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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아이돌-7화 (7/125)

7화

재경이 이름표를 받아들었다. 그때와 다르게 조금 더 두꺼운 스티커지로 만든 게 느껴졌다. 30번. 재경의 이름 아래 적힌 번호였다.

“기억하기 쉽게 번호는 붙겠지만 이름으로 불릴 거예요.”

짐도 풀기 전에 바로 심사부터 받다니. 뭐하나 예측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 프로그램을 봤어야 했는데.

“뭐 준비해 오셨어요?”

“노래요.”

“그렇구나. 그런데 재경 씨는 다른 연습생이랑 다르네요.”

“제가요?”

“네.”

어떤 부분인지 알 수 없어 가만히 있으니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모르겠어요?”

“네. 혹시 제가 뭘 잘못했나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 음… 아, 저 뒤에 보실래요?”

여자가 재경의 뒤를 가리켰다.

재경이 순순히 고개를 돌리자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 무리가 들어왔다.

“우와.”

“진짜 좋다.”

“호텔… 와 나 호텔 처음 와봐.“

한 무리의 남자들이 들어오면서 바쁘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어딘가를 볼 때는 옆의 사람 옆구리를 찌르며 감탄하고 다른 곳을 볼 때는 가까이 가서 구경하느라 정작 목적이 뭔지 헷갈릴 정도였다.

재경은 그들이 자신과 같은 연습생이라는 걸 한눈에 알아보았다.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나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이돌답게 치장해서 함께 돌아다니고 있으니 누가 봐도 choose nine에 참가한 연습생이다.

“아…….”

그들을 둘러보던 재경이 뒤늦게 알겠다는 듯 소리 냈다.

“알겠죠?”

“네.”

“역시 처음 봤을 때도 혼자 모자를 쓰고 오셔서 신기하셨는데…….”

“제가 진짜 짐이 별로 없어요. 캐리어가 없기도 하고.”

“…네?”

여자가 이상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재경은 아까 흐지부지되어버린 말을 이어하라는 줄 알았다.

“그래서 가방을 가져왔어요.”

“그러시구나.”

여자가 이제 재경을 이해한다는 듯 해탈한 미소를 그렸다. 왜 말귀를 못 알아들은 건데 저렇게 귀엽지?

여자가 어떤 시선을 보는지 모르고 재경은 민망함에 고개를 숙였다. 가벼운 등가방 하나 메고 온 자신에 비해 다른 사람은 모두 커다란 캐리어를 하나씩 끌고 왔다.

재경도 아이돌 생활을 할 때 캐리어로 다녔는데 이번에 왜 바로 생각하지 못했는지 어디 정신을 놓고 온 것만 같았다. 뭐, 떠올려봐야 집에 캐리어가 있지도 않으니 재경은 금세 관심이 떨어졌다.

“서재경 연습생.”

여자의 중얼거리는 어조로 부르는 소리에 재경이 다시 몸을 바로 했다.

“꼭 최종까지 가세요.”

“네? 아, 네. 응원 감사합니다.”

“정말 진심으로 하는 응원이에요.”

서재경 연습생이 너무 귀여워서, 라는 여자의 말은 카메라 속으로만 빨려 들어갔다.

“들어가세요.”

재경은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다가 말을 바꾼 듯한 여자의 안내에 따라 들어가야 할 방향을 보았다. 또 다른 무리가 들어온 듯 시끄러움이 중첩되자 아예 빨리 들어갈 생각으로 걸음을 옮겼다.

“또 만나요.”

뒤에서 인사를 건네오는 여자에게 재경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  *  *

안내받은 대기실로 들어가자 이미 많은 연습생이 와 있었다. 한쪽에 간식이라고 긴 테이블에 놓인 것과 군데군데 놓인 전신 거울, 카메라까지 마음 놓고 대기할 만한 공간은 아니었다.

재경은 빠르게 주변을 스캔한 후 가장 구석에 박혀서 카메라에 안 잡힐 자리를 찾아냈다. 가방을 옆에 내려놓고 자리에 앉으니 미리 와있던 남자들이 그를 돌아보았다.

