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재경이 이정우를 똑바로 보고 섰다. 이제껏 그를 피한다고 항상 조금씩 옆으로 몸을 틀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번에 제 의견을 확실히 전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었다. 이정우가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자 재경이 다소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도 저 따라다니시는 거 아니죠?”
재경이 주변을 훑어보았다. 저 멀리 카메라가 있지만, 목소리를 낮추면 들리지 않겠다. 어제처럼 어쩌지 못하고 두는 것보다 차라리 지금 떼어내는 게 나았다.
“아니, 오늘 프로필 촬영도 하고 레슨도 듣는다는데, 계속 옆에 있지 않았으면 해서요.”
“…….”
이정우의 입매가 고집스럽게 닫힌 걸 보고 재경은 속으로 코웃음 쳤다. 다 알아 들어놓고 모르는 척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웃겼다.
“제가 착각하는 거면 창피한 건데요. 솔직히 어제도 자꾸 같이 있어서 불편했거든요. 그… 피구 할 때도요.”
어디 간다고 하면 붕어 똥처럼 뒤로 붙어 오더니 피구 할 때는 뭐만 하려고 하면 앞에서 공을 받아 갔다. 그게 공에 욕심이 있어서 그러면 말을 안 하겠는데 재경에게서 멀리 던져지는 공은 아예 쳐다도 안 봤다.
“제가 낯을 많이 가려요. 그러니까 이제 불편하게 있지 말고 따로 다니기로 해요.”
재경은 빠르게 말을 뱉어버리고 바로 뒤돌았다. 전상국으로 안 좋은 기분에 지른 말이라 감정이 조금 실렸다. 남에게 화풀이라니 그것만큼 한심한 게 없지만 지금의 재경은 남의 사정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하물며 이정우다. 자신과 같은 그룹을 하면서 그렇게 정색하고 무시하던 놈.
미래의 이정우가 이 모습을 봐야 하는데.
‘이제 따라오진 않겠지.’
처음부터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괜히 이정우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됐을 텐데.
“저기요.”
이정우의 부름에 재경이 일부러 걸음을 천천히 늦췄다.
‘기분 나쁜가 보네.’
그건 그거대로 좋았다. 기분 나쁘다는 이유로 멀리 떨어져서 다니면 재경은 그림자처럼 한 달을 보낼 수 있으니까. 그가 불러서 서는 것조차 귀찮게 느껴질 정도로 재경은 느긋하게 몸을 틀었다.
뭐, 할 말 있어? 라는 식으로 바라보았다. 최대한 상대방에게 밉살스럽게 비치면 좋겠는데.
“내가 싫어요?”
“…네.”
“왜요?”
“부담스러워서요.”
눈에 띄는 게 싫고 예전부터 아는 사이라는 게 싫고. 아예 무시하고 싶은데 신경 쓰여서 싫고.
“저는 좋아요.”
“네, 그쪽도 저 싫으니까 따로… 네?”
“좋다고요.”
재경이 당황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대놓고 좋다니. 카메라 멀리 있는 거 맞지? 그렇지?
“왜요?”
“뭐가요?”
“왜 좋냐고요. 나 얼마나 봤다고…….”
그렇게 사람 쉽게 좋아하는 애 아니었잖아. 재경은 속에 있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는 이 상황이 답답했다. 하지만 이정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페이스를 잃지 않았다.
“목소리가 좋았어요. 그래서 계속 옆에서 노래 듣고 싶어요. 같이 있고 싶고요. 그래서 따라다녔어요.”
“내 목소리가… 거짓말. 제 목소리 좋아하는 거 거짓말이죠?”
“진짠데.”
이정우가 태연히 중얼거렸다.
“아마 우리가 오디션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만났다 할지라도 목소리 좋아했을 거예요.”
개소리. 다르게 만났었고 날 싫어했으면서. 재경은 점점 가라앉은 기분에 이정우를 노려봤다.
“이 오디션에서 데뷔를 하고 계약 기간이 끝나 소속사에서 데뷔할 때 만났으면요? 그때 내가 빌붙듯이 멤버가 됐어도 좋아했을까요?”
