다큐였다면 이처럼 열정적으로 피하고 숨으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최대한 카메라에 비치지 않고 한 달을 버텨야 하는 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생각으로 움직이는지 알면 분명 저런 말 못한다.

“아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서재경 연습생이 좀 침착하긴 해요. 그래서 pd님이 공포특집으로 미션 하나 만들까 농담했다니까요?”

재경은 자신을 두고 대화가 끊어지지 않는 게 황당하고 어이없어서 나서서 인터뷰를 끊고 싶었다. 나 말고 이정우 네 이야기 하라고. 재경의 불만스러운 시선을 읽은 이정우가 미소지었다. 그 표정에 스태프 사이에 작은 웅성거림이 있었다.

입 끝만 살짝 올라가는 표정이 쑥스러움을 타는 소년 같았다. 저건 반칙이었다. 저렇게 수줍은 미소를 짓는 건 정말 반칙…….

“그래서 옆에 있으면 긴장이 풀어져요.”

재경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자신은 이정우에게 말도 놓지 말라고 하고 친근하게 굴지 않았다. 이정우와 마주할 때마다 가슴이 조이도록 불편한 사이였다.

“편해요.”

“…에?”

재경이 어벙한 소리를 흘리고 말았다. 윤하준이 피식 웃으며 바라보는데도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 이정우의 말이 의외였다.

‘내가 편하다고?’

누구보다 불편한 사이 아니었냐는 생각이 떠올랐다가 이정우의 얼굴을 본 재경이 뒤늦게 떠오른 생각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사이 이정우는 카메라를 보면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을 주르륵 내뱉었다.

“처음에는 누군지도 모르는 연습생인데 노래가 너무 좋았어요. 누가 노래를 부르는 거지? 하고 궁금했는데 서재경 연습생이었어요. 목소리가 좋아서 또 만나지 않을까 싶었는데 다시 만나서 반가웠어요. 이번에 이 프로그램을 찍게 되면서 좋은 사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은근슬쩍 서재경 연습생을 따라다니고 있어요.”

“그 말은 다른 자리에서 만나면 어땠을지 모른다는거죠?”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요?”

“서재경 연습생이랑 있으면 든든해요. 어떤 거든 물어보면 다 대답해주고 춤 연습하는 것도 도움을 많이 받고. 무엇을 하든 서재경 연습생이 먼저 하는 걸 보고 나면 어떻게 하는지 알겠어요.”

“설마 그거 때문에 편하다고 한 건가요?”

스태프의 짓궂은 질문에 이정우가 대답 대신 웃기만 했다.

“그렇긴 해요. 가끔 연습생 같지 않긴 해요.”

스태프가 받아줬다.

“좀 어색하고 그러면 좋겠는데 다 잘해.”

‘내가 언제 다 잘했어.’

재경이 억울해서 울상을 지었다. 진짜 이 인터뷰 별로다.”

“네. 그래서 서재경 연습생이랑 친해지고 싶어요.”

이정우가 진지한 얼굴에 한줄기 미소를 그렸다. 그게 인터뷰를 위해서 그린 미소가 아니라는 걸 누구든 알아볼 수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만나게 된 게 운이 좋았어요. 같이 오래 오래 가고 싶어요.”

“…….”

인터뷰를 따는 스태프 몇몇이 재경을 힐끔 바라보았다. 친하게 지내자고 말하고 있는데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해서 돌아보았다. 그런데 이정우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재경에게서 어떤 반응도 나오지 않았다. 한편 재경은 충격에 휩싸여 멍하니 서 있었다. 모두가 그를 이상하게 보지만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재경이 생각에 빠져 있었다.

재경은 지금 이정우의 말을 통해 그동안 제가 한 짓을 떠올렸다.

‘내가 지금 뭘 한거지? 내가 이정우를 어떻게 대했던 거야?’

누명, 오해.

자신이 한 게 아닌데 누명을 썼다고 억울해하던 재경이 전상국, 또 그 연습생과 다를 바 없는 짓을 하고 있었다.

‘19살 이정우.’

25살에서 19살로 돌아왔으니 재경이 보는 이정우도 19살의 어린 청년에 불과했다. 분명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쟤는 날 싫어하고 경멸하던 애였으니까.

거기다 이 오디션에서 1등까지 한 애이니 당연히 옆에 있기 싫다는 마음이 강했다. 그래서 피하고 배척하고 밀어냈다. 미래의 일을 모르고 겪지 않은 19살의 이정우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었던 거다.

재경의 시선이 천천히 이정우에게 향했다. 이제껏 피해 다니면서 스쳐보던 것과 다르게 올곧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이정우의 얼굴이 자세히 보였다. 화장기가 없는 맨 얼굴에 대충 넘긴 머리. 다 큰 것 같지만 군데군데 남아있는 소년의 얼굴을 발견하게 되면서 재경이 한탄을 삼켰다.

‘나 왜 이렇게 한심하게 굴었지.’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정우의 말대로 여기에서 만났으니 다른 사이가 될 수 있는데 먼저 그를 거부하고 있었다. 이소운이 형이라고 부른 건 어영부영 받아주면서도 이정우가 말을 놓은 건 싫다고 잘라냈다.

자신처럼 정우 역시 20살도 되지 못한 미성년에 불과한데. 일방적으로 피하고 밀어내는 게 상처가 되지 않았을까? 정우를 미워하고 원망했던 마음에 그에게 같은 짓을 벌이고 있었다.

제 상처만 돌보느라 남에게 상처를 내고 있었다. 미래의 그에게 상처를 받았다고 해서 과거의 그를 똑같이 대했다.

그게… 부끄러웠고 이정우에게 미안했다.

*  *  *

어떻게 인터뷰를 했는지 몰랐다. 방으로 돌아온 재경은 그대로 문에 주저앉았다. 카드를 꽂을 여유도 없이 재경은 어두운 공간에서 제 다리를 끌어모았다.

이정우의 인터뷰를 보고 느꼈던 충격과도 같았던 깨달음에 심장이 달음박질쳤다. 그동안 자신이 이정우를 어떻게 대했는지 알자 이루말할 수 없는 자괴감이 떠올랐다.

자신이 겪은 일은 사라지지 않았다. 물론 같은 팀으로 활동하던 멤버들의 차가웠던 반응 역시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건 재경 혼자만이 알고 있는 미래였다.

자신 외에 아무도 모르는, 평생 모를 일이 될 것이다. 어차피 재경은 똑같은 길을 걷지 않을 테니까.

이미 그들과 첫만남부터 틀어졌다. 늘 자신을 애매한 존재 취급하던 윤하준도 선뜻 말을 걸어줬고 민태연은 노래를 잘 부른다며 좋아해줬다. 이정우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제 마음만 먹으면 그들과 다른 관계가 될 수 있었다. 이 오디션에서 지내는 시간동안 조금만 친근한 모습을 보여줘도 미래는 완전히 날아갈 것이다. 아니, 엄청 사근사근히 굴지 않아도 충분히 다른 관계가 될 거 같은데.

어지럽던 마음이 그들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면서 조금 가벼워졌다.

엄한 사람에게 화내지 말자.

재경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카드를 꽂아넣었다. 그러자 불이 들어오는 내부를 돌아보다 문득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난 누가 위로해주지?

내가 겪은 일을 아는 건 나뿐인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