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평일의 일정은 비슷했다. 조대로 번갈아가며 프로필이나 개인인터뷰, PR등의 촬영을 하고 댄스와 보컬 레슨을 한다. 저녁 식사 후엔 자유시간이었다. 평일엔 대체로 조로 다녀서 다른 조원을 만날 기회가 적었다.
대신 주말엔 종일 미션을 수행할 예정이니 따로 연습할 시간이 부족할 수 있다는 말에 연습생들은 모두 저녁까지 연습에 매달렸다.
“개인 PR촬영 있겠습니다. 특별한 소품이 있는 연습생은 미리 준비해주세요.”
스태프의 외침에 어떤 연습생은 공룡 의상을 입은 채로 뒤뚱뒤뚱 뛰어다니고 어떤 연습생은 태권도복으로 갈아입었다. 누구는 춤 연습에 한참이고 간혹 주섬거리며 소품을 챙기는 이들도 보였다.
모두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긴장감이 묻어났다. 그럴 수밖에 없는데 PR은 무조건 나가게 되어 있었다. 시간이 초과한다면 편집되긴 할지라도 1분여의 시간동안 무조건 방송을 탄다.
유난히 정신없게 느껴지는 분위기 속에서 재경만 다른 세상에 속한 사람인 듯 미동도 없이 앉아있었다. 아무것도 준비할 게 없는지 재경은 트레이닝복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의상을 갈아입지도 그렇다고 목을 풀며 연습을 하지도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재경은 자기 PR시간에 특별한 걸 준비하지 않았다. 방송에 나갈 1분의 시간은 그저 밋밋하게 비치도록 할 생각이었다. 재경이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뭐하지?’
남들은 진작 뭘 보여줄지 정해서 연습이 한참인데 재경은 태평했다. 꼭 자기만 유독 연습생 생활을 오래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인생의 반은 노래와 춤에 바쳤다. 이젠 그러고 싶지 않아서 편하게 고를 생각이었다.
‘그냥 무난한 발라드가 낫겠지. 이왕이면 알려지지 않은 게 좋겠네.’
아이돌 노래는 PASS. 특히나 팬덤이 강하게 형성된 아이돌 곡은 사양이었다. 대중적으로 사랑받은 발라드도 안된다. 익숙한 멜로디로 사람들의 귀를 끌어들일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하나씩 노래를 지워나가는 동안 누군가 재경에게 다가왔다.
“보기 좋네?”
반갑게 건넨 인사에 보이지 않는 가시가 살갗을 찔러댔다. 재경이 천천히 눈꺼풀을 올렸다. 앞을 향해 시선을 던지지만 제 옆에 앉은 이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전상국.”
“조가 달라서 마주치기 힘들더라.”
재경의 옆자리에 앉은 전상국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남들이 보기엔 사이좋게 대화하는 모습이겠지. 재경은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입을 다물었다.
“재경아, 아직도 내가 불편해?”
“편할 리가 없잖아.”
그것도 자신을 소속사에 쫓겨낸 원흉인데.
“하긴 붙어먹다 들켜서 쫓겨났는데 날 보기 불편하겠지.”
“말조심해.”
재경이 처음으로 전상국을 바라보았다. 깔끔하게 넘긴 머리부터 메이크업까지 한 전상국이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틀린 말 한거 아니잖아? 그 순진한 척한 얼굴로 애들 꼬셔서 실컷 가지고 놀다 버리는게 서재경 네 취미잖아.”
“입만 열면 개소리지.”
재경은 전상국의 얼굴을 한 대 치고 싶은 듯 주먹을 꾹 쥐었다.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고도 싶지만 전상국이 작정하고 왔다는 걸 알기에 일어나지 않았다.
“여자애랑만 놀면 좀 좋아? 하여튼 그 변태 같은 취향 한 번 좆같아요.”
전상국은 제대로 날을 잡고 왔다. 그는 재경을 몰아세우는 것도 모자라 그때의 일을 들먹였다.
