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아이돌-12화 (12/125)

12화

그것도 예선에서 한번 마주치고 만 사이에 무슨 정이 있고 의리가 있다고? 그런데 이정우는 뭐가 이상한지 모르겠다는 듯 재경만 빤히 바라보았다. 원치 않게 눈싸움하듯 마주 보는 동안 윤하준이 끼어들어 상황을 정리해 줬다.

“태연이가 작아서 재경 씨를 올려주려고 했나 봐요. 정우에다가 재경 씨면 공을 가져올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쉽다.”

재경 씨라고 불러도 되죠? 윤하준이 자기 마음대로 부르며 이정우의 부족한 설명에 살을 붙였다. 그리고 최PD가 상황을 마무리했다.

“친해지길 바라는 마음에 준비한 첫 번째 미션이 실패로 돌아갔네요. 그럼 여기서 교복을 빼겠습니다.”

아쉬운 소리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재경은 이정우가 제 팔을 잡아당긴 것만으로 생각이 많아졌다. 대체 이정우가 제게 왜 그러는지. 그렇게 자기 싫다고 정색하던 놈이 오디션에서 만났다고 반응이 달라진 이유가 뭔지.

“이런 식이면 요정밖에 안 남겠어.”

“흠… 건후 형이 날개 달면 볼 만하겠네.”

민태연이 아까 자기 앉은키가 부족해서 안 됐다는 말을 기억하고 박건후에게 복수했다. 그래 봐야 박건후는 무시했지만.

“그러면 이 프로그램 문 닫을 수도 있어. 정우가 날개 달린 거 보고 싶어?”

대신 윤하준이 민태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 근데 잘 어울릴 거 같긴 한데… 형, 나 두려워. 내 몸에 날개가 잘 어울리면 어떡하지?”

“나도 걱정이다. 가뜩이나 너 청량한 이미지잖아.”

민태연과 윤하준의 대화에 박건후에 헛구역질을 하는 시늉을 했고 이정우는 무시했다. 그리고 귀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듣게 된 재경은 진저리를 쳤다.

정상이 없어.

“다음은… 종목을 말하기 전에 모두 꼼짝 마세요. 움직이면 안 됩니다.”

무슨 범인이나 잡을 법한 말투로 버럭 소리를 지른 최PD의 고함에 재경이 움찔했다. 원래 편집으로 긴장감 주고 하는 거 아냐? 대체 왜 이러는데.

“지금부터 할 건 단체 피구입니다.”

이건 무슨 연관성이야. 최PD가 손을 들자 스태프가 줄을 들고 달려왔다. 두 명의 스태프가 재경의 앞을 지나쳤다. 갑작스럽게 끼어든 탓에 재경이 그들과 부딪히려는 찰나 양팔과 어깨가 잡히며 뒤로 끌려갔다.

“읏.”

재경이 신음과 함께 뒤통수와 어깨가 단단한 어딘가에 둔탁하게 부딪혔다. 스태프가 재경에게 미안하다는 눈인사를 보냈다. 얼떨결에 피하게 된 재경이 자신을 도와준 인물을 보았다.

이정우. 아직도 옆에 있었니.

“고맙습니다.”

반응하기 싫지만 도와줬으니 작게 고개를 숙이고는 이정우에게서 멀어졌다.

“내가 먼저 재경이 형 잡았는데.”

“아…….”

팔을 잡고 있던 게 다른 사람이라는 걸 뒤늦게 알았다.

재경이 고개를 돌리자 민태연이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계속 시선을 보내왔다.

“고맙습니다.”

이정우에게 하던 인사 그대로 전해주니 민태연의 입가가 실룩였다.

“뭘요. 형 다치면 어떡해요. 참, 저 16살이니까 형이라고 부를게요.”

아니, 싫어. 부르지 마. 재경은 도와준 건 도와준 거고 딱히 형 동생으로 친근한 사이가 되는 건 달갑지 않았다.

“그렇게 부담 주지 마.”

재경이 설마 하는 시선으로 제 오른팔을 보았다. 민태연의 팔이 짝팔이 아닌 이상 오른팔을 잡은 손의 주인은 다른 사람이겠다. 손을 따라 시선을 들자 윤하준이 싱긋 웃었다.

나도 널 도왔지만 감사 인사는 괜찮아. 같은 웃음이었다.

차라리 스태프랑 부딪히는 게 낫지. 이게 뭐라고 세 사람이 달라붙어 도와주는 거냐고. 재경은 그만 제 몸에 붙은 손을 떼어내고 싶었다. 그래서 흐트러진 옷을 정리하는 척 팔을 떼어내고 이정우에게선 아예 한 걸음 멀어졌다. 몸에 붙어있던 다른 이의 온기가 떨어져 나가자 재경이 제 옷의 목 부분을 당겼다. 막혔던 숨이 트이고 이제야 혼자 남은 느낌이었다.

