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뛰긴 뛰는데 자기가 맞지 않고 들어온 게 신기하면서도 왜 뛰고 있는지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하면서 뭔가 복잡했다. 진짜 계속 뛰고 있어야 해? 아니, 내가 이거에 무슨 부귀영화를 노릴 것도 아닌데. 막 마음이 떨어지자 절로 발이 느려졌다. 결국 타이밍이 어긋나 줄에 걸렸다.
뒤이어 들어오려던 다른 연습생이 어어? 놀라는 음성에 재경은 머쓱하게 밖으로 나왔다. 처음 서 있던 자리로 돌아온 재경이 순간 뒤늦게 제 멍청한 짓을 깨달았다.
“잘했어요.”
이정우가 있는 걸 알고도 왜 여기로 왔을까. 재경은 반쯤 포기하고 벽에 기대고 앉았다. 대체 왜 이런 걸 해야 하는 걸까. 노래를 부르고 춤 연습을 할 거란 생각이 점점 아득히 멀어져갔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아… 이것도 예능이었지.’
오디션 프로그램이지만 엄연히 예능의 범주에 속했다. 그러니 이리 미션을 주는 거구나 하는 합리화도 나중엔 하하 힘없이 웃으며 흘려넘겼다.
“1등이 결정되었습니다.”
재경은 궁금하지 않지만 그래도 예의상 사람들 사이로 1등이 누가 되었을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이정우 연습생입니다.”
“아…….”
재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줄넘기를 하는 데도 한 번에 들어갈 수 있게 타이밍도 잡아 주는 게 잘한다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럼 끝인가?”
재경이 제 결리는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체복이 결정되면 오늘 일정은 끝입니다. 내일부터 임시로 함께할 그룹을 나누고 시간표대로 레슨을 들을 겁니다. 중간중간 프로필 사진도 찍을 거고요. 이정우 연습생이 이리 나와주세요.”
오늘 하루 종일 몸을 움직인 이정우가 처음보다 달아오른 눈을 한번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단상으로 올라가자 환호성이 들렸다. 적어도 오늘 카메라에 가장 많이 찍힌 건 그가 되고 1분의 추가 PR시간도 얻었다. 부러움이 더 크지만 모두 카메라 앞이라는 의식해 이정우를 축하해주는 마음으로 박수쳐 주었다.
그들 사이에서 재경도 분위기에 맞춰 소리 없이 손뼉을 몇 번 부딪히고 내렸다. 이정우가 가까이에 서서 아까보다 더 신중히 화면을 보았다.
“생각해둔 옷이 있나요?”
“지금부터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이정우는 특유의 낮은 울림으로 최PD의 말을 받았다. 그의 목소리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가 좋다고 라디오에서도 섭외 1순위였어.’
재경은 자기도 아까 새삼 목소리가 좋다고 생각했으면서 아닌 척 굴었다.
‘목소리가 좋으면 뭐해. 말을 해야 목소리도 들리는 거지…….’
이정우는 말이 많은 스타일이 아니었다. 재경은 이정우의 목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흘려넘기며 그가 어떤 옷을 선택할지 구경했다.
이정우가 정비공 옷으로 손을 뻗었다. 웃긴 게 손은 뻗으면서 시선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마치 다른 사람들에게 이거 괜찮냐는 듯 보는 듯한 자세였다. 재경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화장실 갈 때 불편할 것도 같고 또…….
‘티는 입어야지.’
원한다면 안에 티를 입어도 좋다는 말을 듣지 않아서 불안했다.
“역시 이정우 연습생이 센스가 있네요. 프로필 사진 찍을 때 스패너를 들고 자세를 취하면 괜찮지 않아요?”
최PD의 불을 지피는 말에 재경은 정비공 옷을 외면했다. 이정우의 손이 정비공을 지나 판다복으로 향했다.
‘미쳤어?’
