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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아이돌-3화 (3/125)

3화

19살.

엄마가 연습생이 아닌 가수로 바로 데뷔하는 계약서를 들고 왔다. 처음 들어보는 기획사의 실장이라는 남자와 함께. 재경의 의지와 상관없이 데뷔를 위한 준비를 진행했고 그 과정에서 엄마는 가수가 되면 다 갚을 수 있다는 명목으로 실장이 물어다 주는 사채를 썼다.

20억.

가수로 데뷔하겠다는 사탕에 홀려 엄마가 진 빚이었다. 이전에 쌓인 빚까지 하면 대략 21억? 이후에 불어나는 이자까지 23억을 찍었던 거 같다. JT 엔터로 들어가 데뷔하기 전까지 재경은 그 빚의 홍수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아니. 데뷔했어도 빚을 다 갚지 못했지.’

일주일에 열 시간도 못 자고 무대에 섰는데도 반지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재경은 티 하나를 사는데도 손을 벌벌 떨었지만, 엄마의 씀씀이는 점점 늘어만 갔다.

제가 무대에 설 날을 위해 피부관리를 받아야 한다거나 무대의상을 산다거나. 23억 가까이 되던 빚과 깨진 항아리에 물 붓듯 돈을 가져가는 엄마 때문에 재경은 늘 돈이 모자랐다.

‘진짜 좋은 기억이 하나도 없네.’

매일 힘들고 슬펐다.

“그 시간을 다시 겪어야 한단 말이지.”

재경이 무릎에 턱을 괴고 다시 연도를 보았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바뀌지 않았다. 차라리 20살이 넘은 어느 때로 돌아갔다면 나으련만 19살이라니. 자신에게 있어 아예 날려버리고 싶었던 가장 힘들고 괴로웠던 시간으로 돌아온 이유가 뭘까.

- 당신의 손에서 아이돌이 만들어집니다.

멍하니 허공을 보던 재경이 TV에 시선을 돌렸다.

“저거… 기억난다.”

CHOOSE NINE이라는 아이돌 데뷔 오디션 프로그램이었다. 재경은 저 프로그램의 결말을 잘 알고 있었다. 프로그램은 초대박이 났고 이후 방송사마다 우후죽순으로 오디션 프로그램이 생겨난다. 비단 아이돌만이 아니었다.

그 영역을 넓혀서 트로트 가수, 배우, 모델로 확장되어 기본 포맷을 변형시켜 나오는 오디션이 끝도 없이 나왔다.

초대박 날 걸 아는 프로그램을 보는 재경의 눈동자엔 아무 감정이 없었다. 안다고 해서 나갈 생각이 없었다. 재경은 가수가 되고 싶지 않았으니 의미 없이 서류접수 기간을 보다 TV를 꺼버렸다.

재경은 작은 동작만으로 이불속에 들어갔다. 낡고 숨이 죽었지만, 재경에겐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유일한 토굴이었다. 이불을 목 아래까지 끌어올린 재경이 눈을 감았다.

1년만 어떻게든 버티면 된다. 이후로는 재경이 하지 않겠다면 엄마 마음대로 계약할 수 없으니 가수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엄마의 오랜 염원이라고 재경을 붙들어도 절대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가수가 하고 싶다면 자기가 하면 된다. 재경은 절대 그녀가 다시 재기할 발판이 되고 싶지 않았다.

‘편의점 아르바이트가 좋을까.’

재경은 당장 구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찾으면서 20살이 되면 바로 취업할 계획을 짰다. 작지만 안정적으로 돈이 들어오는 일을 시작해서 빚을 다 갚고 나면 대학교에 가고 싶었다. 평범하게 정말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누구의 눈에 띄지 않고 오해받지 않는 그런 삶이 너무 고팠다.

‘우선은 사기당하지 않는 것부터…….’

다시 19살이 된 만큼 적어도 가장 큰 빚을 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만 되새겼다. 그것만 벗어날 수 있다면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 수 있다고 여겼다.

그렇게 여겼는데…….

“네가 서재경이냐?”

재경이 희게 질린 낯빛으로 비틀거렸다.

‘이 남자가 왜 여기에…….’

어제 잠들 때까지만 해도 전혀 오늘을 예상하지 못했다. 이른 새벽에 불어오는 찬 바람이 매섭게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하체를 가리던 이불이 다리를 타고 내려가 발목에 고였다. 밤사이 재경의 몸을 따뜻하게 데워주던 게 거짓말처럼 그의 발목을 붙잡는 밧줄처럼 낯설었다.

“누구...세요?”

재경은 침착한 목소리를 꾸며내며 물었다. 앞의 남자가 누군지 알고 그것을 피하려고 건넨 물음이지만 아쉽게도 끝에서 목소리가 갈라졌다. 실장이란 남자의 입꼬리가 비틀리더니 피식 웃은 소리가 들렸다. 다 안다는 듯한 남자의 눈빛에 재경의 등줄기에 소름이 끼쳤다.

“나? 너 데뷔시켜 줄 사람.”

담배를 입에 문 남자의 껄렁껄렁한 말투가 재경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재경이 그를 경계하며 뒷걸음질 치자 그만큼 남자가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네 엄마도 곧 있으면 올 거다. 내가 먼저 도착해서 온 거니까…….”

남자가 자리를 잡고 앉는 것과 동시에 재경은 그대로 집을 박차고 나왔다.

‘말도 안 돼.’

