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아이돌-4화 (4/125)

4화

[CHOOSE NINE 예선]

방법이 이것뿐일까?

재경은 앞에 보인 커다란 현수막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가수가 되기 싫다고 도망치는 다른 방법이 가수가 되는 길목이었다.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굴로 들어가는 길이지만 자신은 아직 나이가 안 돼서 그 남자가 사기꾼이라는 걸 알아도 막을 수 없었다. 엄마는 또 도장을 찍을 것이고 앨범준비를 한다고 끌어온 사채로 남자에게 돈을 안기겠지.

그것을 막으려면 당장 재경이 앨범준비를 하지 않을 핑계가 있어야 했다.

“아으. 답답해."

재경이 제 가슴을 두드렸다. 일교차가 큰 날씨에 티 하나만 입고 왔더니 손에 제 허리춤이 들썩이며 찬바람이 들어왔다. 몇 번 바람을 쐬던 재경이 포기한 듯 손을 내렸다. 아무리 바람을 쐬고 가슴을 두드려 본들 원인이 재경이 아닌 다른 사람과의 갈등이라 혼자만 뭘 한다고 될 게 아니었다.

“그냥 다른 집처럼 대해주면 안 되나.”

지금껏 제 엄마를 겪어놓고도 여전히 아쉬움이 남았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학교 다니고 공부하고 시험에 일희일비하며 살고 싶었다. 이미 그들과 다른 길을 타기 시작한 걸 알기에 더욱 부러워서 한숨만 차올랐다.

“이젠 그렇게 살기 글렀어.”

이미 25살까지 살아왔으니 더 잘 알고 있다. 엄마는 절대 재경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재경이 단호한 눈빛으로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이 오디션을 단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몇 가지 아는 게 있었다.

9명이 데뷔하는 것. 거기서 1등인 남자가 JT 소속 연습생이라는 거.

“JT…….”

재경이 소리 내어 이름을 굴려보았다.

실장과 함께 나타나 앨범 계약을 이유로 돈을 뜯기고 나서야 사기라는 걸 알고 절망한 재경과 달리 또다시 사라진 엄마가 나타난 건 2년 후였다. 밤낮없이 일한 돈으로 이자만 겨우 내면서 살던 재경은 엄마를 원망할 시간도 없이 또 한 기획사로 끌려갔다.

그곳이 JT 엔터였다. 결과부터 말하면 재경은 긴 연습생 생활과 무거운 빚이 생겼지만, 엄마의 노력으로 데뷔하긴 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하단 말이야."

어떻게 엄마를 알아봤을까?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엔터테이먼트의 계약서를 가져온 엄마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면서 재경을 끌고 갔다. 어떻게 계약서를 가져왔는지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대표가 엄마를 알아보고 재경에게 기회를 준 것이다.

당연히 소문이 좋을 리 없었다. 대형 엔터에서 어디서 굴러먹었는지 모르고 나타난 애가 연습생 3개월 거치고 바로 데뷔하는데 누가 좋아할까. 심지어 choose nine으로 뜬 멤버들 사이에 끼어 들어가니 기존 멤버들의 유명세에 얹어간다고 안티부터 생성되는 건 기본이었다. 대표의 낙하산, 기존 멤버에게 얹혀가려는 심보 등으로 재경은 사정없이 물어뜯겼다.

짧은 연습생 생활에도 그에게 다가오는 사람이 없었고 대놓고 시비를 걸어오기도 했다. 그래도 데뷔한다고 이를 악물고 버텼다. 어차피 재경이 어울릴 건 같이 데뷔할 멤버들이니까 그들과 사이좋게 지내면 된다고 합리화했다.

엉망진창으로 쏟아지는 재경의 악소문에 멤버들에게 이미 지울 수 없는 선입견이 쓰인 것도 모르고.

그들은 제 마지막 멤버인 재경을 반기지 않았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최후의 9명에 뽑혀 활동한 그들은 재경을 굴러온 돌처럼 여겼다.

심지어 이미 유명세가 있는 그들과 재경은 데뷔 준비과정부터 달랐다. 재경이 연습실에서 데뷔곡과 안무를 연습하는 동안 그들은 예능에 나가면서 틈틈이 저들끼리 손을 맞춰봤다. 그리고 시간이 남아 연습실로 찾아올 땐 재경이 없어서 자꾸 시간이 엇갈렸다.

결국, 그들이 처음 만난 장소는 첫 무대 리허설이었다. 어색한 인사만 나누고 재경은 바로 대형에 맞춰 섰다. 그날 재경은 첫 무대를 엉망으로 망치고 내려왔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못하고 혼자서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제 실력을 내보이지 못했다.

역시나 실력이 부족하다는 인식이 강해지면서 멤버들과는 더욱 거리가 벌어졌다. 누구도 거리를 좁히려 노력하지 않았다. 재경은 천성이 소극적인 성격이라 다가가지 못했고 그들은 자기들만으로 충분한데 억지로 끼워줄 마음이 없었다.