언뜻 훑어봐도 다들 화장부터 무대의상까지 맞춘 가운데 재경 혼자만 하얀 티에 청바지였다. 거기에 운동화는 깨끗하게 빨았지만 사용감이 진득한…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낡은 게 티가 났다.

‘너무 대충 입었나.’

괜히 애꿎은 티를 매만졌다가 손을 내렸다. 대충 입은 게 아니라 재경에게 있는 몇 안 되는 옷 중 하나였다. 소속사가 있는 것도 아니라 어디서 옷을 가져올 곳도 없었다.

재경은 아예 속속 들어서는 사람들을 구경하려 입구 쪽만 바라보았다. 정말 오늘 이를 갈고 나왔는지 원래도 잘생겼을 남자들이 하나같이 눈에 띄게 꾸미고 왔다.

시상식장에 올라가는 듯 과한 정도가 아니라 정말 그들의 장점을 부각하고 자연스러운 포인트만 배치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눈이 가는 거다.

재경은 들어오는 연습생의 면면을 볼수록 점점 자신 없어졌다. 저런 연습생 사이에서 초라한 자신은 눈에 띌 리가 없었다. 오디션은 눈에 띄면 띌수록 좋은 거고 카메라에 한 번이라도 잡혀야 하니 지금 재경의 상황에선 아주…….

‘좋아.’

유익한 상황이었다.

일부러 안 꾸민 것도 아닌데 알아서 다른 이의 그림자가 되니 적당히 숨기 좋은 환경이었다. 재경이 무의식적으로 매만지면서 구겨진 티를 펴고 손바닥으로 몇 번이나 쓸어내렸다. 그래 봐야 구겨진 게 펴지진 않았지만, 재경의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

재경이 벽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자 엄마와 실랑이하던 일이 필름처럼 머릿속을 지나갔다.

“누구 마음대로 오디션이야. 이미 앨범 계약했고 이제 가수 데뷔만 남았는데 그딴 덴 왜 나간단 건데.”

“이미 신청했어. 되돌릴 수 없어.”

“서재경. 이 계약이 먼저였어.”

“그건 엄마가 한 거지. 내 생각은 하나도 들어간 게 아니잖아.”

“고집부리지 마. 이 계약이 먼저야.”

“아니. 난 여기 들어갈 거야. 여기서 데뷔할 거라고.”

“이게 뭐라고! 너 엄마 말 들어. 엄연히 계약이 먼저였어.”

“내가 하고 싶은 거 할 거야. 그거 안 할 거니까 계약 파기해.”

“서재경!! 그딴 오디션이 뭐라고!”

“그딴 오디션 아니야. 엄마가 말한 가수… 여기서 보란 듯이 데뷔할 거야. 그러니까 그거 계약 파기해. 한 달간 숙소에서 지낼 거니까 찾아오지 말고.”

며칠의 실랑이 끝에 오늘 나오기 전 못을 박았다. 엄마가 계속 집에 붙어 있을 줄 몰랐다. 재경은 혹시나 자기 모르게 무슨 짓을 벌일까 봐 선잠으로 버텨가며 엄마를 경계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가수가 되겠다는 제 말이 통했는지 엄마는 더 붙잡지 않았다.

‘한 달만.’

재경은 이 오디션으로 도망치는 시간을 한 달로 잡았다. 일차로 숙소에서 버티는 이 한 달이면 충분히 제가 원하는 대로 이뤄질 거라 여겼다.

엄마에겐 오디션으로 가수가 되겠다고 했지만, 어차피 탈락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재경은 첫 번째 순위발표에서 탈락하는 걸 목표로 삼았다.

가수가 되고 싶지 않으니 절대 이 오디션에서 끝까지 버틸 마음이 없었다. 그 남자를 피하는 것으로 첫 번째 목표는 이룬 것과 다름없으니 이제 조용히 있다 빠지기만 하면 된다.

재경은 아예 몸에 힘을 빼고 깊이 숨을 내쉬었다. 계속 예민하게 곤두서 있었더니 몸이 무겁고 눈꺼풀이 올라가지 않았다. 언제 호명하나 기다리고 있는데 점점 소음이 멀어져갔다.

