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동춘추 - 리부트-205화 (205/217)

〈 205화 〉 유민의 지난 이야기 – 2027년 10월 3일 (2)

* * *

­ 오후 4시, 일본 치바현 치바시 일반 주택가 일대

일기 예보에서 비 온다는 말은 없었지만,

창문 밖 날씨는 금방이라도 비가 떨어질 것처럼 우중충했다.

“밥 잘 먹었어요. 내일 사무실에서 뵈요.”

민재는 사무실로 돌아가기 위해 신발을 신는 중이었다.

원래는 오늘도 아이와 밖에서 만나 데이트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는데,

정경호에게는 사무실로 돌아가 활동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며 거짓말을 둘러댔다.

“설마, 건물주 딸내미 만나러 가는 건 아니죠?”

정경호가 의심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 아니에요~! 진짜 보고서 쓰려는 거에요~!”

“진짜 오늘은 어디 안 돌아다니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아까 뉴스에도 나왔잖아요? 시청 앞에서 시위하던 사람들끼리 패싸움 나서 경찰들이 싸운 사람들 막 잡으러 다니는 중이라고.”

“네, 봤어요.”

“그런거하고 공연히 엮이면 골치 아파지니까 어디 가지 말고 사무실에서 푹 쉬고 있어요.”

“네네, 그렇게 할게요~!”

민재는 그에게 씨익 웃어주고는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 오후 4시, 일본 치바현 치바시 이나게구 일대

시청 앞에서 벌어진 패싸움으로 가네무라 무리 중 수십여 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언론에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양키들이 휘두른 폭력에 징병 반대 시위를 하던 대학생 십여 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하고,

보도블록을 깨어 던지는 바람에 시위와 무관한 시민들까지 다치기도 했다.

가네무라 무리는 일단 이나게구에 있는 이자키의 사무실로 몸을 피한 상태였다.

연예기획사를 운영하고 있는 가네무라처럼 이자키도 프로덕션 타이틀을 건 회사를 하나 운영하고 있었는데,

말이 좋아 프로덕션이지 사실 AV를 제작하고 유통시키는 회사였다.

어려서부터 카메라로 사진이나 영상 찍는 걸 좋아하던 그는 AV 감독 일까지 직접 맡아서 하고 있었고,

가네무라의 연예기획사 소속 아이돌들 중 더 이상 연예계에서 활동할 수 없을 만큼 도태된 사람들, 또는 연예인으로 성공할 가망이 없는 여자들을 데려다가 AV 배우로 데뷔시켜 쏠쏠한 재미를 보는 중이었다.

이곳은 그가 사무실 겸 스튜디오로 사용하는 곳으로,

일요일이라 직원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 안에서 헬스 파이브 멤버들이 커다란 접대용 소파에 앉아 담배를 뻑뻑 피우고 있는 가운데,

상석에 앉은 가네무라가 심각한 표정으로 나가시마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일본어) 내가 시위를 하라고 했지, 언제 패싸움을 하라고 했나?]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나가시마의 목소리는 다른 멤버들이 있는 곳까지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일본어) 죄송합니다, 나가시마 상. 너무 경황이 없는 가운데 일어난 일이라... 제가 통제에 미흡했습니다.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일본어) 잘 나가다가 이게 무슨 멍청한 짓인가? 자네 꼬봉들에게 구타당한 학생들이, 정부 일에 사사건건 반대하는 00000 같은 언론사에 제보라도 하면 어떻게 될 거 같나? 응? 어떻게 될 거 같냐고?]

“(일본어) 제가 어떻게든 책임을 지겠습니다. 정말 면목 없습니다.”

[(일본어) 책임? 자네가 어떻게 책임을 지겠다는 건데, 응? 어차피 이 일 덮으려고 죽자사자 뛰어다녀야 하는 것도 다 내 몫이지 않은가? 아니, 내가 무슨 가네무라 군이 싼 똥이나 치워주는 사람인가? 입이 있으면 말을 좀 해보게!]

가네무라는 난감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일본어) 그래도... 이번 일은 다 나라를 위해, 그리고 나가시마 상을 위해 일하려다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고 아니겠습니까? 만약 이 일이 커진다면... 나가시마 상께도 좋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 말에 버럭버럭 화만 내던 가네무라의 목소리가 다소 누그러졌다.

[(일본어) 흠... 자네와 나와의 인연 어디 한두 해 이어진 인연도 아니고... 하는 수 없지. 이번에도 내가 나서는 수밖에.]