얼굴에 하얀 분칠하고 싶어서 미친 게 아니고서야. 재경이 미간을 좁히며 마음에 안 든다는 티를 팍팍 냈다. 이정우의 손이 움찔 멈추더니 팬더복을 넘어섰다.
그의 손이 잠옷 근처에서 머물 때 재경은 나름 편하게 바라보았다.
‘잠옷 정도면 괜찮지.’
최PD도 비슷한 생각인지 넌지시 말을 건넸다.
“침대를 준비하면 좋겠네요. 아, 몇몇은 야외에서 찍을 수도 있으니까…….”
재경이 대번에 표정을 바꿨다. 평범해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뭐가 자꾸 이상한 옵션이 딸려왔다.
“윽. 변태 같아.”
박건후의 말에 오늘따라 깊게 동감한 적이 없었다. 그 사이 이정우의 손은 착실하게 옆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최PD가 기다렸다는 듯 손뼉을 마주쳐서 재경이 깜짝 놀랐다.
“역시 요정이 낫겠죠?”
저것도 다른 프로그램에서는 꿈도 못 꿀 옷이라며 최PD가 어서 선택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이정우는 최PD를 지나쳐 재경을 바라보았다. 다시 요정 옷을 보고 재경을 보고 번갈아 보는 시선에 다른 연습생도 이정우를 따라 요정과 재경을 번갈아 보았다.
“어울릴 거 같기도…….”
재경은 박건후의 중얼거림을 못 들은 척 이정우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싫어.’
아예 자기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이정우에게 진지하게 싫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카메라가 있는 곳에서 아는 척하지 말라고 했던 게 무색하게.
이정우가 핏 미소를 짓더니 하나의 사진을 찍었다. 지금껏 무표정하게 있던 그의 웃음에 놀랐던 사람들이 뒤늦게 선택한 옷을 확인하려 분주히 눈동자를 올렸다.
“후우.”
“아아.”
재경은 이정우의 손이 찍힌 옷을 보고 다시 평소의 무신경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하얀 셔츠에 남색 카디건, 베이지색 바지와 트윌리의 무난한 룩을 선택했다.
“3번으로 하겠습니다.”
“그렇군요.”
최PD가 빠르게 수긍했다. 화면엔 이미 선택한 옷을 제외한 다른 사진이 사라졌다.
“아쉽지만 기회가 없는 건 아니니까.”
최PD의 아쉬움이 남는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재경은 다음 미션이 만만치 않을 것 같은 예감에 등을 떨었다. 빨리 돌아가서 쉬고 싶었다. 땀이 난 앞섶을 대충 흔들어 댈 때 누군가 재경의 옆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또 보네.”
“…전상국.”
“우리 인연 참 질기다 그지?”
전상국이 콧노래를 부르며 앞서나갔다.
“이번에는 누구 후장을 노리려나.”
재경에게만 들릴 낮은 속삭임. 재경이 주먹을 쥐며 전상국을 노려보았다.
* * *
이른 아침부터 시작되는 촬영에 스태프가 방을 돌아다니며 연습생들을 깨웠다. 재경은 잠에서 깼지만, 침대에서 미적거리며 일어나지 않았다.
“형, 제가 먼저 씻을게요.”
재경은 대답 대신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어제 열심히 움직인 것도 아닌데 몸이 아팠다. 일어나기 전까지 잠깐만이라도 쉬었으면 하는 마음에 재경은 제일 나중에 씻겠다고 했다.
아무래도 어제 스트레스를 받은 상태라는 게 큰 문제인가보다. 배가 당겨서 입맛도 없었다. 아마 바로 먹으면 토할 수도 있을 거 같았다.
“우리 먼저 나가 있을게요. 씻고 오세요.”
한찬형이 나가기 전 재경이 덮은 이불 위를 살살 두드렸다. 어제 다른 자리에 앉아서 그런지 건네는 말도 조심스러웠다. 재경은 다시 잠이 든 척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깨워야 하지 않냐는 다른 사람들의 말에도 꿋꿋하게 버텼다.