‘어?’

얼마나 잠들었지?

소음이 잦아들고 시간이 지났다는 생각이 들자 재경이 벽에 기댔던 몸을 세웠다. 눈을 떠서 주변을 바라보니 자신을 제외하고 한 사람뿐이었다. 각자 따로 떨어져서 연습하는 거로 봐서는 재경처럼 개인 연습생인 듯싶었다.

‘개인은 가장 마지막이구나.’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 제 차례가 올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아직 머릿속이 잠에서 덜 깨서 몽롱했다.

“서재경 연습생.”

자신을 호명하는 소리에 재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을 둘러봤을 때 캐리어는 없으니 아마 들고 가는 것 같아서 가방을 등에 멨다.

스태프에게 손을 들어 제가 서재경이라는 걸 알리자 그가 무전기로 무슨 말을 중얼거리더니 따라오라고 신호했다.

“여기서 나가면 바로 무대랑 심사위원이 있을 거예요. 옆에 가방 내려두시고 무대가 끝나면 가져가시면 됩니다. 여기 마이크요.”

이미 몇십 번이나 말했을 말이라 속사포로 뱉어버리는 스태프의 빠른 말에 재경은 무대가 끝나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못 물어봤다.

그냥 가방을 내려놓고 마이크를 받고 허리춤에 송신기를 차고 나니 바로 나가라는 말이 돌아왔다. 무형의 손에 등 떠밀리듯 무대로 나간 재경은 조용했던 공간에 예상외로 많은 사람이 있는 걸 보고 놀라서 눈이 크게 떠졌다.

왜 아까 스태프가 가방을 들고 가라고만 하고 뒷이야기를 안 했는지 알았다. 7명의 심사위원 뒤로 단계적으로 높아지는 단에 연습생들이 앉아있었다.

즉 재경은 노래가 끝나면 가방을 들고 저들이 있는 곳으로 가면 되고 또 하나는…….

재경의 노래를 심사위원만 듣는 게 아니라는 거다.

‘나 진짜 뭐한 거냐.’

오기 전에 어떻게든 이 오디션을 알아볼걸. 적어도 예선이 통과한 후에 어떤 과정인지 전화라도 해볼 걸 그랬다.

백여 명이 넘는 사람 앞에서 노래를 부를 줄 모르고. 재경은 잠시 머뭇거리다 우선 인사부터 해야겠단 생각에 허리를 숙였다.

“서재경입니다.”

“…….”

누구도 재경의 말을 받아주지 않았다. 재경이 심사위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팔을 붕붕 흔드는 게 한쪽 시야에 걸리면서 그를 향해 고개 돌렸다. 헤드셋을 낀 남자가 옆을 가리켰고 거기엔 한 스태프가 스케치북을 들고 있었다.

[시작하세요.]

“아…….”

심사위원이 하라고 할 때 노래를 부르면 될 줄 알았던 재경이 고개를 끄덕이고 마이크를 들었다. 노래하면 되겠지? 싶은 눈치로 막 첫 소절을 부르려다 멈칫했다. 대신 아까의 그 헤드셋을 낀 남자를 보았다.

“저 근데 MR 안 틀어주시나요? 아…….”

저번과 달리 미리 어떤 노래를 부를 거냐고 물어봐서 알려줬는데 노래가 안 나와서 물어봤었다. 그런데 뒤늦게 노래가 흘러나왔다.

조금만 더 참을걸.

‘이거 첫 소절 무반주였지.’

제가 선택해놓고 실수하고 말았다. 재경이 입술을 짓씹으며 난감해하다 마음을 편하게 잡았다.

‘어차피 여기서 떨어져도 바로 집에 가는 것도 아닌데 뭐.’

벌써 후렴부를 향해 가는 노래는 다시 시작해줄 용의가 없으니 재경은 그냥 중간부터 노래를 부르기로 했다.

바로 고음으로.

세상에 나를 버릴지라도

난 버텨낼 거야.

마이크 상태도 괜찮아서 제 목소리를 그대로 빨아들이는 기분이 제법 괜찮았다. 재경은 MR이 잦아들 때까지 노래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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