오늘 남자가 찾아오는 줄 알았다면 미리 도망쳤을 텐데. 그랬을 텐데.

“재경아.”

앞을 막아선 여자 때문에 재경은 억지로 달리던 걸 멈췄다. 진한 화장은 여전하지만,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더 젊어진 엄마였다. 이때 파마를 많이 했는데 특유의 탄내가 맡아지며 진짜 엄마라는 걸 알았다. 재경이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엄마…….”

“너 왜 나와 있어?”

“그 도망간 고양이 데리고 들어오세요.”

“어머. 네, 실장님. 얘가 낯을 가려요. 곧 들어갈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엄마가 실장 들으란 듯 사근사근 목소리를 올렸다. 그리고는 재경의 팔을 잡았다.

“빨리 들어가자.”

“엄마 잠깐만.”

재경이 들어가지 않으려 발에 힘을 주고 버텼다. 발바닥에 날카로운 게 있는지 찌르는 느낌이 들었지만 당장 한 걸음도 떼면 안 된다는 압박에 꾹 눌러버렸다.

“저 남자 뭐야?”

“너 데뷔시켜 줄 사람.”

“아니야.”

“뭐가 아니야. 엄마가 다 알아봤어. 들어가자. 나머지는 들어가서 이야기해.”

“아니.”

재경이 붙잡힌 제 팔을 빼냈다. 엄마가 놀란 듯 얘가 왜 이러냐는 시선에도 재경은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껏 그녀가 하라는 대로 움직였으니 지금 제 거부가 이상하겠지.

“안 해.”

엄마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재경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찬기가 서렸다가 곧 그를 달래려 억지로 마음을 다스리는 게 보였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일단 들어가.”

“저 남자랑 계약 안 해. 안 한다고……!”

순간 뺨에서 느껴지는 홧홧한 열기와 함께 재경의 고개가 돌아갔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뒤늦게 인식한 재경이 손을 올렸다.

제 뺨을 내려진 엄마의 손이 허공에 어정쩡하게 떠 있었다. 그녀는 손목을 쥐고서도 진정이 되지 않는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지금 날 때린 거야?”

이제껏 버려뒀을지언정 때린 적은 없었다. 재경이 충격에 엄마로부터 뒷걸음질 쳤다.

“그게 아니야. 엄마는 단지…….”

엄마가 다급히 재경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재경은 그녀의 손이 닿기 전 몸을 돌려 달렸다. 뒤에서 들려오는 제 이름에 재경은 더욱 이를 악물고 달렸다.

‘잡히면 안 돼. 잡히면 또다시 진창길로 들어가는 거야.’

엄마가 쫓아오지 못하게 달렸고 폐가 찢어질 것 같을 때가 되어서야 멈춰 섰다.

“하아, 하아.”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참지 못하고 거칠게 호흡을 고르는 재경이 턱에 맺힌 물기를 닦아냈다. 이게 제 땀인지 아니면 눈물인지 모르고 그저 몇 번이고 손등으로 훔쳐냈다.

맨발로 뛰어나와 발바닥에 찬기가 올라오는 게 뒤늦게 느껴졌다. 질척한 느낌이 드는 게 흙탕물이라도 밟았는지 아니면 어디에 찔려 피라도 났는지 알 수 없었다.

“하… 하하하.”

재경이 눈을 가린 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대로 실실 웃었다. 맨발에 얼굴은 붉은 기가 감도는데 웃기까지 하니 미친놈이 따로 없었다. 재경이 이상하다고 여긴 알아서 사람들이 그를 피해 빙 둘러갔다.

그들의 시선에 재경은 숨고 싶어 주변을 둘러보지만 갈 곳이 없었다. 그 집엔 아직 남자가 있을지 모르고 재경에겐 그 흔한 친구도 없었다. 지금이라도 가서 엄마한테 그 남자가 사기꾼이라고 말할까? 그 회사 사채업에서 만들어 낸 유령회사라고 말하면… 엄마가 믿을까?

“엄마는… 엄마라면…….”

재경이 하염없이 엄마를 불렀다. 제가 아는 엄마는 절대 제 말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럼 나는 다시 빚진 인생을 살아야 해?”

잠들기 전 겨우 가라앉혔던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재경이 허망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재경을 다시 한번 어둠으로 끌고 가려고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나 어떡하지? 어떡해. 나… 나는… 이제…….”

눈물이 턱을 타고 뚝뚝 흘러내리는데 아까처럼 닦을 기운도 없었다. 재경은 고개를 숙이고 흐느꼈다.

“누가… 나 좀… 도와줘.”

손에 얼굴을 묻은 채 우는 재경은 아무도 듣지 못할 도움을 청했다. 누구든 재경을 안고 괜찮다고 위로해주길 바랐다. 그럴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혼자 웅크려서 외로움을 달랬으면서.

- 새로운 시작을 꿈꾸는 소년이 있습니다.

“…….”

재경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디서 나오는 소린지 찾아보려 바쁘게 눈동자를 굴렸다.

- 소년의 꿈을 응원해 주세요. 소년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세요.

소리의 근원지를 찾은 재경이 몸을 틀었다. 누가 옆에서 말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높은 곳에서 울리는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소리였다. 재경은 곧 소리가 나오는 곳으로 고개를 들었고 건물의 전광판을 보았다.

- 당신의 손에서 아이돌이 만들어집니다.

[9명의 소년을 선택하세요.

CHOOSE N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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