많은 생략으로 앞뒤가 안 맞는 질문이었다. 재경은 제 사정을 전부 설명할 수 없어서 생략했지만, 이정우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재경은 더 많은 설명을 덧붙일 여유가 없었다.
“재경 씨를 싫어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런데 이정우는 제법 정확하게 직시했다.
“그 목소리가 엄청 거슬렸겠죠. 싫어해야 할 상대인데 목소리가 좋다고 느껴지면 얼마나 짜증 나겠어요.”
이러나저러나 목소리가 좋았을 거라는 대답에 재경의 입술이 헤 벌어졌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그거야 일어나지 않은 일이고 지금은 이렇게 연습생 오디션으로 만났고 같이 데뷔할 거니까 그 목소리 마음껏 좋아해도 되잖아요.”
이정우가 가까이 다가왔다. 지척에서 멈춰선 그의 숨소리가 들리자 재경이 긴장해서 몸을 굳혔다.
“목소리가 좋았는데 얼굴도 좋고 성격도 좋고요.”
“미친…….”
“아직 내 말 안 끝났어요.”
이정우가 재경의 얼굴을 천천히 훑어내렸다. 그 시선이 지저분하게 보는 게 아니라 깔끔했다.
“우리 같은 조예요.”
재경이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이건 또 무슨!
“그런 말 못 들었는데요?”
“아침에 전달 왔어요. 룸마다 돌면서 종이 건네줬는데 못 봤어요?”
재경은 들은 게 없었다. 아니, 애초에 제 침대 바깥으로 관심 있게 둘러본 게 없었다.
“명단에 우리 이름 나란히 적혀있고 우리 같이 다녀야 해요.”
“그런 말도 아침에 들었어요?”
“아니요.”
“…….”
“조마다 레슨이 갈리는데 따로 다니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요?”
“아…….”
재경은 손가락으로 구겨진 미간을 꾹꾹 누르다가 주변을 돌아봤다. 둘만 있어서 이정우에게 그만 붙어 다니라고 말했는데 지금은 왜 아무도 없는지 싶었다.
“우리 둘만 한 조예요?”
“9명씩 11조예요.”
“아… 그럼 다른 사람들은요?”
“밥 먹으러 먼저 내려갔어요.”
같이 다니라며? 재경은 아직도 잠에서 덜 깼나 괜히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쪽이 늦게 일어나서 제가 데려간다고 했어요.”
“…저 때문에 여기까지 오셨네요.”
“네. 다들 저보고 가라고 해서요. 제가 그쪽이랑 제일 친해 보이나 봐요.”
어제 붙어 다녔더니. 이정우의 말이 계속 나올수록 재경은 해머에 맞은 듯 고개가 숙어졌다. 착각하는 거면 창피하다고 말해놓고도 지금 창피해서 어디 구멍 없나 눈을 굴렸다.
호텔에 쥐구멍이 있을 리 없지. 같은 조가 되고 자기가 늦게 나와서 데리러 왔다는데 이 이상 설명해서 뭐할까. 거기다 고백 비스무리한 걸 받아서 이미 주도권이 이정우에게 넘어가 버렸다.
재경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진짜 벨도 없는 새낀가. 한순간 허물어질 뻔한 벽을 간신히 세운 재경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을 때였다.
“안 가요?”
재경을 앞질러 걸어가던 이정우가 태연하게 빨리 오라는 소리를 지껄였다. 이정우가 서 있던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던 재경이 와그작 얼굴을 구겼다.
“뭐야.”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기는데 평소엔 잘만 갈라지던 머리카락이 오늘따라 재경의 손가락에 엉겨왔다.
* * *
“A조부터 프로필 촬영하겠습니다.”
이정우와 함께 간 곳에서 조원을 확인한 재경은 이후로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이정우를 비롯해 아는 얼굴이 많았다. 최종 멤버의 전부를 알지 못하지만, 재경이 아는 인물만으로도 2명이 있었다.
윤하준, 박건후.