“(일본어) 감사합니다, 나가시마 상. 이렇게 또 빚을 지고 말았습니다.”

[(일본어) 그런데 자네, 지금까지 내게 진 빚이 한두 개가 아니지 않은가? 그럼 이제 진짜 내게 그 빚을 감는 시늉을 조금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가네무라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일본어) 얼마 전에 큰 거래가 있어서 지금 당장 자금 여유가... 다음 분기 상납금 드릴 때 그때 이번 일에 대한 감사 표시도 꼭 해드릴 테니 아무쪼록 양해를...”

[(일본어) 뭐, 돈은 됐네. 내가 돈이 아쉬운 사람은 아니잖나?]

나가시마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철강업, 건설업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일본 내에서도 손꼽히는 거부였다.

[(일본어) 내가 뭘 원하는지, 누차 말해와서 잘 알고 있을 텐데?]

가네무라가 양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일본어) 나루사와 아이... 말씀이십니까?”

옆에서 듣고 있던 타미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일본어) 뭐?! 또 아이짱 얘기를 하고있는 건가?!”

가네무라는 손을 흔들며 가만히 좀 있으라고 사인을 보내고는,

흥분한 타미야를 피해 사무실 밖으로 나가 통화를 계속했다.

“(일본어) 나루사와 아이를 나가시마 상께 데려다 드릴 수는 있습니다. 다만, 그녀는 지금 제 회사 소속 연예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여러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경찰의 추적을 받게 될지도 모르구요.”

핸드폰 너머에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일본어) 나 같은 상급시민에게 그런 게 과연 문제가 될만한 일이겠는가? 자네는 그냥 나루사와 아이를 내 앞으로 데리고 오기만 하면 돼. 그 다음은... 다 내가 알아서 조용히 해결할 수 있으니까.]

“(일본어)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당장 원하는 것을 잡아 대령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어) 기대하고 있겠네. 부디 날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군. 이번에도 날 내가 실망시킨다면 자네에 대한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을 테니 말이야.]

통화가 끝나고,

가네무라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가 다시 돌아오자 타미야가 불같이 성을 내며 말했다.

“(일본어) 나가시마 그 녀석이 또 아이를 찾은 건가? 유스케! 넌 뭐라고 했는데? 응?”

가네무라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담배 하나를 입에 물며 말했다.

“(일본어) 히데토, 세상에 여자는 많아. 아이 보다 더 예쁜 여자도 많고 말이야.”

“(일본어) 그래서, 나가시마 그놈한테 아이를 보내주겠다고 약속을 하기라도 한 거야?”

가네무라가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대답했다.

“(일본어) 나가시마 상의 지원을 잃으면 우리 파이브 (헬스 파이브 일당들은 조직 이름을 줄여서 파이브라 부르곤 한다.) 가 존립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실제로 나가시마가 경찰들이 헬스 파이브 일당들의 범죄 행각을 눈 감고 모른 척 지나갈 수 있게 도와준 일은 지금까지 수십여 건에 달했다.

그 대가로 나가시마는 가네무라로부터 주기적인 상납금을 받기도 했고, 개인적인 의뢰를 맡기기도 했다.

어찌 보면 일개 한구레 집단인 헬스 파이브가 일본 최대 야쿠자 조직인 야마모토구미와도 경쟁할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다 나가시마의 빽 덕분이기도 했다.

“(일본어) 그래도 아이는, 아이는... 내 첫사랑이란 말이다아아아~!”

타미야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거의 울먹이는 표정으로 절규하고 있었다.

가네무라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마코토가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말했다.

“(일본어) 어이, 유스케. 그럼 진짜 나루사와 아이를 납치라도 할 거야?”

가네무라가 고개를 한번 까딱거렸다.

“(일본어) 방법이 없다. 그거 밖엔.”

“(일본어) 납치하면, 뒷일은 생각 안 해? 경찰의 추적이라도 받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거야?”

“(일본어) 나가시마 상이 알아서 처리할 거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반대편에서 듣고 있던 츠키시마가 높게 세워 만든 하이퍼 리젠트 헤어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일본어) 그런데 나가시마 상은 왜 맨날 나루사와 아이만 찾는 거야? 그 정도 부와 명성을 갖고 있으면 다른 괜찮은 여자들 얼마든지 만날 수 있잖아?”

테이블 위에서 자신의 프로덕션에서 발매한 AV DVD를 도미노처럼 쌓고 있던 이자키가 깐족거리며 말했다.