재경이 자리를 옮기자 정우가 은근슬쩍 옆으로 다가왔고 박건후가 윤하준과 민태연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만 좀 질척대라는 말이 들려 왔지만, 재경은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렸다.

얼떨결에 사람들이 갈리면서 스태프는 바닥에 줄을 고정하고 뒤로 빠졌다. 재경은 모르지만 서 있는 그대로 49명과 50명으로 갈렸단다. 한 명 더 들어간 것도 다 복불복이라며 최PD가 쾌활하게 넘겼다. 재경이 제 앞을 보았다. 정확히는 상대팀이 되어버린 윤하준, 박건후, 민태연을 보았다.

딱 제 앞에 줄이 들어오면서 서 있는 상태로 팀이 갈린 것이다. 재경이 제 옆에 있는 이정우를 힐끗 보았다.

‘이정우도 저기 갔어야 했는데.’

하필 앞에 아니라 옆에 서 있어서 이정우와 한편이었다.

“룰은 아시죠? 맞으면 밖으로 나가면 됩니다. 마지막까지 사람이 남으면 되겠죠?”

이건 무조건 한 명이 남을 테니 여기서 단체복이 결정될 거라 여겼다. 최PD가 준비할 시간도 없이 공을 던졌다. 그리고 하필 그 공이 떨어진 게 재경의 품속이었다. 저도 모르게 날아온 공을 받아든 재경이 공을 내려다보았다.

‘피구 안 해 봤는데.’

룰은 아니까 적당히 하는 척하고 뒤로 빠지면 되려나? 고개를 들자 후다닥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재경으로부터 일정 거리가 비었다. 그새 뒤로 도망친 남자들은 재경의 공에 안 맞으려고 잔뜩 긴장했다.

심지어 그렇게 주변에서 얼쩡대던 윤하준, 박건후, 민태연이 제일 열정적으로 도망갔다. 재경은 얼떨떨한 얼굴을 한 채 한 손으로 공을 쥐었다. 자기한테 거리를 벌리면 뭐하나. 빽빽하게 서 있어서 그냥 눈 감고 던져도 다 맞겠다. 누군가 하나는 맞겠지 싶은 마음에 던졌다.

“어? 나이스 패스.”

언제 저기 있었는지 같은 방을 쓰는 한찬형이 웃으며 공을 받았다. 그리고 재경에게 공 잘 받았다는 의미로 손을 흔들어줬다.

“아…….”

재경이 부끄러워서 시선을 돌리는데 같은 선 안에 있던 이소운과 눈이 마주쳤다. 왜 그랬냐는 시선에 슬그머니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려다…… 입술을 깨물고 있는 이정우를 보고 인상을 구겼다.

‘비웃고 있어.’

“생긴 건 한 번에 두셋은 잡게 생겨서는…….”

누가 중얼거렸는지 모를 말까지. 재경은 공격권이 넘어간 걸 보고 반쯤 포기했다. 제가 넘겼으니 공에 맞아 희생하면 다시 공이 이 팀에게 올 것이다.

‘맞고 나가자.’

재경이 슬쩍 한 걸음 다가오는 걸 눈치챈 한찬형이 공을 들었다. 가장 앞에 있어서 정확하게 맞출 수 있을 확신이 들기에 한찬형이 미안하다고 중얼거리며 공을 던졌다. 재경은 그 공을 피할 마음도 없이 살짝 상체만 틀었다. 그래도 등쪽에 맞는게 덜 아프겠지란 얄팍한 생각이었다. 그런데 누군가의 끼어드나 싶더니 날아온 공을 잡아챘다.

‘아 진짜.’

얘는 대체 왜 이러지. 이정우가 공을 잡아 자기도 못 죽고 숨지도 못하고 좋은 게 하나도 없었다. 공을 한 손에 쥐는데 쉽게 쥔다. 가볍게 팔을 흔드는 것 같은데 매섭게 날아간 공이 한 연습생의 몸에 박혔다. 굳이 앞에 있지 말라고 말해기도 싫어서 재경은 슬금슬금 무리에 편승해 움직였다. 다만 이후로 몇 번 공이 날아올 때마다 이정우가 앞을 막았다.

‘대체 뭐냐고.’

공을 받고 싶어서 오는 건지 뭐 말을 해야 알지. 박건후가 지켜보다 한마디 던졌다.

“이거 보디 가드 피구야?”

