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아까 왔던 장소로 오면서 재경은 더욱 눈에 안 띌 만한 구석으로 왔다. 카메라에 온전히 다 드러나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사각지대가 있었다. 단의 중간 끝부분.
앞 사람에게 가려지기도 하지만 양쪽에 선 카메라에는 아예 비치지 않거나 멀리 있는 위치. 가운데에 위치한 카메라로도 잘려서 담길만한 위치였다. 물론 직접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찍는 사람마저 피할 순 없었다. 그래도 재경은 그들이 자신을 찍겠다고 꾸역꾸역 올까 싶어 마음이 편했다.
재경이 앉고 나니 뒤따라오던 찬형이 중간에 멈춰 섰다. 같이 앉으려고 했다가 자리를 보고 놀라더니 이내 난감한 눈으로 다른 사람끼리 신호를 주고받았다. 재경은 그런 찬형을 무시하고 앞을 바라보았다.
같은 방을 쓴다고 뭉쳐 다녀야 할 의무도 없으니 이왕이면 떨어졌으면 좋겠다. 찬형은 룸메이트와 다른 자리로 갔다. 한 번이라도 카메라에 비치는 게 좋으니 찬형 등의 결정이 만족스러워 재경은 마음 편히 벽에 등을 기댔다.
‘전상국이라니…….’
이정우는 댈 것도 아니었다. 전상국은 화이트 소속사에서 만난 연습생이었으니까. 그리고 재경이 그 소속사에서 나온 원인이기도 했다. 자신에게 온갖 소문을 뒤집어씌우던 연습생. 그게 질투로 비롯되었다 할지라도 악질적으로 괴롭히던 상대였다. 오디션에 참가하면서 아는 얼굴이 있겠단 생각은 했다. 하지만 그게 전상국이라는 것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괜히 전상국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아 재경이 고개를 저었다.
‘안 마주치면 돼.’
여기서 서로 아는 척해봐야 좋을 것 없으니까. 전상국도 자신을 보고 웃기만 할 뿐 다가오지 않았다. 재경이 허리를 굽히고 허벅지에 팔꿈치를 올렸다. 그리고 손등에 턱을 괴다가 옆에 다가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키가 커서 한참을 올려다봐야 할 인물이 성큼 다가와 재경의 옆에 앉았다. 그제야 제대로 얼굴이 보이면서 재경이 인상을 찌푸렸다.
‘왜 여기 앉은 거야?’
재경이 그를 휙 노려봤다가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이정우에겐 그저 빈자리에 앉는 것뿐일 수도 있으니 굳이 감정을 드러내서 인연을 맺을 필요는 없었다.
‘불편해.’
그래도 싫은 건 싫었다. 재경이 굽혔던 상체를 일으키며 벽 쪽으로 엉덩이를 밀어 넣었다. 최대한 떨어지고 싶지만 찔끔 움직였는데도 바로 벽이 닿았다.
피할 곳도 없고 이정우는 싫고 재경은 잔뜩 구겨진 티에 새로운 주름을 만들어내며 울컥한 마음을 다스렸다.
‘카메라에만 안 잡히면 돼. 카메라에만.’
이정우에게 쏠릴 카메라에 어떻게든 피할 생각으로 재경은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이정우가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지더니 곧 한사람을 위한 환호성이 울렸다.
“잘 쉬었나 보네요. 하긴 숙소가 좀 괜찮죠?”
최PD의 말에 다시 한번 환호성이 울렸다. 대부분 만족스러워하는 분위기를 인지하고 그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별 다섯 개짜리 호텔을 첫 숙소로 하게 되어 저도 아주 기쁩니다. 이건 대외적인 비밀인데 장소가 섭외된 날 우리 제작진이 축하파티를 열었다니까요.”
최PD의 능청스럽고도 재간이 잔뜩 들어간 진행에 웃음소리가 퍼져나갔다.
“장난은 이쯤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여러분을 부른 이유는 두 가지예요.”
재경은 옆자리에 앉은 정우가 신경 쓰였지만 최대한 그에게 고개를 돌리지 않으려 최PD에게만 집중했다.
“첫번째는 가장 중요한… 아주 중요한…….”
말을 끄는 최PD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저 남자가 말하려는 건.
“노래.”
“노래입니다.”
재경은 맞혔다는 보람도 느끼지 않은 채 최PD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구구절절 말해봐야 한번 듣는 것만 못하겠죠? 노래 틀어주세요.”
최PD의 신호에 맞춰 불이 꺼지고 화면이 하얗게 변했다. 잠깐의 정적 후, 화면에 반짝 화려한 색감의 영상과 함께 제목이 떠올랐다.
choose a boy
매일 너와 만날 시간을 기다렸어.
거울로 둘러싼 감옥에서 날 구해줘.
날 구해줄 수 있는 건 너뿐이야.
내 손을 잡아줘.
내게 네 마음을 줄래
나만이 너의 boy야.
내 이름을 불러줘.
첫 시작부터 바로 훅이 들어왔다.
‘어? 이거 알겠다.’
예전에 길거리에서 자주 흘러나왔던 노래라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바로 알아들었다. 재경은 길거리에서 자주 흘러나왔던 노래라 허밍으로 따라불렀다.
‘쉽네.’
자신을 뽑아달라는 적나라한 가사와 대중적인 멜로디, 중독성 훅으로 빈틈없이 짜였다.
한 번만 들어도 알 수 있게 단순하면서도 떼창하기 좋은 구절과 가창력이 돋보일 구간이 적절하게 들어갔다.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 프로그램이 들어서는데 어떻게 성공했을지 싶은 의심이 있었다. 이정우가 아무리 인기가 많다고 해도 프로그램을 보는 이가 있어서 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기도 하니까. 그러나 의외로 보면 볼수록 세심하게 신경 쓴 부분이 드러났다.
