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반주가 끝나자 재경이 슬쩍 마이크를 내렸다. 처음에 잔잔하게 이어가다 후렴구에서 터질 듯이 음정을 올려 부르는 노래를 중간에 고음부터 내지르듯 시작한 것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다. 그 와중에 스케치북을 든 사람을 봤지만 그만하라는 신호가 없어 끝까지 다 불렀다.
얼추 3분 가까이 노래를 불렀더니 조금 목이 풀린 것도 같았다. 생각해보면 시간이 돌아오고 나서 오디션이 아니면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목을 푸는 행위도 없이 고음부터 질렀다는 게 어이없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가수 할 것도 아닌데.
재경이 시선을 들어 심사위원을 보았다. 저번처럼 모자로 얼굴을 가린 것도 아니라 훤히 앞이 보여서 그런지 자신을 향한 반응이 심사위원을 보는 시야에 걸려왔다.
연습생들은 저마다 속삭이거나 입을 다물고 있었고 스태프는 노래가 끝나고부터 다급하게 움직였다. 재경이 이제 어떡하나 심사위원을 보니 그들도 연습생처럼 저들끼리 속삭이기만 했다.
‘역시 별로였구나.’
다음 연습생이 부를 준비로 바빠 누구도 재경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이대로 가만히 있기도 민망한 재경이 눈치를 보다 허리 숙여 인사하고 무대 뒤로 갔다.
‘난 뭘 기대한 거야.’
그렇게 오래 연습생 생활을 했는데 심사위원 단 한 명의 마음에도 들지 못했다. 그저 고음을 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 노래를 택한 게 창피해서 재경은 가방을 들고 잰걸음으로 연습생이 있는 곳으로 갔다. 남은 자리가 거의 없어 통로 쪽에 빈 한자리에 가서 앉았다. 지금만큼은 캐리어가 없는 게 아쉬웠다.
캐리어 뒤에 숨고 싶은데, 제겐 쿠션처럼 끌어안는 게 고작인 가방뿐이었다. 재경은 심사평 하나 받지 못한 실력으로 여기 뻔뻔하게 앉아있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첫 번째였으면 좋았을 텐데.’
다른 연습생이 돌아보는 시선이 느껴져 얼굴이 달아오르려는 것도 참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앞만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나온 연습생도 재경과 비슷한 반응이었다. 인사를 건네고 아무 말이 들려오지 않으니 당황했다가 스케치북을 보고 마이크를 내려놓더니 자세를 잡았다. 아마 심사위원에게 보여줄 게 춤이었는지 곧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잘 추네.’
재경도 춤을 연습했기에 앞의 남자가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는지 보였다. 노래가 끝나고 남자의 얼굴에 땀이 흐르는데 심사위원은 또 저마다 속닥일 뿐 누구도 말을 건네지 않았다.
‘잘 췄는데…….’
재경은 남자를 안타깝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다 자기도 같은 경우라는 걸 깨닫고 동정하던 걸 관뒀다. 연습생의 무대가 모두 끝났는지 심사위원들이 분분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들이 스태프의 안내를 받으며 밖으로 나가자 재경이 긴 숨을 내쉬었다.
‘긴장돼.’
떨어질 각오로 왔는데 숨 쉬는 것만큼 긴장이 자주 찾아와서 문제였다.
“집중해주세요.”
헤드셋을 끼고 있던 남자가 무대 위로 올라오면서 재경은 다시 긴장을 삼켰다.
“최원후입니다. 최PD로 불러주세요.”
남자가 헤드셋을 목에 걸며 연습생을 향해 가볍게 인사했다. 연습생들이 환호를 지르며 그를 반겼다.
“남자들의 환호도 나쁘지 않네요.”
능청스럽게 상황을 정리한 최PD가 소란이 가라앉도록 열심히 팔을 흔들었다.
“우선 호텔로 불러서 놀라셨죠?”
“네.”
“그럼 더 놀라셔도 됩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한 달 동안 이 호텔에서 머물게 될 것입니다.”
“와아!”
“호텔!”
“좋아요.”
“호캉스.”
호텔에서 한 달 동안 머물게 되니 좋아하는 게 아이들처럼 순수해 보였다.
“물론 방송 전까지 우리의 모든 게 외부로 새어 나가지 않아야 하니 여러분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장소가 정해질 것입니다. 심지어 엘리베이터까지 정해진 것만 탈 수 있습니다.”
“와아…….”
조금 작아진 환호성에 재경이 미소지었다. 최PD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연습생들이 가감 없이 드러내는 반응이 재밌었다. 가만히 듣고 있는데도 지루하지 않았다. 연습생 쪽으로 돌린 카메라가 사방을 돌고 있어 재경이 빨리 표정을 수습하고 최PD를 보았다.
‘어?’
방금 최PD와 눈이 마주친 거 같은데 너무 순식간이라 확신할 수 없었다. 곧 착각이겠거니 하고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집중했다.
“우선 오늘 심사 결과는 나오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여러분의 실력을 평가해서 점수를 매기면 기운 빠지잖아요. 그래서 심사 결과는 방송을 통해 나올 것입니다.”
“아…….”
그제야 재경은 왜 아무 말도 못 들었는지 알았다. 아까 중간에 잠들지만 않았어도 이런 내용을 미리 알았을 텐데 재경이 저 혼자 기가 막혀 마른 얼굴을 쓰다듬었다.