서로를 알지 못하면서 쌓이는 오해는 어느새 눈덩이처럼 커졌다. 매니저는 자꾸 쓴 아메리카노만 줘서 재경은 한 모금 겨우 넘기는 게 고작인 작은 일도 다른 사람이 보기엔 까다로운 식성이라며 입에 오르내렸다. 재경의 가느다란 신경은 아주 작은 힘에도 툭 끊길 수 있을 정도로 가늘어졌다.

죽지 못해서 사는 삶.

그게 재경이 데뷔하고 난 후의 감상이었다.

“재경아, 이번 콘셉트 회의엔 오지 않아도 괜찮아. 피곤할 거 같은데 자고 있어.”

“형 미안한데 저한테 말 걸지 말아주세요.”

“매니저 형이 네 셔틀이야? 존나 까칠하게 구네.”

같이 연습한 시간도 얼마 안 됐고 서로의 사정을 알지 못했으니 그들에게 자신을 봐달라고 할 정도로 얼굴이 두껍지 않았다. 그렇다고 상처받지 않는 것도 아니면서.

“너랑 있으면 자꾸 이상한 말이 돌아. 대체 어디가 달라서 특별대우 받는지 모르겠는데 적어도 피해는 주지 말아야지. 같은 카메라에 잡히지 않게 반경 1m 안으로 들어오지 마. 필요한 말 외에 말 걸지 말고. 나는 둘째치고 다른 멤버한테 실례야.”

재경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의 기억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거짓으로나마 미소를 지었던 리더나 귀여운 말투로 밀어내던 막내, 짜증스럽다는 듯 틱틱대던 래퍼. 그들은 그래도 재경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지만 단 한 사람은 철저하게 그를 무시했다. 재경은 늘 무기질 같은 그의 눈동자를 마주할 때마다 숨이 막혀왔고 도망치고 싶었다.

‘이정우.’

소리 없이 한 이름을 곱씹었다. 아이돌 개인 브랜드 평판 1위. 각종 CF와 예능, 드라마까지 러브콜을 보내는 명실공히 아이돌계의 황태자.

그가 광고를 찍은 제품은 회사의 주가마저 요동칠 정도로 큰 매출을 낳았고 그가 재밌다고 말한 영화는 가뿐히 손익분기점을 넘었다.

영화의 내용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정우가 재밌다는 말 하나에 팬들이 영화표를 사들이는 것이다. 그런 괴물 같은 인간을 만든 게 바로 이 오디션 프로그램이었다.

이정우는 choose nine에서 1등을 하면서 b-nine 이라는 그룹으로 데뷔한다. 1년, 비활동기까지 합해서 2년 안 되는 시간 동안 활동한 후 계약이 끝남과 동시에 기획사로 돌아간다. 그리고 b-nine에서 같이 활동했던 멤버들과 함께 새로운 멤버 한 명을 추가해 V.O.B 라는 그룹으로 다시 나온다.

b-nine의 활동이 끝남과 동시에 허공에 뜬 팬은 고스란히 V.O.B에 흡수되어 바닥부터 올라갈 일도 없었다.

국민이 사랑하는 남자는 재경을 싫어했다. 연습생 생활에도 외로웠지만, 아이돌 활동을 할 때의 재경은 말 그대로 망망대해에 혼자 떠다녔다. 혼자서 감당해야 할 외로움이 커질수록 재경은 점점 웃음을 잃어갔다. 누군가 보이는 직업에 웃음을 잃어버린 광대는 그 가치가 사라지는 법이다. 재경은 그렇게 그룹에서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아직 호명되지 않은 분은 이쪽으로 모여 주세요.”

누군가의 외침에 재경이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지금은 그때를 기억하며 곱씹을 여유가 없었다. 모자를 깊게 눌러쓴 재경이 무겁게 걸음을 옮겼다.

“이쪽에서 기다려주세요. 부스가 비면 들어가시면 됩니다.”

스태프의 안내에 따라 간이로 만든 부스 앞에 섰다. 배에는 즉석에서 뽑은 커다란 이름표를 붙여두고 미로 같은 길을 스태프의 뒤만 졸졸 쫓아온 터였다.

정말 앉으라고 놓아 둔 건지 장식용인지 모를 간이의자가 여기저기 흐트러져 있었다. 재경은 그 의자를 바라보다 제 가슴을 꾹 눌렀다.

‘예선만 통과하면 돼.’

후에 누가 괴물이 될지 어떤 영향력이 생길지 그런 건 이제 재경과 아무 상관이 없었다. JT에서 데뷔하지 않을 테니 다른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예선만 통과하는 게 목표다. 예선만 통과해서 한 달간의 숙소 생활을 하고 첫 번째 순위권에서 탈락하면 된다.

그러려면 적어도 이 예선에서 붙어야 하기에 가벼운 울렁임이 손끝부터 파동처럼 몸을 휘감았다.

재경이 점점 커져 오는 긴장감에 눈을 질끈 감았다. 음 이탈이 나면 어떡하지란 아주 작은 걱정이 시간이 가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서재경 연습생?”

스태프의 부름에 재경이 천천히 눈을 떴다. 스태프가 재경에게 안으로 들어가라는 신호를 보내고 다음 사람을 데리러 갔다. 빈 부스를 앞에 두고 재경이 모자를 깊숙이 눌렀다.

목까지 차오른 긴장감을 억지로 누른 채 그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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