대중적이고 괜찮은 노래를 뽑아오고 계획에 빈틈이 없다. 거기다 연습생의 의욕마저 부추기는 기획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숙소 선정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잘 씻지 못해 꼬질꼬질하던 최PD가 새삼 대단해 보였다.
다시 돌아오는 훅에 재경이 자연스럽게 입술만 벙긋거리며 따라불렀다가 노래가 끝나자 바로 입을 다물었다.
노래를 따라부를 때 시선이 느껴졌는데 이정우는 아니겠지, 억지스러운 합리화를 마친 상태였다. 재경은 다시 아까의 자세를 만들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등을 둥글게 말았더니 시야에 걸리던 이정우가 안 보였다.
‘괜찮네.’
이왕이면 카메라까지 피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최PD를 보았다.
“노래 어때요?”
“좋아요.”
“최고예요!”
신난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최PD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두 번째는 더 중요한 겁니다. 노래보다 더 중요할 수 있어요. 네…….”
다시 긴장하게끔 조여드는 분위기에 재경은 흥미롭게 관전했다.
“노래야 한 번하면 끝이지만 두 번째는 아닙니다. 그래서 더 중요할 수 있죠. 바로 단체복입니다. 단체복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많죠? 교복도 있고 정장도 괜찮고… 워낙 출중해서 어떤 옷을 입어도 다 잘 소화할 것 같아서 말이죠.”
재경은 질질 말을 끄는 최PD의 어투에 작은 불안감이 슬금슬금 찾아왔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단체복을 결정하려고 합니다.”
‘뭐?’
99명이나 되는 옷을 미리 준비하지 않고 지금 정한다니?
“그렇다고 아예 우리의 생각을 벗어난 옷을 준비하기엔 수급에 문제가 있으니 몇 가지 후보를 추렸습니다.”
최PD의 말이 꺼내기 무섭게 빔으로 쏜 화면 위로 7개의 사진이 떠올랐다.
“이 안에서 하나를 선택하려고 합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는지 의심될 정도로 연습생의 눈이 전부 화면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재경은 그들과 다르게 크게 관심 없다는 듯한 시선으로 보았다. 그래 봐야 보는 건 같지만.
‘교복, 정장, 가디건… 저건 뭐야?’
판다복과 한 벌로 이뤄진 청색 정비공(아니 왜 이너 티가 없지?) 잠옷, 그리고…….
‘요정이야?’
재경이 기함해서 벌어진 제 입을 막았다.
“악! 요정 뭔데.”
누군가가 비명처럼 지르는 말에 모두가 공감했다. 99명 단체로 판다 복장을 상상해보니 이건 무슨 어디 동물원 콘셉트도 아니고 정말 별로였다. 심지어 사진에 판다복을 입은 남자의 얼굴에 하얀 칠과 검은 눈까지 꼼꼼한 분장이 곁들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 판다복마저도 괜찮다고 생각될 정도로 날개 달린 요정옷이 극악스러웠다. 등에 잠자리 날개를 다는 거야 그렇다치지만 핑크 시스루 비슷한 옷에 반짝이 반바지는 재경의 불안감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잠옷은 좀 괜찮은 거 같기도.’
옷이 얇긴 하지만 잘 때 안 갈아입어도 되니 편하지 않을까 하는 싱거운 생각을 했다.
“잠옷 입고 싶어?”
문득 옆에서 들려온 질문에 재경이 깜짝 놀랐다. 그러다 제게 말을 건 존재를 향해 굳은 목을 억지로 돌렸다. 얘는 왜 말을 걸고 난리야.
“계속 잠옷을 보길래.”
“…저…….”
“왜?”
“우리 말 놓을 정도로 친한 사이 아닌데.”
재경은 계속 자신을 보고 있었던 듯 구는 이정우에게 거리를 벌렸다. 당장 자기가 잠옷을 괜찮다고 본 걸 알았다고 의식할 것도 없었다. 그것보단 반말이 거슬렸다. 19살엔 모르는 사이였고 22살엔 데면데면했고 25살까지 안 친했던 상대가 다가오는 게 싫었다.
“죄송하지만 제가 낯을 많이 가려요. 나중에 편해지면 말 놓기로 해요.”
이정우의 반듯한 눈썹이 슬쩍 올라가는 걸 봤지만 재경은 다시 화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친해지지 말고 말 놓지 말자.’
같이 활동하면서 받았던 찬밥신세 대접에 조금이나마 복수한 것 같아 재경의 기분이 좋아졌다.
“미션을 성공한 사람은 1분 추가와 함께 단체복을 선정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집니다.”
“아…….”
한 사람이 정하는 거구나. 재경의 감상은 거기까지였다. 그 한 사람이 자기가 될 리는 없단 확신에 더 관심이 가지 않았으니까.
“참, 이건 개인전이기도 하고 단체전이기도 합니다.”
최PD는 음흉스럽게 웃었다.
“서로 견제하느라 전부 실패하면 저 선택에서 하나가 빠질 겁니다. 그러니까 마지막까지 1등이 정해지지 않으면 여러분이 입게 될 단체복은 아마…….”
재경이 침을 꼴깍 삼키며 화면을 향해 고개 들었다.
“판다복?”
“아아…….”
재경이 질색하는 얼굴로 제 팔을 쓰다듬었다. 진짜 싫어.
“그럼 시작해 볼까요?”
최PD의 미소가 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