그리고 같은 룸메이트인 한찬형과 이소운도 있었다. 차라리 얼굴 모르는 조원으로만 이루어졌으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테이블에 명단 올려둔 거 보셨어요?”
한찬형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재경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정우의 말대로 아침에 그게 돌았나 보다.
“어쩐지 저랑 소운이 보고 놀란 거 같아서 못 본 줄 알았어요.”
이럴 때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못 봤다고 사과하면 사이가 좋아질 수 있다. 보통의 인간관계는 그런 거니까. 하지만 재경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 고개만 젓고 말았다. 이정우도 싫다고 피하는 마당에 한찬형이고 이소운이고 알게 뭔가.
‘순위 발표식이 끝나면 다신 안 볼 인연들이야.’
재경은 고개를 돌려 다른 사람의 얼굴을 한 번씩 보고 나서 아무것도 없는 벽을 보고 섰다. 처음처럼 배에 이름표를 붙이지 않고서야 누가 누군지 모르지만 궁금한 사람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저마다 대화를 나누고 있을 동안 재경은 그냥 가만히 서 있었다. 카메라에 찍힌다면 일시 정지한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재경이 가만히 있으니 외려 움직임이 많지 않았던 이정우가 눈에 띄었다. 그는 눈동자만 돌려 재경이 바라보는 곳을 봤다가 다시 재경을 향해 고개를 살짝 틀기를 반복하니 그게 또 이상하게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둘이 뭐하냐.”
보다 못한 윤하준이 미쳤냔 식으로 중얼거렸다.
“뭐가.”
이정우가 태연하게 받아쳤지만,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했던 걸 알았는지 윤하준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한 명은 돌부처 컨셉에 한 명은 관광객이야?”
윤하준이 재경과 이정우를 번갈아 손가락질했다.
“신경 꺼.”
조를 한데 모아둔 스태프가 나타나자 재경의 시간이 다시 흘러갔다.
“서류에 적어서 낸 사이즈에 맞게 옷을 배부할 테니 혹시 그사이에 급격한 변화가 있는 분들은 개인적으로 말해주세요.”
스태프의 가벼운 장난에 몇몇 웃음이 섞여 들어갔다. 그 사이에서 재경은 조용히 제게 넘겨주는 옷을 받아들었다.
“탈의실은 저기 있습니다. 갈아입자마자 의자에 앉아 주세요.”
메이크업과 헤어까지 진행할 동선을 알려준 스태프가 바쁘게 자리를 벗어났다. 재경은 옷을 받아들고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았다. 머뭇거리면서 탈의실에 들어가는 움직임이 미적거리기에 재경이 가장 먼저 들어갔다. 아마 빨리 갈아입은 순서대로 촬영할 거 같아서 그런 눈치 사이로 멀뚱히 있기가 더 지루했다.
그렇게 탈의실에 들어간 재경은 한쪽에 옷을 걸어 두고 제 옷을 벗었다. 옷을 펼쳐서 걸어놔서 얼추 사이즈가 보이긴 하는데 약간 긴가민가했다. 그래도 본다고 다 아는 건 아니니 일단 하나씩 걸쳐입었다.
‘옷이 좀 작은데?’
무난한 흰 셔츠에 베이지색 면바지를 생각했다. 거기에 적당한 크기의 카디건을 생각했는데 사이즈를 잘 못 받았는지 하나같이 옷이 몸에 맞지 않았다.
작은 건 아닌가(움직이는데 불편한 건 아니지만) 싶을 정도로 몸에 딱 맞았다. 그런데 카디건은 또 두 사이즈를 올린 듯 컸다. 재경은 잠시 카디건을 내려다보며 고민했다.
원래 입었던 옷을 벗고 가서 사이즈를 다시 달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카디건을 입은 채로 가서 옷만 먼저 받아올까.
“아직이에요?”
“아, 잠시만요.”
재경이 제 옷을 대충 뭉텅이로 들고 나왔다.
“어…….”
막 옷을 갈아입으려고 들어오려던 윤하준이 멈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