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지금 기분이 어때요?”
고개를 들어 층수를 확인하던 재경이 카메라맨의 물음에 생각하는 척 고개를 숙였다.
“제가 여기 있는 게 실감나지 않아요.”
직접 서류도 내고 노래도 부르고 엄마한테 개겨서 오기도 했지만 전부 재경이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라 이 상황이 실감이 안 났다. 아직도 재경은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곰팡이 핀 천장에 마음이 놓였다. 내가 진짜 시간이 돌아왔구나. 그리고 이 오디션 프로에 참가하는구나.
“룸메이트가 되었으면 하는 연습생 있으세요?”
“어…….”
재경이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최종 데뷔까지 하는 JT엔터 4명은 피했으면 합니다.
“아니요. 아는 사람이 없어서요.”
그러나 솔직히 말할 수 없으니 적당히 둘러댔다. 재경은 이 오디션 프로그램이 잘 되고 난 후에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말만 들었지 따로 찾아본 적이 없었다. 애초 한편이라도 봤다면 도움이 됐겠지만 전생의 자신이 그런 안배를 하지 않았다.
전자음과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재경은 카메라맨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도 랜덤공을 뽑고 있는 다른 연습생을 찍으러 가야할테니 자신과는 여기서 헤어진다고 여겼다.
카메라맨이 떠나지 않고 그 자리에 있는 걸 보고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길 기다리느라 1초가 1분 같았다. 그렇다고 닫힘 버튼을 누르자니 빨리 가고 싶어하는 것 같아 참아보려니 자기도 모르게 자꾸 손가락이 꼼지락거렸다. 문이 닫힌단 안내 멘트가 들리자 재경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숙소에 가면 침대에 누워 쉬어야겠… 다?
카메라맨이 함께 엘리베이터에 동승하자 재경이 속쌍꺼풀이 진 눈이 빠르게 깜박였다. 가서 다른 연습생을 찍어야 하지 않냐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대놓고 카메라를 피하는 것 같아 재경이 머뭇거렸다.
“카메라는 자유롭게 돌아다녀야 하는 법이죠.”
“아… 네.”
그런 법이 어딨어. 재경은 목까지 올라온 말을 내뱉지 못하고 억지로 삼켜야 했다. 오늘 처음 봤는데 이렇게 오래 대화하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숙소까지 같이 가요?”
“원하신다면.”
원하지 않아.
재경은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짜증 나는 기분을 삼켰다. 결국 카메라맨은 방앞까지 따라왔다 가 버렸다. 그 짧은 이동시간조차 제 마음대로 있지 못했다는 것에 재경은 다시금 여기가 어딘지 실감했다. 여긴 언제 어디서 카메라가 돌지 모르는 합숙소다.
“또 만나요.”
카메라맨의 말에 재경이 가볍게 인사하고는 방에 들어왔다. 문이 닫히며 카메라로부터 벗어나자 재경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이 방에도 카메라가 있을지 모르니 최대한 기척을 지운 상태로 먼저 온 사람이 있나 싶어 가볍게 훑어봤다.
자신이 처음인지 안쪽에서는 다른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가지런히 놓인 침대와 작지만 아늑한 응접실, 쾌적하게 유지되고 있는 화장실까지 대충 둘러본 재경은 더 볼 것도 없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가는 길에 대리석 테이블과 주방을 스치듯 보았지만 따로 해먹을 것도 아니니 금방 관심을 껐다. 1인용 침대 두 개와 2인용 침대 하나.
먼저 차지한 게 임자겠지? 재경은 제 마음에 쏙 드는 1인용 침대로 다가갔다. 엉덩이를 내리고 앉으니 피곤이 소나기처럼 몸을 적셔왔다.
한동안 지내게 될 숙소를 돌아보며 재경의 기분이 점점 아래로 가라앉아갔다. 자신이 여기에 참여하면서 운명이 달라졌을 누군가는 지금쯤 뭘하고 있을까. 오디션에 떨어져서 우울해하고 있겠지. 자신이 참여하지 않았다면 그 연습생이 들어왔을텐데. 아무리 사기를 피하려는 이유가 있다지만 그를 밀어낼 자격이 있는 건 아니었다.
‘아니.’
재경이 생각을 떨쳐내려 머리를 흔들었다. 이기적이지만 다른 사람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재경은 이 오디션으로 들어올 것이다.
‘차라리 자자.’
조금 있으면 다른 사람이 들어올텐데 재경은 그들을 기다릴 여유도 없이 침대에 몸을 뉘었다. 푹신한 매트리스가 몸을 빨아들이지만 딱딱한 바닥이 느껴지는 집의 이불 속이 더 그리워졌다.
* * *
“…라는데?”
“…언제…….”
대화 소리가 들려와 잠에서 깼다.
“아, 너무 곤히 자는데?”
“그렇다고 두고 갈 순 없잖아.”
“와, 피부 봐. 메이크업 안 한 거 같은데 되게 깨끗해. 모공도 없어.”
“야 손 내려. 깨기라도 하면 어떡해.”
“…깨워야 한다며.”
“아 맞아.”
뭔가 어디 모자란 듯한 대화에 재경이 살풋 미간을 찌푸렸다. 깨워야 된다는 게 자기인지 확실할 수 없지만 일어나야 할 시간인 듯했다. 재경이 아직도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빛에 반사된 동그란 구체가 얼핏 보였다.
