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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아이돌-2화 (2/125)

2화

재경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닌 걸 깨달은 여자가 떨리는 손으로 그의 팔을 잡았다.

“무슨 소리야. 재경아, 다시 생각해 봐. 네가 가수가 아니면 뭘 하겠어.”

여자가 재경을 달래려고 한껏 목소리를 낮췄다. 언제 소리 질렀냐는 듯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재경의 마음을 돌리려고 했다. 그것이 이미 헤질 대로 헤진 상처 위로 소금을 뿌리는 것도 모른 채. 재경은 제게 뻗은 엄마의 손을 쳐냈다.

“가수 안 할 거야.”

“그렇게 감정적으로 결정할 게 아니야. 일단 쉬고 다시 생각해보자. 네가 잘돼야 나도 무대를 설 거 아냐. 응? 재경아. 다 널 위해 하는 말이었어. 내 사랑하는 아들. 엄마한테는 너뿐이야. 다 너 잘되라고 한 소린 거 알지?”

“…맞아?”

“뭐라고?”

재경의 우물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여자가 되물었다.

“날 위해 하는 말 맞냐고.”

“그, 그럼 당연하지.”

“엄마가 무대에 서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고?”

“엄마도 서고 너도 서는 거지. 여기서 누가 서는 게 중요해.”

“중요해.”

“재경아.”

“나는 처음부터 가수 하기 싫었어.”

재경이 이제껏 몇 번이나 싫다고 했지만 무시당한 서러움을 담아 그녀에게 쏘아댔다.

“가수 하기 싫다는 날 억지로 기획사마다 끌고 다니면서 연습생 시키고 계약하고 그런 거 다 엄마 욕심 때문이잖아.”

재경을 달래려고 억눌렀던 심술이 차오르는지 여자의 입술이 삐딱하게 기울었다. 재경은 그제야 엄마가 제 표정을 찾아간 것 같아 기꺼웠다. 제 엄마는 이렇게 욕심을 드러날 때가 정상이다.

“네가 가수가 아니면 할 게 있어?”

“막노동을 뛰든 가수만 아니면 돼.”

“빚은 어쩌고.”

여자가 웃기고 있다는 듯 빈정거렸다.

“네 뼈 삭아 가며 벽돌 날라봤자 빚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아?”

그 말이 맞다는 듯 재경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때문에 생긴 빚은 아니지만, 제 목을 죄어오는 밧줄이 되었다. 재경은 곰곰이 생각했다. 막노동도 아니라면 제가 할 건 하나밖에 안 남았다.

“그럼 죽을까?”

물어보는 어투지만 처음부터 정답은 이거뿐이었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당장 도전해 봐도 좋겠다.

“그러지 말고 재경아… 재경아!”

다시 붙잡고 늘어지는 여자의 손을 뿌리치고 나간 재경은 돌아오지 않았다.

*  *  *

재경이 눈을 찌르는 강한 햇살에 손등으로 눈두덩이를 눌렀다. 언제 잠들었지?

‘그렇게 술을 마셨는데 기억날 리 없지.’

한계까지 몰아붙인 몸에 소주를 연거푸 들이밀었더니 버텨낼 재간이 있을 리가. 길바닥에서 잠들었나 싶지만, 주변이 조용한 걸 보니 그건 아닌가 보다. 재경은 일어나기 전 습관처럼 머리를 짚었다. 그의 숙취는 항상 깨질 듯한 두통이기에 미리 머리를 부여잡은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아무 통증이 없었다.

늘 달고 다니던 이명도 없다. 오히려 푹 자고 일어난 듯 상쾌했다. 그동안 못 잔 잠을 몰아 자서 그런가?

“뭐야.”

가슴에서 흘러내린 이불을 본 재경이 기가 찬 웃음을 흘렸다. 이미 제 역할을 하기엔 너무도 낡아버린 보라색의 이불이 반가웠다. 솜이 아니라 이불끼리 비비며 나는 시끄러운 소리조차 지금으로써는 제법 노래처럼 듣기 좋았다.

귀소본능이라도 발휘했는지 필름이 끊겼어도 집으로 들어와 잤나 보다. 재경은 술에 전 것치고 상쾌한 몸을 일으키며 터덜터덜 화장실로 들어갔다. 파란 타일의 익숙한 바닥에 빨간 욕실 슬리퍼에 발을 욱여넣었다.

“슬리퍼를 바꾸든가 해야지. 아직도 엄마가 산 걸 그대로 쓰고 있다니 나도 참…….”

재경이 반쯤 눈을 감은 채 치약을 짠 칫솔을 입에 넣었다. 칫솔부터 물고 있으면 치약의 시원한 향으로 잠을 깨는 게 재경의 오랜 버릇 중 하나였다. 가물가물한 눈을 뜨니 온전한 거울이 재경을 비췄다. 어제까지만 해도 금이 가 있었는데.

“미안해서 갈았나.”

엄마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지난 밤 싸움이 꽤 컸다. 그녀를 응급실로 데려가고 자기 역시 쓰러지고…. 이루 말하지 못할 추문까지 휩싸인 후라 거울을 바꾼 것으로 사과의 제스처를 취한 것 같았다.

“그런다고 가수 안 할 건데…….”

당장 오늘에야 일정을 소화하겠지만 계파하고 나면 다신 가수 안 할 거다.

“매니저 형한테 전화해봐야 하는데…….”

재경이 거울 속 제 모습을 돌아보며 중얼거리다가 제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검은 머리카락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부터 돌아가지 못한 색이었다.

