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4화 〉 유민의 지난 이야기 2027년 10월 3일 (1)
* * *
오전 8시, 일본 치바현 치바시 주오구 이치바조 치바 시청 일대
이른 아침부터 시청 앞에 무수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어림잡아도 천 명은 될 듯 보였는데,
대부분 10대 ~ 20대 정도 되는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은 가네무라와 헬스 파이브 멤버들이 모아온 녀석들로,
현 조직원들은 물론 인근 학교 양키들이나 폭주족들까지 모조리 동원해 데리고 나온 것이다.
대부분 무난한 청바지에 후드티, 교복 같은 걸로 단정히 차려입고 나오긴 했지만,
불량배 특유의 껄렁한 모습은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건들거리는 자세로 왁자지껄 떠들며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
인원들의 복장을 점검하던 츠키시마가 눈을 부라리며 한 녀석에게 다가갔다.
“(일본어) 바보 같은 놈! 몸에 있는 문신 드러나지 않은 옷차림을 하고 오란 전달 못 받았나? 꼬라지가 이게 뭐야?”
츠키시마에게 지적당한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양키 녀석은 청바지에 하얀 민소매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드러난 어깨에 조잡하게 새겨넣은 문신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일본어) 앗, 어제 어머니가 빨래를 하시는 바람에 옷이 이거 밖에 없어서... 죄송합니다!”
“(일본어) 멍청한 놈! 당장 긴팔 옷이라도 사 입고 와!”
“(일본어) 네! 죄송합니다!”
양키 녀석은 겁먹은 표정으로 상가들이 모여 있는 시청 반대편으로 헐레벌떡 뛰어갔다.
하지만 이제 겨우 아침 8시가 넘은지라, 의류 상점들이 문을 열려면 아직 몇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마침 가네무라 무리 맞은 편에서도 대학생으로 보이는 수십 명이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오늘 징병 반대 시위를 하기로 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먼저 시청 앞을 점거하고 있는 가네무라 무리를 불안한 표정으로 힐끔거리며 마이크와 앰프 등 음향시설 들을 설치하고 있었다.
가네무라도 입에 담배를 물고 그들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일본어) 가네무라 상...?”
그때 빼빼 마른 찐따 같이 생긴 양키 하나가 다가왔다.
가네무라가 담배를 발로 비벼 끄며 물었다.
“(일본어) 놈이 어디 있는지 알아냈나?”
“(일본어) 네, 그게 말입니다... 어제 자정 너머 변호사 사무실에서 나오는 걸 따라갔는데 말입니다... 우체국 부근에서... 갑자기 사라져 버렸습니다.”
“(일본어) 뭐?”
“(일본어) 네, 제가 진짜 들키지 않게 조심조심 뒤를 밟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길 건너느라 잠깐 옆을 본 거 밖에 없는데... 그때 정말 감쪽같이 사라져 버려서 그만...”
가네무라는 이 녀석에게 민재가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알아보라 지시했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타미야가 양키 녀석의 엉덩이를 발로 걷어차며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
“(일본어) 멍청이! 그런 쉬운 일도 못 하나?!”
“(일본어) 아앗! 죄송합니다! 그 녀석이 정말 연기처럼 사라져버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가네무라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일본어) 저번에 나루사와 아이를 납치하려 할 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눈치 하나 기가 막히게 빠른 놈이군.”
옆에 있던 마코토가 맞장구를 쳤다.
“(일본어) 맞아, 전에 우리 애들 박살 났을 때도 놈이 아무 말도 없이 먼저 공격해 왔다고 했어. 무슨 짓을 할지 미리 알았다는 것처럼.”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빨던 이자키가 말했다.
“(일본어) 변호사들이 원래 눈치로 먹고 사는 놈들 아냐? 돈 되는 놈은 기가 막히게 알아보고 굽신거리고 아닌 것 같은 놈도 기가 막히게 알아보고는 거드름 피면서 어려운 말로 잘난 척 하기나 하고. 전에 날 변호했던 국선변호사가 딱 그런 놈이었지. 히히히.”
마코토가 진지한 목소리로 나무라듯 말했다.
“(일본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켄. 어쩌면 그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놈일 수도 있어.”
타미야가 물었다.
“(일본어) 더 위험한 놈?”
“(일본어) 확실히는 잘 모르겠지만 기분이 그래. 그냥 변호사는 아닌 것 같고 뭔가 더... 비밀이 있는 놈인 거 같아.”
가네무라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일본어) 그 변호사 미행하는 일은 다른 놈을 붙이자고. 좀 더 똑똑한 놈으로 말이야. 일단 어디 사는지부터 알아내고, 뭐 하는 놈인지도 정확히 알아야겠어.”