한찬형이 그들을 데리고 나가며 무슨 말을 더 건넨 것 같은데 제 몸상태만 돌아보느라 제대로 듣지 못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정적이 찾아오고 나서야 재경이 이불을 끌어 내렸다. 씻고 나와서도 힘없이 비척거리며 어제 나눠준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었다.
‘이제 겨우 하루 지났네.’
한달이 까마득하게 멀다는 게 피부에 닿도록 느껴지며 한참후에야 준비를 끝냈다.
“이번에는 누구 후장을 노리려나.”
전상국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아릿하게 울려댔다.
“개새끼.”
전상국과는 악연 중의 악연이었다. 연습생에서도 제법 힘이 있는 전상국은 새로 들어온 연습생을 가늠해 보곤 했다. 그리고 힘이 없고 약해 보이는 한 놈을 은근하게 괴롭히는 악질적인 놈이었다.
재경은 전상국보다 키가 크고 누구의 도움을 바라며 연습생 생활이 필요한 게 아니었기에 그의 레이더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이제 막 새로 들어온 어린 남학생이 걸렸다. 대놓고 괴롭히는 건 아니더라도 조를 만들 때 끼워 주지 않고 선생에게 나쁜 말을 하는 등의 짓을 하곤 했다.
그래서 재경이 그 남학생을 감싸준 일로 전상국과는 완전히 틀어졌다. 그 남자애를 깔고 싶어서 안달 났다는 말도 안 되는 오해와 함께.
재경은 당장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다스렸다. 여기서 나가면 이도 저도 안 된다.
20억의 빚이 문제냐 전상국이 문제냐. 그렇게 생각하면 한결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있다.
룸을 나서는 동시에 재경은 언제 힘이 빠졌냐는 듯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혼자 있을 땐 얼마든지 풀어진 모습으로 있었지만, 밖에선 아니었다. 누구도 재경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고 아프다는 말도 핑계로 받아들이기만 했다.
재경은 그런 삶을 살아왔다. 어차피 아프다고 해 봐야 걱정해줄 사람도 없는데 자기관리를 소홀히 해서 한심한 것에 지나지 않는데 뭐하러 티를 낼까. 그래서인지 혼자 있을 때만큼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조금만 아파도 다 죽을 듯이 굴곤 하는 게 재경이 자기에게 건네는 위로였다.
막 룸을 나서는 것과 동시에 마주친 건 애매하게 내린 시선에 놓인 누군가의 가슴이었다.
“어디 아파요?”
“…네?”
“얼굴이 안 좋아요.”
재경은 가슴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어제 종일 마주했다고 제법 익숙한 정우와 눈을 마주쳤다. 지금 뭐라고 한거지.
“컨디션이 안 좋아요? 아니면 근육통?”
컨디션도 별로고 근육통도 얻었다. 한방에 두 가지 병세를 다 알아맞춘 건 신기했다.
지금껏 재경이 뻔뻔하게 감정을 감추면 아픈 걸 못 알아봤는데 이정우는 어떻게 알아봤을까. 궁금한 것과 별개로 그에게 단 하나도 맞다고 인정하기 싫었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재경은 고개를 저으며 정우를 빙 둘렀다.
“식사하러 가려면 반대쪽인데요.”
“하, 감사합니다.”
재경은 대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가뜩이나 기분이 별로였다. 이정우까지 신 경쓰고 싶지 않다 생각하며 재경이 방향을 바꿔 걸어가는 데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복도가 하나뿐이니 가는 길이 같겠지만 재경은 그게 다가 아니란 확신이 들었다. 어제도 종일 자신의 옆에 붙어있었다.
가뜩이나 카메라에 많이 잡혔을까 봐 걱정인데 이 남자는 왜 자꾸 따라오는 것인지.
‘개야 뭐야?’
하물며 자신은 주인도 아닌데.
“저기요.”
재경이 돌아서서 그와 대치하듯 마주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