“(일본어) 난 딱 보면 알겠던데? 그 양반 취향이 확실해서 그런거야. 크크크~!”

“(일본어) 뭐, 취향?”

“(일본어) 나가시마 상은 분명 베이비페이스의 거유 타입에 환장하는 취향이라고. 나루사와 아이가 딱 그런 타입이잖아? 생긴 건 완전 애기 같은데 몸매는 아주 그냥~! 만져 보지는 않았지만 그냥 봐도 가슴이 G­cup 은 되겠드만? 거기에 얼굴까지 완전 예쁘고. 일본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타입이니 나가시마 그 양반이 발정 난 개처럼 미쳐 환장할 수밖에, 케케케~! 히데토, 너도 그래서 나루사와 아이 좋아하는 거 아니냐?”

“(일본어) 닥쳐! 옥수수 털리고 틀니 끼고 다니기 싫으면!”

타미야와 이자키가 옥신각신하는 사이,

마코토가 가네무라에게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일본어) 언제까지 보내주기로 했는데?”

“(일본어) 최대한 빨리.”

“(일본어) 지금 나루사와 아이는 집에만 있다고 하는 거 같던데. 집으로 침입해 납치하는 건 가능할지 몰라도, 문제는 그 변호사 놈이다.”

가네무라가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며 말했다.

“(일본어) 설마 그 변호사 놈이 집에서 같이 살지는 않겠지.”

“(일본어) 그럼 다행이고. 결행은 언제 할 생각인가?”

“(일본어) 오늘이라도 당장. 이따가 차로 이동해 그녀 집 부근에서 기다리며 찬스를 기다릴 거다.”

“(일본어) 직접 가려고?”

“(일본어) 몇 명 데리고 가야지. 밑에 놈들한테 맡기는 게 더 불안해.”

가네무라는 핸드폰 메모장에서 아이돌 시절 회사에 제출한 나루사와 아이의 신상명세서를 열어보았다.

그리고 거기에 적힌 그녀의 주소를 복사해 내비게이션 앱에 붙여넣었다.

­ 오후 10시, 일본 치바현 치바시 주오구 일대

민재는 아이와 함께 영화를 보고 저녁을 먹은 후,

그녀를 차로 집까지 바래다 주고 있었다.

“(일본어) 아이, 부모님께 아직 우리 교제하는 거 말씀 안 드렸죠?”

“(일본어) 네, 아직이요. 이제 곧 한국 가겠다고 말씀드리면서 그것도 같이 말씀드리려구요.”

“(일본어) 아이 부모님께서 절 탐탁치 않게 생각하실까 봐 걱정이에요. 일본인도 아닌데다가 부모도 모두 안 계시니... 절 안 좋게 생각하시지 않을까 불안하기만 합니다.”

“(일본어) 전에 어머니한테만 오빠가 어려서 부모님 여의었다고 말씀드린 적 있어요.”

“(일본어)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

“(일본어) 부모도 없는데 혼자서 너무 잘 컸다고, 오히려 대견스러워하시던걸요?”

하지만 걱정할 문제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내가 변호사가 아니라 군인이란 거... 그것도 국군정보사 요원이라는 거... 앞으로 더 아이와 부모님 모두에게 비밀로 해야 할 거 같은데... 언제까지 숨기고 살 수 있을까...?’

운전대를 잡고 있는 민재의 표정은 복잡하기만 했다.

이제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하고,

두 사람은 차 안에서 키스를 나누었다.

“(일본어) 오빠, 이따가 연락할게요!”

“(일본어) 기다릴게요, 그럼 잘 들어가요.”

아이는 차에서 내려 그에게 활짝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고는 부끄러운 얼굴로 집으로 뛰어갔다.

민재는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한 후,

변호사 사무실로 돌아가기 위해 천천히 차를 돌렸다.

그때,

아이의 집 맞은 편에 주차된 고급 외제차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서치라이트가 그리로 비치고,

차 안에 네 명의 사람들이 타 있는 게 보였다.

‘여기 사는 놈들은 아닌 거 같은데?’

아주 잠깐 불빛이 스치며 보인 차 안에 타고 있던 인물들의 외모는,

딱 봐도 건달 양아치 같았다.

본능적으로 수상함을 느낀 민재는,

차를 다른 골목에 주차해놓고 조용히 차 밖으로 나와 아이의 집으로 다시 걸어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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