그때 그들 앞에 승용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고, 3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가네무라에게 다가왔다.
“(일본어) 나가시마 의원님이 보내셔서 왔습니다.”
그 뒤로 트럭 몇 대가 시청 앞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대형 앰프, 음향시설 등이 실린 트럭들과,
‘징병 만이 강국의 길!’이란 문구가 쓰인 피켓과 현수막 등을 가져온 트럭이었다.
오전 10시, 일본 치바현 치바시 일반 주택가 일대
민재는 사무실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정경호의 맨션에 와 있었다.
원래 아이와 디즈니랜드를 다녀온 후 정경호의 집에서 하룻밤 묵어가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는데,
여길 오는 도중 누군가 자신을 미행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잠시 몸을 숨기고 주변을 지켜보다가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도착하게 되었다.
“분명 경찰이나 일본 정부 사람이 미행했던 건 아니란 말이죠?”
싱크대 앞에서 스팸을 굽던 정경호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미행의 기본도 모르는 놈이었어요. 전에 아이를 노리던 그놈들과 한패인 거 같아요.”
거실 소파에 편히 앉아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민재가 대답했다.
“그놈들이 건물주 딸내미가 고소장 접수한 거 알고 그러는 걸까요?”
“그랬겠죠, 지들 똘마니들 병원에 입원시킨 사람이 누군가 궁금해서 쫓아왔을지도 모르고. 원래 조폭 녀석들은 은혜는 못 갚아도 원수는 꼭 갚으려 든다고 하잖아요?”
“아무튼 강 과장님 앞으로 더 몸 사리셔야겠어요. 내일 회사에 강 과장님 거처도 어디 다른 데로 옮겨야 할 거 같다고 보고할게요.”
정경호가 직접 만든 아침 식사를 거실 테이블로 가져왔다.
“잘 먹겠습니다~!”
스팸과 계란후라이, 된장국과 김치, 멸치볶음에 오이 소박이 뿐이었지만,
민재는 오랜만에 먹어보는 집밥을 맛나게 먹었다.
“참, 강 과장님. 어제 본부에서 연락왔었어요. 강 과장님네 CR팀, 류광택이 은닉한 자금 모두 회수해서 한국으로 복귀 중이래요.”
“그래요? 다친 사람은 없다고 하던가요?”
“네, 별다른 말 없는 거 보면 그런 거 같아요. 이제 CR팀 일본 오면 경호 일은 모두 그분들께 맡기고 강 과장님은 건물주 딸내미와 거리를 두는 게 좋을 거 같네요. 그 조폭 새끼들하고 계속 엮이면 안 되니까.”
민재는 정경호에게 지금 그녀와 정식으로 교제 중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만일 그랬다면 곧장 국군정보사령부에 보고되고, 임무에서 제외된 후 한국으로 소환당할 게 뻔했다.
민재는 아무 말 없이 리모컨을 들어 TV 채널을 돌려보았다.
마침 한국 방송에서 개천절 행사가 생방송 되고 있었다.
“이번 개천절 행사는 다른 때보다 훨씬 크게 하네요.”
“그러게요, 저기 대통령 옆에 김성운도 와 있는 거 같은데요?”
이번 개천절 행사는 남북이 통일되고 첫 번째로 맞이하는 날이라, 다른 때보다 더 화려하고 성대하게 거행되고 있었다.
정경호는 살짝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며칠 전 국군의 날 행사는 진짜 한지도 모르게 스리슬쩍 지나가더니만.”
“2차 한국 전쟁 때 전사한 남북한 군인들 애도해야 한다며, 군인들 훈장 주는 걸로 짧게 끝냈죠?”
“강 과장님은 훈장 나왔어요?”
“줄 거라고 말은 들었는데 아직 나왔다는 말은 못 들었어요.”
“세상에, 류광택 대가리에 총알 박아넣고 전쟁 시마이 시킨 사람한테 가장 먼저 훈장 안 주고, 이게 뭐 하는 짓이래요, 진짜?”
“우리 신분에 공개적으로 훈장 받기 힘들잖아요? 나중에 따로 주겠죠, 뭐.”
민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밥숟갈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런데 암만 화려하게 행사를 하면 뭐 한데요? 축제라면 축제답게, Kpop 가수도 부르고 그래야지. 예전에 어느 대통령은 싸이도 불러서 축하공연도 시키고 그러드만. 그럼 이런 날에 당연히 BTS 정도는 불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통일 후 첫 번째 개천절인데? 늙다리들처럼 답답하게 부채춤 같은 거나 추고 말이야! 진짜 정부 새끼들은 일을 알고나 하는 건지 원.”