‘사람 머리통이네.’
구체의 정체를 파악한 재경이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소란이 더욱 커졌다.
“저기…….”
앞에 서 있는 세 명의 남자가 눈에 들어오자 재경은 자신을 깨우려던 게 맞구나 라고만 생각했다.
“내려오라는데요.”
“네.”
그래도 같은 룸을 쓴다고 버리고 가기 미안했나 보다. 재경은 멋쩍은 듯 눌린 뒷머리를 대충 손으로 털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모자를 써야겠단 생각에 가방을 뒤적이는데 무시할 수 없는 시선이 느껴졌다. 모자를 꺼낸 재경이 허리를 편 김에 고개를 들자 다시 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뭐지.’
깨워 줘서 고맙긴 한데 아직도 안 가고 앞을 서성이는 게 이상해서 물었다.
“왜요?”
“어… 저는 한찬형이라고 해요. 얘는 김이준이고 옆에 작은 애는 이소운이요.”
전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어느 소속인지 누가 아는 사이인지 모른 채 재경은 모자를 눌러쓰며 말했다.
“서재경이라고 합니다.”
“그, 같이 가실래요?”
왜 가지 않고 통성명을 했나 싶더니 결국 동행하자는 제안이 돌아왔다. 재경은 솔직히 같이 가고 싶지 않아 거절하려다 중간에 생각을 바꿨다. 아까 혼자 다니는 바람에 카메라를 두고 누군가의 뒤에 설 수 없었던 생각이 미친 것이다.
“네.”
그나마 JT엔터 연습생이 없다는 게 다행이라며 그들의 옆에 섰다.
“생각보다 키가 크시네요. 몇이세요?”
한찬형이 작은 애라 소개했던 이소운이었다.
“어… 18… 1이었던 거 같아요.”
데뷔하기 전 프로필에 넣었던 건데 19살인 지금도 얼추 비슷하겠지?
이소운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부럽다, 말을 흐리는 걸 못 들은 척했다. 대신 이소운의 부드러운 갈색 머리통을 보았다. 전체적으로 선이 가늘고 여린 이미지였다.
재경 역시 남자답게 생긴 건 아니지만 그래도 소운처럼 소년의 느낌이 강하진 않았다. 키도 170을 겨우 넘은 정도인 듯 자기보다 한 뼘이 작았다.
“저는 보컬이에요. 서재경 님… 재경 씨… 재경 연습생… 어, 그러니까… 님은요?”
뭐라고 부를지 몰라 고민하는 이소운의 옆으로 한찬형이 다가와 재경이 형. 이라고 하나를 정정해줬다.
“소운이가 17살이거든요. 혹시 그보다 어리세요?”
“…아니요.”
재경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찬형은 가만히 기다렸다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더니 제 나이는 19살이라고 말했다. 소운의 나이를 언급할 때 서로 간의 나이까지 다 밝혀야 하는 분위기였나보다. 재경은 저도 19살이라고 하고는 문고리를 잡았다. 이대로 있다간 서서 대화를 나누게 될 거란 불안에 빠르게 문을 잡아당겨 밖으로 나갔다.
“우리 어디로 가면…….”
재경이 물어보는 와중에 8호실의 문도 열리더니 안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어디선가 본 얼굴이었다. 다만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남자의 유난히 길게 빠진 눈매와 얇은 입술이 눈에 익었다. 재경의 기억은 25살의 언저리에 멈춰있었다. 그래서 남자가 누군지 헤집어보려면 꽤 깊게 파고들어야 했다.
“…어?”
재경이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내면서 주변 사람들이 그를 돌아봤다. 그 남자 역시 재경을 보았다. 시선이 마주쳤을 때 먼저 피한 건 재경이었다.
‘웃었어.’
남자 역시 재경을 아는 듯 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어디서 봤는지 답답한 마음에 시선을 돌리던 재경은 다른 낯익은 얼굴 두 명을 더 발견했다.
‘이정우, 그리고 윤하준.’
옆 호실이구나.
“정우야. 뭐해?”
재경이 아는 다른 한 사람, 윤하준이 이정우를 불렀다. 그 김에 이정우의 어깨에 손을 올렸지만 반응이 없는 무뚝뚝한 놈 대신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세요.”
윤하준의 부드러운 인상과 듣기 좋은 목소리가 7호실의 사람들 사이로 흘러들어왔다.
“안녕하세요. 한찬형이라고 합니다.”
찬형이 먼저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아까처럼 다른 이의 이름을 말해줬다. 물론 가만히 있는 재경의 이름도 말이다. 재경은 그들 사이에서 적당히 인사가 끝나면 다시 따라갈 생각으로 조용히 있었다. 윤하준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구석진 곳으로 빠져 벽만 바라보았다.
‘이정우랑 눈 마주쳤어.’
벌써 두 번째였다.
영 달갑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이, 아까 ‘누구였지?’ 했던 남자의 입이 열렸다.
“전상국입니다.”
재경의 고개가 휙 돌아가며 전상국이라고 소개한 사람을 보았다. 아까 본 그 길쭉한 눈매의 남자, 재경은 이름을 듣고서야 그가 누군지 알았다.
제길.
비명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올 뻔했다. 이정우도 모자라 전상국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