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부스 안으로 들어오자 간이 테이블 앞에 두 사람이 있었다. 한 명은 카메라를 만지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종이를 들고 있었다. 그것으로 그들의 역할을 가늠한 재경이 앞에 가서 섰다.
“서재경입니다.”
간단하게 인사를 건네고 나서 가만히 있으니 카메라를 만지는 남자가 옆에 선 여자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자를 쓰고 오셨네요.”
“어… 네.”
재경이 모자를 만지작거렸다. 검은색 볼캡이 이마의 반을 가리고 있어서 살짝 고개를 숙여도 눈까지 가려졌다.
“카메라가 있을 줄은 몰랐어요.”
“어? 그럼 메이크업도 안 하셨겠네요?”
“아…….”
재경이 어벙하게 목소리를 흘렸다. 왜 예선엔 카메라가 없다고 생각했지? 남들은 다 꾸미고 왔을 텐데 자기만 이렇게 초라하게 왔다는 걸 알게 되자 얼굴이 달아올라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장난이에요. 이건 카메라 테스트고 방송에 나갈 용은 아니에요. 예선 보는 연습생 전부 다 찍어서 어떻게 나가요.”
우리나라에 연습생이 얼마나 많은 줄 아냐며 웃는 소리에 재경은 바짝 긴장했던 허리에서 힘을 뺐다. 재경도 연습생 생활을 오래 해와서 안다.
진짜 가수가 되고 싶은 사람도 많지만, 배우가 되기 위한 과정 등 다양한 이유로 거쳐 가는 연습생이 정말 많았다.
“노래 준비해 오셨죠?”
서류에 적힌 포지션을 본 여자가 여상히 물었다.
“네.”
“옆에 마이크 있어요. 보고 원하는 걸 들고 오시면 돼요”
여자는 무엇이든 다 재경이 움직이도록 했다. 재경이 말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작은 원형 테이블에 놓인 여러 가지 마이크 중 재경은 가장 무난한 다이나믹을 집었다.
노래방에서 쓰는 가장 흔한 마이크였다.
깊게 심호흡을 한 후 노래를 시작하려고 마이크를 대는데 여자가 깜짝 놀라서 낮은 비명을 질렀다.
“어? 안 되는데?”
“네?”
“얼굴이 다 가려지잖아요.”
“아아.”
“얼굴이 작아서 반이 가려져요.”
재경이 마이크를 들었다 내리며 다시 테이블을 보는 등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카메라 때문에 그러나 싶지만, 어차피 카메라 테스트면 아까 본 거로 충분하지 않나 싶었다.
“다른 마이크를 가져올까요?”
“괜찮아요. 시작하세요.”
여자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울상을 지우더니 신호를 보냈다. 재경이 얼떨떨한 표정과 함께 다시 마이크를 들었다. 그리고 막 준비한 노래를 하려고 하는데 묘하게 어수선하단 느낌이 들었다. 왜 그러지 싶었던 재경이 뒤늦게 천장이 뚫려있는 걸 발견했다.
가창력을 보여줘야 할 거 같아서 준비한 노래를 부르면 왠지 옆 부스에 있는 사람이 들을 수 있겠다 생각했다. 방금도 누군가가 크게 지르는 소리에 놀라서 움찔했다.
‘내 노래도 다른 사람이 듣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노래를 부르기가 내키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가사를 전부 알고 제대로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떠올려봤다. 그래도 많은 곡을 불렀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떠오르는 건 하나뿐이었다.
재경이 망설임에 마이크를 쥐었다 펴며 고민했다. 소속사에서 몇 번 불렀다가 겉멋 든 목소리라고 잔뜩 혼이 나기만 한 곡이었다. 낮은음을 부를 때 목소리가 조금 허스키해지는 것 때문에 재경은 다소 높은 음정을 요구하는 노래만 불렀다.
‘하아, 진짜 나 왜 이렇게 한심하지.’
자꾸 과거에 매여 걱정부터 하고 있다니.
“저기…….”
“네. 할 말 있으신가요?”
여자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받았다. 재경이 어깨를 움찔했다.
“노래 바꿔도 될까요?”
“안 될 건 없지만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어… 워서…….”
“네?”
여자가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되물었다. 방금 한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부끄러워서.”
“어머.”
이유가 너무 귀여운 탓에 여자와 카메라맨이 짧은 웃음을 흘렸다.
“뭐가 부끄러운데요?”
“원래 고음이 좀 들어가는 노래를 선택했는데 다 들릴 거 같아서... 작게 부르려고요.”
“그럼 예선 떨어질 수도 있는데 괜찮아요?”
재경이 표정을 굳혔다가 엉거주춤 고개를 끄덕였다.
“해 볼게요.”
“좋아요.”
여자가 카메라맨과 눈을 마주치더니 손으로 묘한 신호를 보내고 다시 재경을 보았다. 재경이 눈을 감고 마이크를 들었다. 작은 탄식이 들렸지만 무시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끝없는 절망으로 떨어지는 나를
누가 구해 주나
나는 아직도 너를 기다리는데
읊조리듯 담담한 어투였다. 마이크에 입술을 가까이 댄 채 중얼거리니 그 가사가 제대로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재경은 시작한 노래를 끊지 않았다. 제 귀로 들려오는 허스키한 목소리가 어색하게 다가왔다. 얼마 만에 불러보는 거지?
다들 날 밀어내.
어서 와.