“이게 뭐야. 술 취해서 염색이라도 한 거야?”

그러나 말이 안 되는 게 탈색과 염색을 반복하면서 얇아지고 상한 머리카락이 아니었다. 대체 머리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데. 재경이 마저 칫솔질을 이어가다 다시 손이 느려졌다. 이내 칫솔질을 멈춘 재경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보았다.

낯익고… 낯설었다.

“너 누구야……?”

칫솔을 입에 물고 있느라 발음이 뭉개졌지만, 거울 속에 있는 인물이 듣기에 충분히 정확한 발음이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몇 번 반복해서 되뇌던 차에 무언가가 떠오른 재경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칫솔이 바닥으로 하강하는 게 느린 동작으로 인식되었다. 바닥에 떨어진 칫솔의 치약이 사방으로 튀자 재경이 고개를 내렸다. 치약이 튄… 슬리퍼가 낯익고도 낯설었다. 20살이 되었을 때 화장실의 슬리퍼를 갈았는데 왜 예전 슬리퍼가 있는 걸까.

*  *  *

눈을 뜰 때만 해도 몰랐다. 이불이야 늘 낡았고 잠을 많이 자서 몸이 가뿐한 줄 알았다. 화장실에서 느꼈던 위화감에 서둘러 방으로 돌아온 재경이 곧장 제 핸드폰부터 찾았다. 예전에 썼던 구형 핸드폰과 6년 전을 나타내는 숫자.

“미치겠네.”

재경이 제 머리를 헝클다가 멈춰버렸다. 손가락 사이로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그 느낌이 너무도 낯설었다. 말도 안 되지만 과거로 돌아왔다. 꿈을 꾸고 있나 싶었지만 몇 번이나 확인해도 이곳이 현실이었다.

황당해서 어쩔 줄 모르던 재경의 손바닥이 리모컨을 눌렀고 TV가 켜졌다. TV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백색소음처럼 다가왔다.

정말 시간이 되돌아온 걸까?

25살이 아니라 19살이란 거지? 어제 술을 마셨는데도 두통이 없는 이유가 돌아와서? 하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재경은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염원을 담은 적도 없었고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아무것도 모를 혼란스러움에 재경은 본능적으로 제 다리를 끌어안았다. 늘 어딘가로부터 도망가고 싶을 때마다 취하는 자세였다. 누군가에게 기대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재경에겐 기댈 사람이 없었다. 그를 키운 건 할머니였고 그나마도 할머니가 죽은 6살부터는 혼자 컸다. 엄마는 늘 밖으로 맴돌았고 한 달에 한 번 찾아올 정도로 재경에게 관심이 없었다.

밤에 몇 번 엄마가 일한다는 장소에 따라간 적은 있었지만, 대부분 시간을 혼자 보냈다. 전기가 끊긴 적도 있었고 보일러가 들어오지 않을 때도 많았다. 학교에 가려면 재경이 직접 빨래를 해서 옷을 입어야 했고 가스레인지를 다루기 전까진 유치원과 학교에서 주는 점심으로 때웠다.

그 와중에 5살 때부터 유치원을 다닐 수 있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혼자 힘으로 클 수 없는 나이이기에 보육원이라도 들어가야 했지만, 엄마라는 존재가 버티고 있어 재경은 열악한 상황에서 혼자 버텨내야 했다.

엄마에게 기대는 걸 포기한 재경은 일찍 철이 들었다. 혼자서 사는 게 익숙해질 때쯤 엄마는 재경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처음으로 함께 외출하자고 손을 내밀어왔다.

‘그 손을 잡는 게 아니었어.’

그게 지옥으로 들어가는 길이라는 걸 모르고 처음이라는 것에 부풀어 선뜻 그녀의 손을 잡았다. 커다란 건물에 화려한 사람들을 보여준 엄마는 이제부터 이곳에서 노래를 배울 거라고 말해줬다.

재경은 9살부터 10년간 회사를 돌아다니며 연습생 생활을 했다. 한 회사에서 오래 머문 건 아니었다.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3년까지 꽤 다양한 시간으로 메뚜기처럼 옮겨 다녔다. 데뷔하지 않으면 그간의 레슨비를 내지 않아도 좋다는 조건의 엔터테인먼트는 그나마 나았다. 연습생을 그만둔다고 할 때 그간 쌓인 레슨비를 내라는 곳 때문에 감당할 수 없어 빚이 쌓여갔다.

몸이 끊어지도록 춤을 추고 목이 찢어지도록 노래를 불렀다. 차라리 혼자 사는 게 더 나을 정도로 힘겨운 나날이었다. 그래서 재경은 참고 참다 정말 힘에 겨울 때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나 노래 그만하면 안 돼?”

“엄마. 나 몸이 아파.”

그때마다 엄마는 재경을 위해서라며 조금만 더 버텨보자고 했다. 가수가 되면 지금의 고생은 다 보상받을 수 있을 거라며 재경을 달랬다. 전부 그녀가 무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아들을 이용한 것에 불과했다.

그녀가 건네는 달콤한 말이 독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재경은 이미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 발을 담가 버린 후였다.

싫다고 몸부림쳐도 갚지 못할 정도로 쌓여 버린 빚과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아득함은 그를 또 다른 기획사로 밀어 버렸다. 그나마 기획사가 망해서 연습생 모두가 슬픔에 빠졌을 때 재경 혼자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빚이 더 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가장 큰 시련이 오기 직전의 소소한 불행의 중첩에 불과했다는 걸 당시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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