“그때 너랑 같이 쫓겨난 그 새끼, 너랑 붙어먹다가 걸린 애 있잖아. 걔는 어떻게 됐는지 안 궁금해?”
재경이 입을 다물었다. 오래된 기억 속 엄한 오해를 받았던 일이 떠올랐다. 전상국의 괴롭힘을 받았던 연습생을 도와줬지만 아예 그 아이와 싸잡아 오해를 받으며 쫓겨났다.
전상국이 눈만 치켜뜨자 동공이 거의 사라지고 흰자만 남았다.
“다시 왔었어. 받아달라고.”
전상국이 기지개를 켜며 제게 돌아오는 카메라의 빨간 불을 확인하고 상큼한 미소를 지어낸 상태로 중얼거렸다.
“다 네가 꼬셔서 그런거라고 하더라.”
재경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조심하라고. 너… 이번에도 그런 짓하면 큰일 나.”
조언이라도 해주는 듯하지만 절대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여기서도 쫓겨나면 어떡해. 그지?”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살살 하라고. 여기서 데뷔하겠다고 나대지 말고 적당히 숙여. 나 올라가게 발판으로 바짝 엎드려도 좋고.”
재경이 속을 끓어오르는 화를 애써 누르……려다 말았다. 생각해보니 자신이 참을 이유가 없었다. 그냥 전상국과 같이 있으면 기분이 더러워서 피했던 건데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내가 엎드린다고 네가 올라갈 거 같아서 하는 말이야?”
“…뭐?”
“열심히 널 밀어준다고 네가 되겠냐고.”
재경이 아무 감정을 띄지 않은 얼굴로 전상국을 응시했다. 그 무언의 침묵에 전상국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너 지금 뭐라고 했냐? 그럼 내가 못할 거 같아?”
“그래 잘해봐. 엎드려 줄테니까 꼭 밟고 올라가. 꼭.”
아까 전상국이 카메라를 의식해 미소를 지었었다. 이번엔 재경이 전상국을 향해 활짝 웃었다. 정말로 전상국이 잘되길 바라는 듯한 웃음이었다. 재경의 휘어진 눈웃음 사이로 전상국을 향한 진심이 담겼다.
이따위 거짓 웃음이 뭐라고 그렇게 어색하게 웃니.
전상국의 눈동자가 어색하게 카메라를 확인하고 재경을 따라 웃으려는데 잘 되지 않았다. 결국 그는 표정관리에 실패했다.
“잘해봐라.”
전상국이 경고를 날렸다. 재경은 한껏 인상을 찡그리고 가는 전상국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분명 그에게 한마디 했는데 속이 개운하지 않았다.
* * *
PR 촬영은 커다란 회의실을 개조해서 진행했다. 뒤편을 막은 파란색의 간이 배경은 둘째치고 좌우로 늘어놓은 연습생들의 비품들이 쌓여 언뜻 창고처럼 보였다.
좁게 난 길을 걸어간 재경이 앞에 스태프와 카메라가 모인 곳을 향해 섰다. 앞줄에 쪼그려 앉아있는 스태프 옆으로 두사람의 공간만큼 차치한 전자시계가 보였다.
개인당 주어진 시간이 1분이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 들여놨나보다 생각했다. 가운데 앉은 최PD가 시작하라는 듯 손을 들었다.
1분의 시간이 금세 59초로 떨어지며 초단위로 시간이 흘러나는 게 보였다. 시간이 흘러도 1분에 가까운 시간이건만 초로 떨어졌다는 것만으로도 압박감이 몰려올 것만 같았다.
그러나 재경은 태연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부터 건넸다. 얼마나 시간이 흐르듯 상관없다는 듯.
“안녕하세요. 시작하겠습니다.”
재경이 호흡을 고르는 사이 짧은 순간 스태프들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그러나 찰나의 순간에 불과해 어떤 걸 놓쳤는지 알아채지 못했다.