“BTS요? 차장님 아미세요?”
“아뇨, 전 그냥 코리안 아미인데요?”
늦은 아침을 먹고 상을 다 치웠을 때쯤,
치바 지방 방송으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지금 이 시간 시청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위에 대한 뉴스였다.
오전 11시, 일본 치바현 치바시 주오구 이치바조 치바 시청 일대
“(일본어) 징병 만이 강국의 길!”
“(일본어) 의무 복무 찬성한다!”
“(일본어) 평화 헌법 유지하라!”
“(일본어) 징병 반대! 전쟁 반대!”
시청 앞에서 수천여 명의 젊은이들이 양쪽으로 갈라져 서로 다른 구호를 힘껏 외치고 있었다.
피켓과 깃발, 현수막을 든 두 세력은 마이크와 앰프까지 동원해 열띤 시위를 벌이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주며 적극적으로 호응을 유도하기도 했다.
마침 그들 주변에는 NHK 등 대형 방송사와 언론사에서 나온 이들이 취재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 나가시마가 했던 말처럼 징병에 찬성하는 시위를 하는 가네무라 무리들을 집중적으로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일본어) ...보시는 바와 같이 이처럼 수많은 젊은이들이 정부가 추진하는 징병과 의무 복무에 찬성하기 위해 거리로 나와 있습니다. 이들은 앞으로 있을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징병을 통해 일본을 좀 더 강한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며, 나라를 위해 자신의 젊은 날을 아낌없이 바치겠다고 결의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반대편에서 징병 반대를 외치는 더 많은 젊은이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
짜여진 각본대로 여론을 조작하는 방송을 찍고 있었다.
가네무라와 헬스 파이브 멤버들은 무리들 사이에서 이 광경을 모두 지켜보는 중이었다.
방송과 언론이 사실과 다른 내용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는 사실은 금방 탄로나고 말았다.
시위 중에도 핸드폰을 통해 인터넷과 방송에서 어떤 내용이 보도되고 있는지 모두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어) 뭐야? 왜 우리 얘기는 안 나오는 거야?”
“(일본어) 이러면 다들 여기 모인 사람들이 징병에 찬성하기 위해 모인 걸로 오해받게 되잖아? 방송국 놈들 뭐하는 짓이야?”
징병 반대 시위를 하던 이들은 분노하고, 또 흥분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누군가 맞은편에서 징병 찬성을 외치던 사람 하나를 알아보고 이렇게 외쳤다.
“(일본어) 아니 저 녀석! 000 학교 마테야 잖아?”
몇몇 사람들도 그를 알아보고는 함께 소리 질렀다.
“(일본어) 마테야 라면 그 유명한 양키 녀석?”
“(일본어) 뭐야? 주변에 같이 있는 녀석도 모두 같은 패거리잖아?”
“(일본어) 맞아, 전에 저것들이 몰려다니면서 폭주 뛰는 거 나도 봤어!”
“(일본어) 뭐? 그럼 저것들 모두 소년범 출신이잖아?”
“(일본어) 소년범 출신이자 미래의 우연대 (폭력배, 일본에서는 폭력배를 우연대라 칭한다.), 아니 예비전과자들이지!”
“(일본어) 우연대건 전과자건 모두 군대 안 가는 건 마찬가지인 놈들이야!”
“(일본어) 그런 놈들이 모여서 징병에 찬성한다고? 흥, 웃기지도 않는군!”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그들을 향한 손가락질은 물론
물병까지 날아왔다.
그러자 양키들도 이성을 잃기 시작했다.
“(일본어) 뭐? 뭐라고?! 이 자식!!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일본어) 예비전과자? 죽고 싶냐, 이 약해 빠진 놈들아!”
양키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반대편 시위대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들었다.
작은 몸싸움으로 시작된 이 다툼은,
이내 집단 패싸움으로 커져 버렸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헬스 파이브 멤버들도 당황한 표정으로 싸움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일본어) 어이 어이~! 진정하라고! 여기서 싸우면 안 돼!”
츠키시마가 싸움에 휘말린 양키들의 옷을 잡아당기며 어떻게든 말려보려 했지만,
이미 수십여 명의 사람들이 엉겨 붙어 어떻게 손 써볼 도리가 없었다.
위잉 위잉 위잉~!
마침 주변에 있던 경찰들이 싸움을 말리기 위해 확성기의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일본어) 경찰이다! 일단 피하자!”
마코토가 가네무라의 어깨를 잡고 외쳤다.
가네무라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일본어) 모두... 지금 당장 집으로 돌아가라고 해.”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돌아섰다.
* * *