*  *  *

99명을 아웃시켜야 하는 피구가 점점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재경은 같은 팀에서 맞고 튕겨 나간 공에 허벅지를 맞아서 아웃되었다. 이정우에게서 벗어나니 재경은 한결 편한 마음으로 피구를 관람할 수 있었다. 실은 자신이 선 안에 들어가 있을 때는 무슨 피구지? 왜 하필 피구를 한 거지? 굳이 피구를 할 필요가 있었나? 하는 의문이 끝도 없었지만 지금은…….

“재밌네.”

공 하나에 열정적으로 달려드는 모습을 보니 재밌긴 재밌었다. 몸이 날렵한 사람도 있고 작은 동작만으로 공을 피하는 걸 보면 감탄이 나오기도 했다. 이래서 뭐든 운동은 하는 맛과 보는 맛이 있다는 걸 알겠다.

마지막까지 남은 건 윤하준과 이정우였다. 윤하준은 큰 키로 상대팀에서 패스하는 공을 잘 가져왔고 이정우는 그냥 몇 번 몸을 트는 것으로 공을 피하니 둘만 남았다.

윤하준이 공을 던졌다 받으며 이정우에게 너도 그렇지? 물었다. 하지만 이정우는 딱히 적극적이지 않은 태도로 있는데도 공은 다른 쪽을 돌고 돌았다. 윤하준이 던진 공을 이정우가 받지 못하고 맞았는데 윤하준이 자신의 승리라고 기뻐하려던 찰나 최PD가 “윤하준 아웃!”을 외쳐 버렸다.

윤하준이 왜 그러냔 시선으로 최PD를 보니 그가 손을 저었다.

“금 밟았습니다.”

어이없이 벌어진 실패에 윤하준과 이정우가 멍하니 서 있었고 재경 역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금을 밟기 전에 이정우를 맞췄다면 윤하준이 이기는 거고 그게 아니면 이정우가 이기는 건데 누구지?

“이건 카메라 판독… 을 해야 하지만 지금 그럴 사정이 안 되는 관계로 제 눈이 본대로 판단하겠습니다.”

사기꾼같아.

“금을 밟는 것과 공이 맞는 게 동시에 일어났으니 다음 게임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최PD의 뻔뻔한 대답에 재경은 확신했다. 분명 둘 중 누구든 승자는 있었을 거라고. 그러나 다음 게임을 위해서 은근슬쩍 넘어가는 것 같지만 아무도 불만을 내지 않았다.

“판독할 수 없는 조건이라면 옷을 빼진 말아 주세요.”

이정우는 원래 상관없다는 듯 굴고 윤하준은 그냥 이 상황이 재밌어 보였다. 대신 윤하준은 확실히 자신의 이득을 챙기겠다는 일념으로 최PD에게 거래를 시도했다. 최PD가 좋다고 하자 윤하준이 별말없이 넘어갔다. 다른 연습생들도 1등을 가르는 것보다 다음 게임으로 넘어갈 기대에 차 있었다.

그 다음은 무난한 줄넘기를 했다. 재경은 가장 마지막에 들어갈 생각으로 가만히 있었는데 앞에서 걸린 사람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들어가서 20번을 뛰면 되는데 혹여 누군가 들어가면 다시 처음부터 카운트된다는 조건이 따라붙었다.

걸리고 떨어지고 걸리고 떨어지고. 그냥 돌아가는 줄넘기 안에서 들어갈 타이밍조차 찾지 못한 재경은 멍하니 바라보는 게 고작이었다.

“안 들어가요?”

이정우의 질문에 재경은 고개를 저었다.

“못 들어가요.”

“줄넘기가 바닥을 치고 넘어갈 때 들어가서 넘을 준비를 하면 돼요.”

되게 쉽게 설명해주는 이정우 덕에 재경이 알아들었다는 의미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들어가진 않았다.

재경이 잠시 줄이 넘어가는 걸 보다가 이정우를 돌아보았다.

“이상하게 제 옆에서 맴도는 거 같은데 착각일까요?”

이정우 역시 줄이 넘어가던 걸 보다 재경에게 시선을 돌렸다.

“착각 아닌데요.”

“그럼 왜 그러는데요?”

“같이 있고 싶어서요.”

“왜요?”

재경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보았다. 그러자 그 대답을 생각이라도 하듯 이정우가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빠졌다.

“지금.”

“네?”

“지금 들어가요.”

이정우가 등을 밀어 버리는 바람에 재경이 얼떨결에 줄넘기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금세 중심을 잡고 뛰면서 재경은 당황한 눈으로 앞을 보았다.

나 지금 뛰고 있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