와서 내 손을 잡아줘
내 마음을 위로해 줘
무반주지만 잠깐의 여운 속에 재경이 마이크를 내리고 속으로 음정을 그렸다.
너와 함께 있다면
차가운 바람에도
나는 버텨낼 수 있을 텐데
내게 와서 날 안아줘
외로워 우는 날 품에 넣어줘
내 곁에 머물러줘
재경이 긴 숨과 함께 마이크를 내렸다. 천천히 눈을 뜨자 앞의 여자와 남자는 입을 다문 채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역시 음정이 높은 곡을 보여야 했나?
“끝났습니다.”
“어…….”
여자가 말끝을 늘리며 재경을 보았다.
“이전 곡이… 뭐였죠?”
여자가 막 서류를 뒤적였다. 가장 위에 떠 있던 재경의 프로필을 두고 엄한 다른 사람의 이름을 살폈다. 여자의 이상한 행동에 카메라맨이 킥킥 웃더니 조용히 카메라를 돌렸다. 재경을 향하던 카메라가 여자를 향한 것도 모른 채 그녀가 프로필을 뒤적거렸다.
“아… 이거였네요.”
여자가 메마른 웃음을 흘리며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 헛기침했다.
“원래 노래도 들어보고 싶네요.”
“아…….”
재경이 입가에 서린 아쉬운 미소를 재빨리 감췄다. 원래 선곡이 더 괜찮다는 우회적인 말이 탈락을 의미하는 걸 알았다. 이 바닥 사람들은 다들 은근하게 말을 돌려 표현하니까.
“잘 들었습니다.”
아까보다 더 딱딱한 음성에 재경이 씁쓸한 표정을 감추려 얼른 옅은 미소를 띠었다.
‘역시 안 되는 거였나.’
예선마저 통과 못 했으니 다른 방법을 알아봐야 하는데 떠오르는 게 없어서 막막했다. 그렇다고 억지로 붙여달라고 할 수 없으니 바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재경이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고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어수선하고 들뜬 분위기 속에서 재경은 혼자만 심연에 빠진 듯 서 있었다. 23억이라는 거대한 빚을 두고 눈물이 나와야 하는데 그냥 헛웃음만 나왔다.
“나 진짜 자뻑이 심하네.”
아무 준비 없이 와서 될 거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던 거다. 그러니 이렇게 기대하고 실망했지. 재경이 탁 숨을 내쉬며 배에 붙어있던 이름표를 뜯으며 걸음을 옮겼다.
“윽.”
고개를 숙이고 걸었던 재경이 누군가와 부딪히며 막힌 신음을 흘렸다. 충격에 모자가 벗겨진 걸 알았지만 그보다 욱신거리는 어깨가 먼저였다. 재경이 어깨를 매만지며 상대를 확인하려고 할 때였다. 부딪힌 상대가 허리를 숙여 모자를 주워줬다.
“감사합니다.”
모자를 받아드는 재경이 그것을 털지도 않고 써버렸다.
“그렇게 고개 숙이고 다니시면 또 누군가와 부딪히겠네요.”
재경이 들었던 고개를 다시 숙였다. 남자의 입과 턱까지만 봤지만 자기보다 키가 큰 걸 알았다.
“저는 둘째치고 다른 사람에게 실례예요.”
재경의 몸이 눈에 띄게 굳었다.
“나는 둘째치고 다른 멤버한테 실례야.”
과거 이정우의 목소리와 얼굴이 오버랩되었다.
‘왜 여기서.’
당장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부딪힌 게 크게 다가왔다. 여기 예선을 치르는 간이부스가 몇 개나 되는데. 재경이 당황한 걸 감추지 못하고 부딪힌 남자를 바라보았다.
반듯하게 뻗은 눈썹 아래 시원하게 트인 눈매. 짙은 고동색의 눈동자가 높게 솟은 콧대 사이로 균형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광대에서부터 턱선까지 유려한 선을 그리면서도 여자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건 아마 아름다운 얼굴 위로 드리워진 특유의 분위기 탓일 거다.
“이정우?”
저도 모르게 이름을 부르고 아차 싶었다. 자신은 이정우를 알지만, 상대는 나를 모른다.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까 싶었지만, 다행히 배에 이름표가 붙어있는 걸 확인하고 안도했다.
그런데 이정우도 이상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그 자리에 서서 재경을 바라보았다. 재경은 왜 얘가 옆에 있는지 의아하다 곧 이유를 알았다.
“아, 죄송합니다.”
부스의 입구를 막고 있어서 들어가지 못했다는 걸 알고 옆으로 비켜섰다. 그런데도 이정우가 들어가지 않고 재경을 보고 있으니 안에서 다음 사람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이름이 뭐예요?”
이정우의 물음에 재경이 손안으로 구겨버린 이름표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이름은 모를 테니 묻는 거지만 기분이 이상했다. 자기가 누군지 알고 있어야 할 사람이 낯선 표정으로 바라보는 게 아주 묘한 기분.
“서재경이요.”
말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재경은 그렇게 이정우에게서 멀어졌다. 제 등에 매달렸던 시선이 떨어지자 재경은 천천히 걸음을 늦췄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정우’와 마주치다니. 늘 자신을 차갑게 바라보던 시선이 아니었다. 적당한 호기심이 깃든 그런 눈빛이었다. 그게 이상하게 서운했다.
3년 동안 활동하면서 단 한 번도 불러주지 않았던 제 이름을 그가 기억했으면 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