연습생들의 환호성이 다시 커지기 직전 최PD가 손을 들었다.
“우리는 여러분을 프로그램의 희생양으로 소모하지 않을 겁니다. 물론 탈락은 있겠지만 99명의 아이돌 군단을 만들 순 없으니 기본 포맷은 이해해 주시고요.”
그의 말에 여기저기서 ‘괜찮아요!’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좋아요, 씩씩하네요. 그래도 한 사람당 최소 3주는 방송에 타니까 한 달간 기죽지 말고 여러분의 끼를 보여 주세요. 여기서 찍은 내용은 여러분이 숙소를 나간 그 주에 첫 방송을 탈 거고 그 전 음악방송을 통해 무대에 오를 것입니다. 단체곡이고 99명이 있으니 누구에게 카메라가 돌아갈지 모른다는 거 꼭 기억하세요.”
최PD의 말이 길어질수록 긴장된 분위기가 점점 짙어져 갔다. 재경 역시 한 달만 버틴단 생각으로 왔지만 최PD의 말투에 자꾸만 끌려가고 있었다.
“한 달 동안 배울 곡은 단체곡 하나뿐입니다. 대신 미션으로 풍성하게 살을 붙여보려고 하는데 여기까지 질문 있으신 분?”
최PD가 다들 이해했냐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누군가 손을 들었다. 재경은 너무도 먼 곳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얼굴을 확인할 마음 없이 그냥 가만히 있었다.
“한 곡을 연습하는데 한 달까지 필요한 겁니까?”
“음…… 처음이라 여유롭게 일정을 잡았습니다. 아무리 여러분이 연습생이어도 각자의 사정이 다르고 연습 기간이 다를테니까요. 단체곡 하나지만 보컬과 안무 레슨이 들어갈 겁니다. 전문적인 수업이 될거니까 이 기회를 어떻게 이용하느냐는 각자에 달렸겠죠?”
재경이 바로 최PD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기획사가 작은 곳에서는 보컬 레슨 하나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는 곳이 허다했다. 재경 역시 작은 소속사에서 기본적인 케어받지 못한 채 몇 개월 동안 방치된 적도 있었다.
“자, 여기까지가 기본 전달사항이고 이제부터 진짜 중요한 말을 할 겁니다.”
최PD가 분위기를 잡자 연습생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그만 바라보았다.
“그렇게 뚫어져라 보니 부끄럽네요. 흠흠. 그보다 심사 결과가 방송을 통해 나올 겁니다.”
재경마저도 최PD의 말에 빠져들었다.
“방송은 120분으로 편성됐고요. 1화와 2화에 여러분을 소개하는 시간과 심사내용이 들어가겠네요.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중요한 건 그 외에 편성될 시간이겠죠? 99명 모두에게 주어지는 1분의 기본 PR시간과 심사 무대 외 남은 시간은 미션을 통해 여러분이 가져가야 합니다. 얼굴도장 찍는다 생각하면 되겠죠?”
남은 시간. 방송에 오래 나올수록 유리한 경쟁을 이용한 미션이었다.
“국민투표는 방송이 시작될 때부터 홈페이지로 받을 거고 미션을 통해 연습생 개인에게 주어진 시간만큼 철저하게 계산해서 나갈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최선을 다해서 미션을 수행해주세요.”
재경은 최PD의 말이 다르게 들려왔다.
‘최선을 다하지 마세요.’
* * *
투명한 통 안에 공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랜덤으로 공을 뽑아서 방을 정하게 된다며 와서 하나씩 뽑아가라는 안내에 재경은 느지막이 움직여 줄의 가장 끝에 가서 섰다. 이것도 통 앞에 카메라가 고정되어 있어 줄을 서서 뽑아야 한단다.
‘뭐든 다 99명을 기다리는 식이면 시간이 걸리겠네.’
매번 기다리면 지루할 거 같은데? 물론 생각과 다르게 재경은 눈에 띄지 않으려 조용히 움직였다. 제 차례에선 공을 굴리거나 고민하는 다른 연습생과 다르게 속전속결로 하나를 꺼냈다. 바로 공을 반으로 갈라 안에 있는 종이를 꺼내 스태프에게 보여줬다.
스태프는 재경의 빠른 반응에 얼떨떨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13층 7호실입니다.”
재경이 그의 말을 몇 번 입안에 굴려 기억하며 앞으로 걸어갔다. 다시 부를 때까지 숙소에 가서 쉬고 있으라고 하니 미련 없이 자리를 벗어났다. 사방이 카메라인 곳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걸음을 빨리하니 재경을 찍으려고 다가왔던 카메라가 살짝 흔들리더니 더 빠른 속도로 앞질러 재경을 찍었다.
재경은 대놓고 제 얼굴을 찍겠다고 들이민 카메라에 움찔하다 곧 엘리베이터의 위치를 확인하는 척 고개를 돌렸다.
찍히고 싶지 않아.
찍히고 싶지 않다.
절대적으로 찍히고 싶지 않아.
한 달간 숙소 생활을 하고 조용히 탈락하는 게 목표니까 카메라에 찍히고 싶지 않았다. 재경은 가방끈을 대충 왼손에 말아서 든 채 상층으로 올라가는 버튼을 눌렀다. 그때 카메라를 든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