“MR…….”
누군가 이상한 원인을 떠올린 동시에 재경이 노래를 시작했다.
“내일이면 잊으…….”
첫 소절에 스태프의 표정이 달라진 걸 알아챘지만 재경은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아무 MR하나 없이 재경의 목소리만이 유일한 악기였다. 스태프가 재경의 노래에 집중할 때 재경은 카메라에 비친 제 과거를 훑었다.
전상국이 말한 쫓겨난 연습생. 그 연습생이 종종 부르던 곡이 떠오르더니 자꾸 그 노래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립스틱 짙게 바르고.’
지금 자신한테 딱 맞았다. 영원한 건 없었다.
엄마의 사랑을 받고 싶다던 어린아이의 순수한 마음은 연습실에서 흘린 땀에 씻겨 내려갔고, 화려함 속에 가려진 상처는 서서히 곪아갈 뿐 치유되지 않았다.
연습생 시절일때도 아이돌로 활동할 때도 재경은 매일이 악몽이고 지옥이었다. 재경은 왜 그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했을까. 죽으면 끝인데. 어차피 나팔꽃만큼이나 짧은 인생인데.
과거로 돌아와서 다른 사람은 재경과의 악연을 알지도 못하는데 전상국은 알고 있었다. 그는 재경의 상처난 속을 들춰내고 헤집었다.
‘절대… 안 해.’
절대 아이돌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숙소를 나가고 나면 전부 잊고 새로 시작할 것이다. 그동안 하고 싶었던 공부도 실컷 하고 바로 대학은 못 가겠지만 일 년 정도 일해서 돈을 모으면 그다음 해에 대학교에 갈 수 있겠지.
오랜만에 다시 교과서를 잡아서 다 잊었으면 더욱 열심히 해야 한다. 노래를 부르며 한편으론 자신의 새로울 미래를 꿈꾸는 재경의 눈동자에 몽롱한 기대가 차올랐다. 애틋한 가사와 다르게 그의 표정은 무언가를 기대기 시작했다.
‘잘하네.’
‘이걸 19살이 부르네.’
‘여기 아이돌 뽑는 곳인데 왜 가요광장 같지?’
‘저 감정은 뭐야.’
그의 노래를 듣는 스태프가 하나둘 저마다의 반응을 보였다. 트로트를 부르는 거야 이미 전에 다른 연습생이 먼저 해서 놀랄 것도 없었다. 선곡도 다 아는 노래였다.
다만 아까 연습생은 맛깔스럽게 부르려고 가사를 구성지게 꺾는 기교가 있다면 서재경 연습생의 노래는 그냥 잔잔했다. 억지로 트로트적인 구성을 보이지도 않았고 과한 감정을 넣지도 않았다. 그냥 가사에 음을 실어 보내는 게 다인데 이상하게 눈이 가고 귀를 기울이게 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잊겠다는 노래와 다르게 표정엔 어떤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마치 새로운 사랑이라도 꿈꾸는 듯 몽롱했다. 제작진들은 지금이 촬영중이라는 것도 잊고 귀에 감겨오는 노래를 감청했다. 그러나 그 순간이 길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시선을 내려 전자 시계의 숫자가 55로 변한 걸 확인한 재경이 뚝 노래를 멈췄다. 인사까지 하고 알아서 나가버리는 그 시간이 정확히 1분 안에 이뤄지자 오히려 제작진들이 더 당황했다. 최PD가 재경을 향해 다급히 입을 열었다.
“아니, 바로 가요?”
1분 PR이라 해도 자기들이 그 안에서 편집할 수 있는데 재경이 딱 맞춰버리고 미련 없이 가버리자 외려 PD가 재경을 잡으려 손을 뻗고 만 것이다. 하지만 최PD의 부름을 듣지 못한 재경이 가버리자 카메라 앞이 공석이 되어버렸다. 최PD가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었다.
“더 불러주지.”
그의 혼잣말이 마이크로 흘러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